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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는 천안을 하늘 아래 으뜸인 요충지라 했다. 요충지이기에 천안은 많은 사람에게 스쳐 지나는 길목이다. 아버지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삶이 지치면 위로를 받으러 무거운 걸음을 이끌고 터벅터벅 고향을 찾았고, 기쁜 일이 생기면 소식을 전하러 쏜살같이 내달려 갔다. 고향에 머물다 온 아버지의 얼굴은 맑았다. 그 모습을 본 어린 나는 막연히 생각했다. 사람을 편안하게 보듬는 것, 그것이 천안의 힘이라고. 1984년 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천안까지 가는 길이었다. 작은 발로 인파를 뚫고 아장거리며 따르던 아버지의 귀성길은 설레기도 하고 고달프기도 했다. 열차 안은 자리 없이 올라탄 입석 여행자들로 빡빡했다. 시루 속의 콩나물도 그보다 빼곡하진 않을 것 같았다. 우리도 입석 여행자였다. 어른들의 엉덩이 사이에 끼어 이리저리 흔들리던 꼬마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낯선 할머니가 의자 아래 놓인 짐 보따리에라도 앉으라며 자리를 내주셨다. 눈앞엔 할머니의 무릎이 그 위엔 닭이 있었다.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닭이 기차 타는 것을 보았다. 백숙이나 삼계탕이 될 운명이었겠지만 어린 눈에 비친 닭은 기차 안의 어른들처럼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할머니는 키우던 병아리가 닭이 되어 시골로 데려간다고 하셨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닭을 보면서 한 시간을 넘게 달렸다. 서울서 잘 자란 닭이 돌아갈 곳, 시골서 잘 자란 어른이 안부를 묻고 마음을 놓는 곳 모두 천안이었다.시절은 변했고 천안도 쑥쑥 자라서 대도시가 되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거칠고 투박하고 촌스러운 때를 벗고 세련되고 매끈해졌다. 천안의 옛 모습이 그리운 나는 그날의 기억을 더듬고 또 더듬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천안은 더없이 포근하고 아늑한 ‘나의 시골’로 제자리를 찾는다. 천안역에 내린 후의 동선은 언제나 같았다. 역전에서 흰 앙금이 들어있는 따끈한 호두과자를 먹고 명동거리를 지나 중앙시장에서 장을 본 후 시골집으로 들어가는 코스였다. 서울의 명동만큼이나 붐볐던 대흥동의 명동거리는 1990년대 초반까지 천안 최대의 번화가였다.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이들은 꼼짝 없이 천안역에 발을 들여야 했고, 덕분에 역전의 명동거리는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했다. 지금의 명동거리는 쓸쓸하다. 터미널 인근에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고, 아산에 KTX역이 생기면서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서다. 그럼에도 이곳은 어딘지 기이한 매력을 발산한다. 망한 나이트클럽, 문 닫은 대형 쇼핑몰 르 씨엘(천안 최초의 백화점인 미도 백화점의 마지막 이름이다)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거리에는 구제 옷을 파는 가게들과 좌판이 늘어서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듯 보인다. 거리는 드라마 세트장과 똑 닮은 정취다. 르 씨엘을 중심으로 천안역까지는 빈 건물과 녹슨 간판이 많아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누아르를, 중앙시장 입구까지의 거리는 옛 모습 고스란한 작은 점포들이 많아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시대극을 보는 느낌이다. 버려진 번화가지만 천안 최대의 재래시장으로 이어지는 길인 만큼 온기는 남아있다. 거리가 지금의 모습 그대로 보존된다는 전제하에, 어쩌면 이곳은 훗날 서울의 성수동만큼 매력적인 지역이 될지도 모르겠다. 명동 길과 이어지는 큰 재빼기 길과 작은 재빼기 길이 만나는 지점에 남산중앙시장이 있다. ‘재빼기’라는 이름이 주는 어감 그대로, 재를 넘고 난 내리막에 분지처럼 안겨있는 시장이다. 이곳은 1918년 문을 연 이래 줄곧 천안 최대 규모의 시장이었다. 인근 병천, 성환, 입장 사람들이 몰려 느릿한 말투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던 삶의 장이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 손을 잡고 누볐던 때와는 다르게 현대화된 모습이지만 재래시장에서 느낄 수 있는 푸근한 분위기는 그대로다. 200여 개의 점포와 90여 개의 노점에서는 식료품, 생필품, 골동품에 이르는 다양한 물건들을 판매한다. 가장 유명한 집은 ‘쪽문만두’다. 가방 파는 점포 옆으로 난 쪽문을 밀고 들어가는 집이다. 예순을 넘긴 나의 고모가 중학생이던 시절 다니던 집이란다. 쪽문은 과거로 넘어가는 비밀의 문 같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50년 된 오래된 점포의 역사가 온전히 보인다. 그릇장, 식탁, 거울, 빚은 만두를 얹어놓은 나무판자 등 가게를 메운 모든 것들이 옛 모습 그대로다. 먹거리 저장하던 할머니의 광에 들어간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메뉴는 두 가지. 직접 반죽한 피에 무와 다진 고기가 주재료인 소를 넣어 찌거나 튀겨 낸다. 찐만두는 쓱싹쓱싹 대충 만든 것 같지만 깊은 손맛이 나고, 튀김만두는 본래 만두 맛에 고소한 기름 맛이 더해졌다. 가격도 착하다. 만두 여덟 개에 3000원, 하나에 400원이 안 된다. 요즘 시대에 드물게 보리차를 끓여내는 정성스러운 집이다. 시장에서 나고 자란 중년 남자가 들어와 만두를 주문했다. 술만 먹으면 옛 생각에 젖어 이 집으로 오게 된다고 했다. 그가 만두와 곁들여 먹은 것은 어린 시절의 향수다. 구도심을 떠난 사람들이 모여든 곳 중 가장 번화한 곳은 터미널 인근, 여기에 아라리오 조각공원이 있다. 볼거리 없던 삼남의 통로 천안은 아라리오 조각공원 덕에 세계 미술사에 길이 남을 명소가 됐다. 면면을 살펴보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세계적인 조각가 아르망 페르난데스의 ‘머나먼 여정’, 현대미술의 슈퍼스타인 데미안 허스트의 ‘채러티(charity)’와 ‘찬가(hymn)’, 키스 해링의 ‘무제(untitle, figure on baby)’와 ‘줄리아(julai)’, 인도 미술가 수도드 굽타의 ‘통제선(line of control)’ 등의 작품에 이어 2013년에는 일본 작가 코헤이 나와의 거대한 작품 매니폴드(manifold)도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이처럼 거장들의 조각이 한자리에 모인 광장은 그 유례가 드물다. 독일의 저명한 미술지인 아르테(art)는 아라리오 조각공원을 꼭 가봐야 할 세계의 미술지도 중 한 곳으로 선정하기도 했단다. 국외 작가 외에도 국내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광장 곳곳에 전시돼있어 도심 속 문화 휴식처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Ci Kim이라는 이름의 미술가로 활동하는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의 작품 ‘image2’는 천안의 명물이 됐다. 빨간 가방을 형상화한 작품 앞은, ‘빨간 가방 앞에서 만나자’며 약속을 잡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예술이 대중의 일상생활로 시나브로 스미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조각공원 내 아라리오 갤러리도 놓치지 말고 들러보자, 갤러리 소장품 200여 점이 상설로 전시되고, 수준 높은 기획전이 끊이지 않고 열린다. 밴드 버스커버스커의 노래 ‘꽃송이가’에는 ‘단대 호수 걷자고 꼬셔’라는 가사가 있다. 그 단대 호수가 천호지다. 천호지는 1957년에 준공된 저수지로, 천안천의 원류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무도 모를 것 같던 적막한 호반에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아름다운 산책로가 생겨났다. 깔끔하게 조성된 산책로지만 인공적이지 않고 으레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대체로 조용하고 고즈넉하지만, 인근에 대학이 다섯 개나 있어 청춘들의 활기가 점점이 박혀 빛난다. 해 질 녘, 맑고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물결이 일렁인다. 그 위로 오리들이 다른 모양새의 파문을 일으키며 유영한다. 제아무리 날이 선 감각이라도 이곳에선 둥글어질 것 같았다. 혼자 걷기 이만한 곳이 없고, 누군가 걷자고 꼬시면 흔쾌히 따라나설 만큼 평온한 풍경이 이어졌다. 물리적으로는 서울 토박일지라도, 정서적으로는 스스로 천안 사람이라고 믿고 싶다. 발붙이면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한 곳을 고향이라 한다면, 천안은 ‘나의 살던 고향’이다. 예전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나 또한 맑은 얼굴로 돌아왔으니, 천안은 ‘나의 살던 고향’이 맞다. 출처 : 청사초롱 11+12호 글, 사진 : 문유선(여행작가) ※ 위 정보는 2015년 12월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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