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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금강산과 김원 화백, 김정태 암벽등반가(최종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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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조회 |
288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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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서양화가 김원 화백과 금강산 우리나라 서양화단(西洋畵壇)의 원로(元老)요, 개척자 중의 하나인 김원 화백(畵伯), 그는 1912년 평양 출생 1938년 동경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 졸업 1947년 이화여대 미대 교수 1956년 홍익대학교 미대 교수, 미대 학장, 대학원장 1969년 국전심사위원장 1974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5년 서울시 문화상 1981년 예술원 회원, 목우회(목우회) 회장 1983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한국미술협회 회장 홍익대학교 미대 명예교수 1986년 3·1 문화상 199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94년 작고(82세) ![]() 금강산이라는 이름은 나에게 항상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안겨 준다.
생각해 보면, 10대 소년 시절부터 해방될 때까지 금강산에 바하여 23회나 올랐다. (백두산과 묘향산에
2~ 3회씩 올랐다.) 특히, 외금강 만물상(萬物相)에 이르러, 큰 충격에 휩싸여, 나도
모르게 미친 듯 고함을 질러댓고, 해금강(海金剛)의 파도를 대하고는 그만 눈물을 쏟았다.
---김 원(金源) (1912-1994, 서양화가, 예술원 회원, 평양 출생)--- 이제 김 원 화백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금강산으로 여행해보기로 하자. ① 만물상(萬物相) <만물상 전경(全景), 41cm×10.5cm, 1984년> <만물상, 90.9cm×57cm, 1987년> ![]() <만물상 설경(雪景)> ······ 만물상 해설은 「28. 정선과 진경산수화」를 보시오. ![]() <만물상 천선대의 기암들, 90.9cm×57cm, 1987년> ![]() <만물상 천선대의 기암들, 1930년대 자료임> 기암들 다투어 아리따운 자태를 뽐내며, 창공을 향하여 손짓하는 오묘한 모습은 신비하기 그지없다. 봉우리 가파르게 솟아오르고, 먼 산들은 아련히 굽이굽이 맴돈다. 놀란 봉우리들 땅에서 빠져나와 부릅뜬 눈 서로 겨루어 보며 성난 돌 기둥 하늘로 치솟는다. 본디, 금강산은 조물조(造物主)의 설계도를 가지고, 세월이라는 명공(名工)이 무서운 끈기로 갈고 다듬어 조성(造成)한 것이요, 이는 영원(永遠)에서 영원으로 끝없는 도급(都給)이니, 물론(勿論), 시방(時方)도 진행 중에 있는 것이리라. 신만물상(新萬物相)에 속한다. ③ 신계사(神溪寺) <신계사 설경(雪景), 41.3cm×31.7cm, 1987년> ······ 신계사 해설은 「34. 찬송거사와 금강산」을 보시오. <비로봉, 65.1cm×45.5cm, 1987년> ······ 비로봉 해설은 「35. 정비석의 산정무한과 금강산을 보시오. <천지, 33.3cm×24.2cm, 1987년> ······천지 해설은 「제주도 사람들의 영원한 어머니 김만덕과 금강산」을 보시오. ⑥ 삼선암(三仙巖) <삼선암, 33.3cm×24.2cm, 1987년> ······삼선암 해설은 「33. 일본화가 덕전옥룡과 금강산」을 보시오. 37. 암벽 등반가 김정태와 집선연봉 김정태(1916~1988, 한국산악회 부회장)는 전문 산악인으로서, 일제시대 금강산 집선연봉 동북릉 암벽 등반(Rock climbing)을 생애 최고의 보람으로 여겼다. ![]() <집선연봉 동북릉 설경(雪景)> “ 살아서 가 보지 못한다면 죽어 넋이라도 한 번 꼭 다시 가고픈 곳입니다. 넋들에는 삼팔선도 소용 없겠지요······.” 10세 때부터 암벽 등반과 스킨 등반을 주로 하면서 전문 산악인으로 살아 온 김 정태(1926년생)씨는 기자가 금강산이란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이렇게 금강산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또 ‘겨레의 심장’이라고도 했다. 신체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한 허전함을 항상 느낀다고도 했다. 금강산이 한반도 아름다움의 상징으로서, 옛 시인 묵객을 포함한 모든 우리 사람들에 의해 칭송되어 온 천하명산이 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현재 한국 산악회 부회장으로 있는 김정태시는 1935년, 스무 살이 되던 해 금강산을 처음 대했을 때의 감격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는 겨울에는 스키 등산, 가을에는 암벽 등반으로 해마다 두 번 이상 씩을 올랐다. 그래서 해방이 되던 해인 ‘45년 4월 마지막 등반까지 합하여 30여 차례는 넘게 금강산을 오르게 되었다고 말했다.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미쳐버린 청춘이었다고 할까······. 그의 금강산 첫 등정은 실패로 끝났다. 목표는 연봉 제2봉(동북능) 북벽, 이 동북능 북벽은 노출벽의 길이가 9백 미터로서 서울 인수봉의 3배의 길이이며 알프스의 노출벽 과도 맞먹는 웅장함 암벽, 때는 일제 치하인 ‘35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10월 어느 날 이었다. 대원 7인은 온힘을 다하여 기어 올랐지만 암벽 중간에서 날이 저물었다. 벽 중간에서 밤을 새야 했다. 얼음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침 암벽에 턱진 곳을 발견하지 못했던들 그들은 무사하지 못했으리라. 그 바위 틈은 네 사람이 들어가면 꼭 차는 곳이 었다. 교대로 그곳에 들어가 껴안고 비비고 해서 체온 냉각을 막아 사고는 면했지만 등반은 실패였다. 그 이듬해 김 정호(전 한일 은행장)씨 등 4인이서 또 올랐다. 무아 지경의 황홀감과 가스가 춤을 추는 듯한 환각을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일행 중 미숙자가 있어 또 실패했다. 겨우 세 번째에야 그 동북능 암벽을 돌파하는 데 성공 했다. 1937년 이미 한국인들만으로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쉬쉬해 가며 백령회(白領會) 라는 산악회를 결성한 이후였다. 백령회가 발족을 보게 된 것은 ’36년 올림픽에서의 손기 정의 마라톤 우승의 감격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신감을 얻고 거기에서 자극받은 것이 큰 계기였다고 심씨는 회고했다. 이 백령회는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해 결성된 최초의 산악회였으며 1945년 6월 15일 재빨리 조선 산악회로 개편 확대되었다. 김씨의 머릿속에 는 금강산의 등산로가 지금도 훤하다. 일반 관광(당시에는 探勝 이라는 용어가 사용됐다) 코스는 잘 다니지 않았다. 그는 특히 눈얼음이 쌓인 겨울산을 좋아한다. 백두, 묘향, 황학 산도 모두 겨울에 올랐다. 그가 처음 산에 오르게 된 것은 소학교 5학년 때 어머니의 도선 가람(지금의 북한산 도선사) 불공을 따라갔던 것이 계기였다. 그는 그 절에 머무르지 않고 4촌형과 함께 백운대 정상까지 올랐던 것이다. 지금도 있는 백운대 돌계단이 그즈음에 벌써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다. 그 후 산을 좋아했고 또 금강산에 미치고 반해 평생 산악인으로 살아 온 것이다. 그는 어느해인가 어머니의 ‘금강산 소원’을 풀어 드리기 위해 평소 잘 다니지 않던 일반 코스를 택해 때로는 손 잡고 때로는 업고서 외금강에서 내금강 으로 넘어 갔다. 그 때 내금강의 마하연이란 절에 이르자 ‘극락세계가 이런 곳이 아닌가’ 하는 탄복을 어머니와 함께 했다. 날아갈 듯한 절의 모습은 오대산 적멸보궁에 비교될 듯하고 영계(靈界)와의 접척을 느끼게 하는 비경이란다. (1938년 인터뷰한 내용임) 38. 금강산 관광 거점 온정리 (溫井里, 해발 50~60m) ![]() <외금강역 광장에서 본 외금강 영봉(靈峰)들, 1930년대 자료임, 적외선으로 촬영한 것임> ![]() <외금강역, 현재 소실되었음, 1930년대 자료임>
<온정리, 1930년대 자료임> <금강산호텔, 객실 240여 개, 7개의 건물로
구성되었는데, 주건물인 1호
또한 온정리에 현대그룹이 건설한 돔(dome)지붕의 ‘금강산
문화회관’ -보통 공연장 (公演場)으로 부름, 갯것 620석- 과 ‘온정각 휴게소’ -식당, 스낵코너,
커피숍, 기념품 판매장 등이 있음- 가 있고, 소나무 우거진 대자봉(362m) 기슭에 온천장(溫泉場)
- 연건평 1,600평에 동시에 1,000명을 수용할 수 있음- 도 건설하여,
노천탕(露天湯)에 몸을 담그고, 눈앞에 병풍처럼 펼쳐진 외금강 영봉들을 바라보는 감동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는다. ⓛ 수정봉(水晶峰, 773m)과 바리봉(鉢峰, 488m) 수정봉은 온정리(溫井里, 해발 50~60m) 서북쪽 가까이 우뚝
솟은, 잘 생긴 바위 봉우 리다. 또한, 수정봉은 생김새도 빼어나거니와, 수억 년 풍화(風化),
마모(磨耗)되어, 아침 해와 저녁놀에 시시각가 변환(變幻)하는 광경이야 말로 신기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수정봉 일대는 화강암과 더불어 수정(水晶)이 널리 분포되어 있어, 옛날엔 산 전체가 보석
처럼 반짜거렸다 한다. 지금은 돌옷(이끼)에 덮여 있으나. 비가 온 뒤, 화강암 속에 수정들 이 반짝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밝고 투명한 것, 검은 빛이면서도 투명한 것 등이 나는데, 결정체(結晶體)가 큰 것으로 유명하다. <수정봉 전망대에서 장전항을 조망함> 2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데 서쪽 멀리 온정령(溫井嶺, 857m) 옆 상등봉(上登峰, 1,227m), 관음연봉(觀音連峰, 상관음봉 1133m, 중관음봉 892m, 하관음봉)이 성벽처럼 뻗어 있고, 그 뒤로 옥녀봉(玉女峰, 1424m), 비로봉(毘盧峰, 1638m), 장군봉(將軍峰, 1560m), 채하 봉(彩霞峰, 1588m), 집선봉(集仙峰, 1351m), 그 중간 세존봉(世尊峰, 1160m)이 솟아 있고, 가까이 온정리(溫井里) 일대가 저 아래 깔려 있다. 뒤돌아 보면 서북쪽 오봉산(五峰山, 1264m), 선창산(仙蒼山, 1226m)이 기묘하고, 가까이 천불산(千佛山, 654m)의 무수한 바위 기둥이 톱날 같다. 그리고 바로 밑 장전항(長箭港)이 괴불 주머니처럼 멋지다. ![]() <바리봉 (일명 발봉)> 또, 동북 가까이 ⓛ발봉(鉢峰, 일명 바리봉 또는 치마바위, 488m)이 ②바리를 엎어 놓은 듯한 기묘한 생김새로 발길을 멎게 한다. 정상은 수천 명이 앉고도 남을 만큼 넓다. 이 봉우리들은 바로 바다에 닿았고, 깎아지른 암봉(岩峰)이어서, 해발에 비해 매우 높고 웅장 하다.
이것으로 2004년『한관수의
금강산이야기』금강산전문가 칼럼을 마무리 짓습니다. 금강산칼럼 대해
여러분들께서 보여주신 많은 관심과 사랑에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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