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무게를 견딘 우직한 돌다리, 살곶이다리

icon지역 : 서울 성동구 조회 : 21732 최종수정일 : 2013.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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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곶이돌다리 역사의 무게를 견딘 우직한 돌다리, 살곶이 다리 서울 행당동

백발백중 태조 이성계

“어서 전하를 쫓아라!”
정도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앞서 말을 달리던 이성계가 갈대숲 사이로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왕을 호위하던 별장들이 말에 박차를 가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찾았느냐?”
정도전이 별장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아니옵니다. 워낙 말 타는 솜씨가 신출귀몰 하셔서…….”
별장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만약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다.”
정도전은 소리를 지르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 년 전인 1392년 가을.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기 위해 이궁을 짓고 틈날 때마다 한양을 찾았다. 북악을 등지고 그 뒤로 삼각산과 도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땅, 앞쪽으로는 한강이 흐르는 한양은 새 왕조의 수도로 손색이 없는 길지 중의 길지였다.
조선이 들어서면서 나라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노략질을 일삼던 외구는 대부분 소탕되었고 홍건적도 더는 국경을 넘보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이성계는 날마다 궁궐에 들어앉아 있는 생활을 못 견뎌 했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사냥을 다녔다.
왕이 된 뒤에도 이성계의 무예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가 탄 말은 흡사 관운장의 천리마를 닮은 듯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뒤따르는 병사들의 골탕을 먹였다. 활솜씨 또한 백발백중이어서 한번 겨냥을 당하면 어느 동물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살곶이다리

“살곶이다리가 앞두고 있는 한강의 모습.
시간이 흐르고 강물이 흘러가도 강이 주는 여유와 풍요로움은 역사처럼 되풀이되어 늘 그렇게 다시 채워진다.”

왕이 쏜 화살이 떨어진 곳

“전하, 전하. 어디 계시옵니까?”
정도전은 애타게 이성계를 찾았다. 갑자기 고려가 멸망한 탓에 아직 충성을 다하지 않는 백성들이 많았다. 적지 않은 선비와 장수들이 고려의 편을 들며 곳곳에 숨어 저항을 계속했다. 정도전은 왕이 혹시라도 자객을 만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저기를 보십시오.”
별장 하나가 갑자기 허공을 가리켰다.
“저게 뭔가?”
“꿩이옵니다.”
날아가던 꿩 한 마리가 갑자기 강변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옳커니. 주상이 저쪽에 계시는구나.”
정도전은 기뻐하며 급히 새가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왕이 말에서 내려 살에 꿰어진 꿩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화살은 정확하게 꿩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정도전과 뒤늦게 달려온 아장들은 혀를 차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전하의 활솜씨는 귀신도 따르지 못할 거야.”
당시 이성계가 사냥을 하던 곳은 왕십리가 지척인 현재의 뚝섬 인근이다. 전에는 이곳을 살곶이들이라고 불렀다. 왕이 날린 화살이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곶’은 해안가에 돌출한 지형을 말한다. 살곶이들은 중랑천이 사근동을 돌아 나오는 청계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들어가는 지점에 자리해 있었다. 훗날 이곳의 지명은 뚝섬으로 바뀌게 되는데, 땅이 평평하고 넓어 조선시대 왕들은 대대로 이곳에서 군사 훈련을 하거나 군사를 사열했기 때문이다.
왕이 군사 검열을 나오면 왕의 깃발인 둑기(纛旗)를 세웠으므로 뚝섬이 된 것이다. 땅이 비옥했기 때문인지 이곳에는 각종 동식물이 많이 살았다. 조선시대 왕들은 대대로 이곳에서 사냥을 했는데,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100년 동안 이곳에 왕이 이곳에 행차한 기록만도 151회나 된다. 또한 이곳에는 말을 방목하여 기르는 큰 목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살곶이의 유래

다시 이야기를 조선시대 초기로 돌려보자. 살곶이에 얽힌 전설은 이외에도 다양한 버전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성계와 이방원과의 기싸움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자식들 간의 권력 싸움에 실망한 나머지 일찌감치 상왕으로 물러나 함흥에 칩거했다. 태종 이방원은 그런 아버지에게 늘 인정받는 왕이 되고 싶어 했는데 마침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를 설득하여 한양으로 모셨다.
태종 이방원은 태조 아버지가 서울로 돌아오자 뚝섬에서 환영 연회를 열도록 하였다. 이때 하륜은 연회장에 큰 차일을 칠 때 굵고 긴 기둥을 여러 개 세워 놓도록 건의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태종이 인사를 드리려 앞으로 나아가니 태조 이성계가 갑자기 활을 꺼내 태종에게 쏘았다. 다급한 나머지 태종은 기둥 뒤로 숨어 목숨을 건졌다. 태조가 쏜 화살은 이방원이 서 있던 땅에 그대로 꽂혔다. 그래서 살꽂이가 이후 살곶이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이야기는 조선조 최고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세종조로 건너뛴다.
이번에도 사람만 바뀌었을 뿐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자신의 아버지처럼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 이방원 역시 사냥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태종은 툭하면 말을 몰고 사냥을 나갔는데 그때마다 한강을 건너는 일에 큰 불편을 느꼈다. 힘껏 말을 달리다가도 뚝섬에 이르면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아들 세종은 효심이 깊은 왕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고충을 간파하고 대신들로 하여금 살곶이들에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다리를 놓게 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 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실제로는 한양과 지방을 잇는 튼튼한 다리를 건설해 백성들의 고통을 줄여 보겠다는 조정의 의지와 전략적 필요에 의하여 다리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기록을 보면 세종 2년인 1420년 5월 6일, 상왕 태종이 유정현과 박자청으로 하여금 살곶이다리를 만들도록 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리 건설은 난항을 겪었다. 대규모 석재를 운반하여 자르는 일은 당시의 기술력으로 한두 해 만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마가 겹쳐 초석이 모두 떠내려가고 말았다.
세종은 몸소 다리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내가 가서 직접 확인해 보겠다.”
그때 더 큰 소식이 들려왔다.
“전하, 큰일났사옵니다.”
세종은 깜짝 놀라 대신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냐?”
“상왕께서 붕어하시었습니다.”
“무엇이라고?”
세종은 대성통곡하며 아버지를 향해 달려갔다. 효성이 지극했던 세종은 정성껏 아버지를 장사 지낸 뒤 다리 공사 중단을 명령하게 된다. 다리 건설에 동원됐던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상소를 받은 뒤였다. 무엇보다 백성들을 먼저 생각했던 세종은 때를 보아 다시 다리를 건설할 계획이었지만 생전에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살곶이다리 모습

“성대한 왕의 행차에도 끄떡없던 살곶이다리의 견고함.
오백여 년을 버텨온 우직한 그 모습에서 단단하게 다져졌던
조선시대의 시간과 역사가 느껴진다.”

드디어 완성된 살곶이다리

살곶이들에 다리가 들어선 것은 성종조에 이르러서였다.
세종이 죽고 약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당시 조선은
문화의 중흥기를 이루며 놀랍게 발전을 거듭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한양을 오갔지만 한양으로 들어올
때마다 배를 타야 했기 때문에 특히 남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불편이 컸다. 다리 건설에 대한 필요성
이 점점 커지던 성종 6년, 즉 서기 1475년 9월, 병조판서
이극배가 성종을 찾아와 아뢰었다.
“살곶이에 다리를 놓아 백성들의 통행을 편케 하소서.”
오래전부터 다리의 필요성을 느껴오던 성종이었다. 당시
이 지역은 교통의 요충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한양 도성에서 동대문이나 광희문을 나와 광나루로 빠져
강원도로 가는 길목이었으며 또한 송파나루로 한강을
건너 충주로 가는 큰길이었다.
“그렇게 하여 백성을 편케 하시오.”

성종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즉시 다리 건설을 위한 관청이 생기고 나라의 내로라 하는 다리 기술자들과 석공들이 한양으로 불려 올라왔다. 오늘날의 경부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당시로써는 수많은 물자와 인력이 투입되는 대공사였다. 1475년에 착공된 다리는 1483년, 성종 14년에 이르러서야 완공을 볼 수 있었다. 장장 8년에 걸친 대공사였다.
“이제 백성들이 마음껏 다닐 수 있게 되었구나.”

왕의 행차 모습

성대한 왕의 행차에도 끄떡없던 살곶이다리의 견고함.
오백여 년을 버텨온 우직한 그 모습에서 단단하게 다져졌던 조선시대의 시간과 역사가 느껴진다.

역사의 무게를 견뎌온 우직한 다리

건설 당시 다리 이름은 제반교(濟盤橋)였다. 단단하기가 반석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리의 길이는 총 78미터, 넓이는 6미터에 이르러 가마 두 대가 비켜가고도 남을 넓이였다. 이름 그대로 다리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튼튼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전체적으로 수표교와 비슷한 공법으로 만들어진 다리 가운데 하나로, 세밀한 기법이 수표교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으나 조선 전기 교량 기술을 잘 표현한 다리로 평가받는다.
살곶이다리는 조선 말기에 이르러 한 차례 수난을 겪는다. 임진왜란으로 불타 방치됐던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돌이 모자라게 되자 흥선대원군이 살곶이다리를 뜯어 돌을 사용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하나의 전설일 뿐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 후에 홍수로 다리가 유실되자 백성들이 그 원인을 나라의 학정에서 찾았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살곶이다리는 1920년 한양에 닥친 대홍수 때 북쪽 다리가 무너져 유실 된 채 그대로 방치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 새로운 시멘트 다리가 건설되면서 살곶이다리는 흉한 모양 그대로 방치되어 오다가 1972년 서울시가 유실된 부분을 시멘트로 복원하고 난 뒤 사적 제160호로 지정하여 보호해오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다리 중 가장 긴 다리라는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살곶이다리는 그 동안 제대로 평가를 받아오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따라서 각계의 복원 요구가 꾸준히 계속되어왔는데 다행스럽게도 2010년 1월, 담당구청인 성동구가 한양대학교 박물관과 손을 잡고 복원작업을 위한 기초 자료 조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역사의 무게를 견디며 우직하게 살아온 살곶이다리.
백성을 위해 만들어진 그 다리가 우리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올 날을 기대해본다.

주변관광지도

<주변관광지>

* 서울 살곶이 다리 02-2286-5203
* 서울숲 02-460-2938
* 수도박물관 02-3746-5935
* 살곶이체육공원 02-2286-5815
* 한양대학교박물관 02-2220-1394

* 글, 사진제공 : 「강,이야기를 품다_한강편」

담당부서국내스마트관광팀

등록 및 수정 문의02-728-9769

관광안내 문의1330(일반, 공중전화, 핸드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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