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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 같은 하루하루에 뭔가를 하고자 하는 의욕이 상실된 지 오래였다. 문득 어느 하루쯤은 느긋해지고 싶었다. 숲을 따라 휘적휘적 걷고 즐기며 아름다운 바다를 실컷 누리고 싶었다. 그렇게 단 하루, 변산반도로 느긋한 산책을 나섰다. 변산반도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내소사다. 누군가의 사진 한 장에 마음이 뒤흔들렸던 곳이다. 평범한 그 사진 속에는 여유와 휴식이 가득했다. 찌든 일상을 잊고 숨을 고르기에 그만한 곳이 없어 보였다. 내소사로 향하는 길은 전나무 숲이다. 수령 150년 이상 된 나무들이 600m 숲길을 장식한다. 커다란 나무에 둘러싸인 아늑한 길은 자꾸만 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숲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염불소리가 명상 음악처럼 마음을 차분하게 다독였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때 창건한 고찰이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됐다가 조선 인조 때 중건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대웅보전도 그때 세워졌다. 첩첩산중에 틀어박힌 산사가 아닌 탓에 이런 고초를 겪었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언제든지 쉬어갈 수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보물 대웅보전은 단아한 꽃살문으로 유명하다. 연꽃과 국화, 모란꽃이 가득 수놓아진 문살이 깊고 그윽한 정취를 풍긴다. 색이 벗겨지고 나무 고유의 빛깔만 남았지만 봄날의 꽃밭처럼 화사하고 우아하다. 사찰 앞마당에는 금줄을 두른 느티나무가 반긴다. 무려 1000년을 뿌리내린 할머니 당산나무다. 수령 700년 된 할아버지 당산나무는 일주문 앞에 있다. 매년 정월대보름 전날이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가 열린다. 할머니 당산나무 아래에서 먼저 지내고 할아버지 당산나무 아래서 마무리를 한단다. 할머니 나무 앞에 멈춰 섰다. 넉넉한 존재 자체가 큰 위로를 건네는 듯했다. 눈을 감고 소원 하나를 살며시 보탰다. 그녀는 내 마음을 알았다는 듯 배시시 이파리를 나풀거렸다. 내소사에서 나와 일주문 앞 카페에 앉았다. 목도 마른데다 조금 출출하기도 했던 참에 '오디팥빙수'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부안은 국내 최대 오디 생산지답게 오디로 만든 음식이 많다. 매년 6~7월이면 내소사 주변 농장마다 가지가 부러질라 휘영청 오디 열매가 열린다. 이때 수확한 오디는 급속 냉동시켜 색과 향을 그대로 보존한다. 오디팥빙수를 주문하자 손가락 마디만한 오디가 잔뜩 얹어진 빙수가 나왔다. 예쁜 보랏빛을 눈으로 한 번, 새콤달콤한 맛을 입으로 또 한 번 느끼며 순식간에 그릇을 비웠다. 잠시 카페에 앉아 더위를 식히고 곰소염전으로 향했다.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천일염전이다. 바다와 인접한 다른 염전과 달리 곰소만 안쪽에 숨은 듯 자리했다. 반듯하게 정리된 곰소염전 바닥에는 무수한 소금 입자가 우윳빛 꽃을 피우고 있었다. 오래된 소금 창고는 세월을 그대로 드러내며 운치를 더했다. 소금은 보통 3월 말에서 10월까지 생산되는데, 여름에는 비가 잦아 소금을 거두지 못하는 날이 많다고 한다. 뙤약볕 아래 염도를 체크하는 염부의 발걸음이 어쩐지 바빠 보였다. 곰소 천일염은 조선시대부터 임금에게 진상품으로 올릴 만큼 값진 식재료였다. 입지 조건상 바닷물에 미네랄이 많기 때문에 소금의 맛이 깊고 풍부하다. 이러한 소금으로 담근 곰소젓갈 역시 명성이 자자하다. 곰소젓갈은 1년 이상 간수를 뺀 곰소 천일염과 싱싱한 어패류로 만들어 쓴맛이 없고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곰소염전 근처 곰소항 주변에는 대규모 젓갈단지가 조성돼 있다. 창난젓, 명란젓, 황석어젓, 오징어젓, 낙지젓, 갈치속젓 등이 큼지막한 통에 담겨 고운 빛깔을 자랑한다. 곰소시장 앞 가게에 들러 서너 가지 젓갈을 맛보고는 갈치속젓과 낙지젓을 샀다. 다양한 곰소젓갈을 제대로 즐기려거든 젓갈 정식이 괜찮다. 곰소항 인근에는 각종 젓갈을 한상 차려내는 집이 꽤 여럿 있다. 하얀 쌀밥에 젓갈 한 점 얹어 먹으면 그야말로 밥도둑이 따로 없다. 점심으로 젓갈정식을 먹으려다 불현듯 게장정식이 떠올랐다. 부안 토박이인 지인의 강력한 추천 때문이었다. 그가 귀띔해준 집은 격포항 입구의 수풍꽃게장과 곰소항 부근의 칠산꽃게장이었다. 밀려드는 허기를 달랠 수 없어 가까운 칠산꽃게장으로 향했다. 칠산꽃게장의 간장게장은 짜거나 싱겁지 않고 간이 적당히 스며 있었다. 곰소 천일염 등 10가지 국산 재료를 넣고 정성스레 끓인 간장 덕분이라고 했다. 게딱지 깊숙한 곳에까지 붙어있는 알과 살을 밥에 비벼 먹다보니 밥 한 그릇은 그냥 뚝딱이다. 간장게장과 궁합 맞는 밑반찬도 젓가락을 멈출 수 없게 했다. 변산반도에 오면서 가장 기대했던 곳은 채석강이다. 하지만 하루 두 차례, 물이 빠졌을 때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시간에 잘 맞춰 도착해야 한다. 관광안내소에 전화를 걸어 물때를 확인했다. 오늘 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시간은 저녁 6시 40분경. 이를 기준으로 앞뒤 2시간씩 채석강 절벽 아랫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 시간에 여유가 있어 먼저 새만금방조제에 들르기로 했다. 길이 33.9km의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다. 전북 군산에서 시작해 부안 변산반도에서 끝난다. 방조제 위에는 왕복 4차선 도로가 건설됐다. 긴 방조제를 달리며 보는 풍경이 아름다워 드라이브 코스로도 꼽힌다. 그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 방조제 위에 올랐다. 바다 사이로 쭉 뻗은 한갓진 길이 엿가락보다 달콤했다. 길은 신시도에서 살짝 방향을 틀어 비응항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행여나 물때를 놓칠까 싶어 신시도에서 차를 돌렸다. 대신 새만금방조제의 전경을 한눈에 담기 위해 새만금홍보관으로 향했다. 지상 3층 규모의 홍보관을 효율적으로 둘러보려면 3층에서 관람을 시작해 1층으로 내려오는 편이 좋다. 전망대는 3층에 자리했다. 시원하게 뻗은 방조제가 유리창 너머로 펼쳐져 있었다. 새만금방조제를 뒤로하고 해안도로를 따라 나섰다. 뭍에서부터 서서히 물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갯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변산해수욕장을 지나 고사포해수욕장 쪽으로 방향을 틀어 변산해변도로에 진입했다. 굽이굽이 이어진 도로에서 만나는 서해가 사뭇 새로웠다. 바다를 구경하며 10분 정도 달려 적벽강에 도착했다. 알려진 대로 적벽강은 강(江)이 아니다. 붉은색을 띤 층암절벽과 바다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중국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즐겨 찾던 적벽강의 경치와 닮아 이 같은 이름을 얻었다. 이름만큼이나 붉은 기운을 품은 바위 절벽이 웅장하게 펼쳐져 있었다. 바닷가로 내려가자 이번엔 검은 바탕에 노란 암석 조각이 박힌 지층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는 수분 함량이 높은 퇴적층을 뜨거운 마그마가 뚫고 올라오면서 뒤섞여 만들어진 화산지형이다. 한쪽에는 주상절리와 해식동굴이 신비로운 경관을 뽐내고 있었다. 적벽강 꼭대기에는 수성당이 자리를 잡았다. 수성당은 서해의 수호신 개양할머니를 모신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개양할머니는 딸을 여덟 명 낳아 각 도에 하나씩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이곳에 살았다. 지금도 이곳 마을 주민들은 풍랑을 피하고 고기를 많이 잡게 해달라며 음력 정월 초에 제사를 지낸다. 적벽강의 기묘함은 그대로 채석강으로 이어진다. 적벽강에서 격포해수욕장 방향으로 2km만 더 가면 채석강이다. 격포항과 그 오른쪽 닭이봉을 잇는 1.5km 구간에 가로 줄무늬 선명한 층암절벽이 펼쳐진다. 보는 이에 따라 겹겹이 쌓인 시루떡 같다 말하기도 하고, 수만 권의 책더미로 보기도 한다. 중국 당나라 때 이태백이 놀았던 채석강과 비슷해 이름 지어졌다. 적벽강의 기묘함은 그대로 채석강으로 이어진다. 적벽강에서 격포해수욕장 방향으로 2km만 더 가면 채석강이다. 격포항과 그 오른쪽 닭이봉을 잇는 1.5km 구간에 가로 줄무늬 선명한 층암절벽이 펼쳐진다. 보는 이에 따라 겹겹이 쌓인 시루떡 같다 말하기도 하고, 수만 권의 책더미로 보기도 한다. 중국 당나라 때 이태백이 놀았던 채석강과 비슷해 이름 지어졌다. 거대한 절벽을 중심으로 채석강 산책에 나섰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바윗돌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바다 생물을 보고 또 보느라 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반대로 절벽 아래를 지날 땐 셔터 누르는 속도조차 조급해졌다. 그렇게 채석강을 한 바퀴 휘둘러보고는 평평한 돌 위에 앉아 한참 동안 시간을 보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일상의 스트레스를 잊게 했다. 변산반도에 오면 꼭 먹고 싶은 음식이 있었다. 다름 아닌 백합탕이다. 별 양념 없이 무, 대파, 고추만 넣고 끓여도 시원하다는 그 국물 맛을 보러 군산식당으로 향했다. 채석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군산식당은 변산반도에서 손꼽히는 맛집이다. 백합탕을 시작으로 백합찜, 백합죽, 갑오징어무침까지 줄줄이 나오는 백합세트 한상이면 부러울 게 없다. 맑은 백합탕 한 숟가락에 변산의 바다가 입안 가득 퍼진다. 쫄깃쫄깃 새콤달콤한 갑오징어무침은 여름철 입맛을 돋우기에 그만이다. 속을 든든히 채우고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솔섬이다. 해 지는 변산반도의 바다는 어디서 봐도 아름답지만, 그중에서 솔섬을 으뜸으로 친다. 솔섬은 전북학생해양수련원 앞바다에 있는 자그마한 무인도다. 썰물 때는 바닷길이 열려 70m 정도만 걸으면 섬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섬 위에는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 몇 그루가 옹기종기 뿌리를 내렸다. 서해가 붉은 물결로 춤추는 시간, 태양은 소나무 틈에 잠시 머물렀다가 바다로 흩어졌다. 발갛게 달아오른 해가 나뭇가지에 닿으며 만들어내는 풍경이 제법 강렬하다. 서서히 기우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짧은 일정이 더욱 아쉽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언제일지 모를 변산반도와의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출처 : 청사초롱 글, 사진 : 청사초롱 박은경 기자 ※ 위 정보는 2018년 12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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