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p 사회교과서 5학년 2학기 3단원 '유교 문화가 발전한 조선' 단원에서 조선의 건국에서부터 수 많은 왜적으로부터 조선을 지킬 수 있었던 과정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농민의 생활 안정과 나라의 발전을 위한 어떤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 공부해 보자. 얇은 주머니 사정 탓에 여행을 미루고 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는 서울여행. 조선왕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근대문화의 중심 덕수궁과 정동길, 그리고 전통문화의 보고 인사동과 경복궁을 간직한500년 고도(古都) 서울. 서울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그 사이사이에 보석같이 박혀 있는 문화유적이 어우러져 휴식공간과 볼거리를 함께 제공하고 있다. 출입문을 통과하는 순간 입조차 얼게 하는 한겨울 날씨처럼 아주 매서운 세월을 보냈던 대한제국의 흥망성쇠가 그대로 눈에 서리처럼 앉는다. 덕수궁(경운궁)은 구한말 고종과 순종이 살았던 정궁이었으면서도 일제에 유린당하며 놀이공원으로 퇴락해버린 비운의 궁궐이다. 원래 조선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으로 고종 전까지 소규모 궁궐이었던 덕수궁은 1897년 일제를 피해 러시아공사관에 1년 동안 피신했던 고종이 환궁하면서 외국 공사관과 가깝다는 이유로 정궁이 됐다. 경술국치 이후 덕수궁은 한때 폐궁으로 방치되었으나 현재는 일반인에게 완전히 개방되어 도심 속 문화재와 어우러진 휴식공간으로 각광 받고 있다.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은 갖가지 무늬와 색으로 단청하였고 창과 문짝은 꽃살문으로 장식해 전통미를 한껏 살려 놓았다. 그리고 민가 건물의 정감이 느껴지는 석어당, 고종황제의 침전 건물이자 승하하신 곳이기도 한 함녕전. 고종황제의 죽음이 3·1운동의 촉발제가 되었다는 안내자의 말을 듣고 기자는 문득 대한제국의 몰락과 식민지의 한을 품은 당시 백성들의 감정이 전이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밖에 뒤뜰 동산 쪽에 외교관 연회처로 사용된 정관헌은 서양식 건물로 대한제국 때에 서양문화를 우리식에 맞게 조화롭게 잘 받아들인 것임을 엿볼 수 있다. 일제는 고종의 승하 후 '국권'의 상징인 덕수궁을 철저히 파괴했다. 민족의 오랜 염원이었던 8·15광복과 함께 덕수궁은 복원되었지만, 그때의 아픈 역사는 '살아있는 교훈'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 한 대중가수의 노래가 또 다른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되어 다시 불리는 것처럼 정동길 즉, 덕수궁 돌담길은 나이 든 세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추억의 공간으로서 존재하기도 하고 오늘날 젊은 세대에겐 걷기 좋은 길의 데이트 명소이기도 하다. 정동길은 덕수궁 옆으로 들어가는 좁고 구불거리는 돌담길에서 경향신문사까지 이어지는 약 900m의 길이다. 유명한 경주 포석정 물길처럼 만든 길 때문에 차량 통행도 많이 줄어들었고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공간도 넓어져 제법 산책을 즐길 만하다. 특히나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건물들을 꽤 많이 볼 수 있는 이 길은 정동제일교회, 신아 기념관, 이화여고 심슨 기념관 등 근대 건축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현대에 지어진 빌딩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건물들은 정동을 '정동답게' 만들어주는 주역이기도 하다. 정동길 거의 막바지에 오르다 보면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한 '아관파천'의 흔적인 구 러시아 공사관을 볼 수 있다. 또한, 치욕의 을사조약을 체결했던 장소인 중명전(현 정동극장 주차장)의 자리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낭만과 문화의 거리 정동길은 이렇게 근대사의 비극을 담은 역사의 거리이기도 하다. 멀게는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가깝게는 미 대사관저가 자리해 마음껏 드나들 수 없었던 빼앗긴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추억의 낭만과 치욕스러운 역사를 한 몸에 지닌 정동길은 그렇게 우리에게 양면의 얼굴로 서 있다. 인사동 거리는 안국동에서 종로에 이르는 남북으로 시원하게 뻗은 한길에 좌우로 좁은 골목길들로 연결되어 있다. 인사동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우리 전통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골동품과 전시회를 볼 수 있는 화랑 등 문화공간이다. 게다가 좁은 골목 안쪽으로는 한국 전통의 맛을 전하는 찻집과 음식점이 속속 들어서 있어 다양한 문화공간으로서 '오지랖'을 넓혀가고 있다. 이곳에 골동품 상가가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으며,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성시를 이루었다. 이후 1980년대부터 화랑들이 속속 들어섰고 1988년에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어 1997년부터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되어 일요일마다 거리 축제가 열리고 있다. 신명나게 들리는 짤랑짤랑 가위 소리, 이마에 세월의 흔적 가득한 얼굴로 사주와 운세보는 할아버지, 토산품을 신기한 눈빛으로 열심히 들여다보는 이름 모를 외국인, 옛날식 호떡을 파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인사동의 '묘미(妙味)'를 느낄 수 있다. 인공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형성된 독특한 복합 문화 공간으로써의 인사동은 지나간 시간의 흔적과 옛사람들의 삶의 자취를 여실히 보여 주는 곳이다. 궁궐을 보면 조선왕조를 알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궁궐이 바로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이 자리 잡힌 경복궁이다. 사극 드라마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경복궁은 태조 4년에 창건된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이다. 6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경복궁 내의 건물들은 임진왜란과 일제 식민지하에서 상당 부분 불타고 훼손되었으나 그 이후 많은 노력으로 복구되어 서울을 찾는 외국인과 시민들이 도심의 '빌딩의 숲' 을 벗어나 한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경복궁에서 빼놓지 않고 봐야 할 곳은 조선 시대 최고의 궁궐전각으로 경복궁 중심 건물인 근정전과 나랏일을 보시던 사정전, 임금이 거처하는 내전 중심 건물의 강녕전, 그리고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과 그 후원의 아미산굴뚝이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경회루는 700년 영욕이 서린 곳.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서글픔이 진하게 배어 있지만 빼어난 조경미는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다. 이 외에도 향원정과 보물로 지정된 자경전 십장생무늬 굴뚝은 꼭 둘러보길! 최근 명성황후 시해 장소가 경복궁 건청궁 침실이었다는 사실을 뒤집고 그 장소가 침실이 아닌 마당이었던 것이 일제 기밀문서를 통해 알려졌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참혹하고 굴욕적이었던 것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차가운 흙바닥이 당시 명성황후가 무참히 시해된 곳이라니... 국모를 일본의 무자비한 만행 앞에서 보내야했던 힘없는 조선 아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참으로 가슴이 메어져 온다. ※ 위 정보는 2016년 9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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