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살아보기 여행’은 <대한민국구석구석×스테이폴리오> 이벤트를 통해 특별한 휴가를 선물 받은 여행자 6팀의 이야기입니다. 아빠와 아들의 투박한 여행기부터 깨 볶는 신혼부부의 감성여행기까지, 매주 소소하지만 특별한 여행기가 당신을 찾아갑니다. 일주일동안 내가 만난 풍경들 바로가기>>> “예전엔 저 다리만 건너면 가슴이 설레곤 했지.” 엄마의 고향은 거제도다. 1982년 결혼해 대구로 터전을 옮긴 후 6년이 지나도록 친정에 가지 못했다.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면서 집안일과 두 아이 육아를 도맡아 매일 바쁜 하루를 보냈다. 결혼한 여자를 남의 식구라 하여 남편 식구에 정을 붙이고 살라고 강요하던 시대였고, 자가용도 흔치 않던 시절이라 더 그랬다. 고달픈 이야기는 “그땐 다 그러고 살았지”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동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마음 한구석에 켜켜이 쌓여갔다. 먹을 것이 지천이었던 조용한 바닷가, 맑은 물이 흐르던 하천, 어린 시절 꿈이 자라던 초등학교까지. 추억 속 고향 풍경은 아직도 선명하기만 했다. 엄마의 그 시절 이야기를 찾아 거제 구석구석을 누비고 싶었다. 그리고 당신의 기억 속에만 머물던 추억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말하는 ‘저 다리’는 구거제대교다. 1999년 신거제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거제와 육지를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였다. 신거제대교를 지나는 동안 바닷바람이 좌우 창문을 시원하게 내리쳤다. 탁 트인 바다 위로 크고 작은 섬들이 보였다. 작은 어선들은 물길을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특별할 것 없는 창밖 풍경을 엄마는 설레는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구야! 내 알겠나? 필순이 누나다.” 대도낚시집 앞에서 엄마가 창문을 황급히 내리며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물어보니 고향 친구란다. ‘구야’라는 애칭으로 두 사람의 막역한 어린 시절을 가늠해 보았다. 아직도 엄마 이마엔 어린시절 ‘구야’ 아재 삼형제와 놀다 생긴 상처가 있다. 친구 앞에서 엄마의 대명사도 바뀌었다. 평생 ‘현정이 엄마’, ‘원 집사’, ‘원 선생’으로 불리던 엄마는 이 순간 ‘필순이 누나’였다. 그 낯선 호칭이 앳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원필순 씨는 거제시 남부면 다대마을의 점방집 넷째 딸로 태어났다. 당시 마을에서 유일한 점방이었던 친정집은 형편이 꽤 넉넉했다. 세월이 흘러 허름한 동네 구멍가게가 되었지만, 내 추억에는 과자를 돈 안 주고도 먹을 수 있는, 이 세상 가장 신나는 곳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다대마을에서 자식을 낳고 기르던 1세대다. 모로 봐도 논밭과 망망한 바다뿐이던 이곳에서 고기 잡고 농사지으며 주렁주렁 자식을 낳고 삶을 일구셨다. 그 힘으로 3세대인 우리들이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 “아이구, 숙모 보니까 우리 엄마 생각난데이!” 고향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친정집이 아닌 엄마의 숙모 집이었다. 허리가 굽은 그 분은 다대마을에 남은 마지막 1세대다. 거뭇하게 탄 얼굴에 깊이 박힌 주름이 보였다. 엄마는 숙모의 얼굴을 어루만지다 눈물을 흘리셨다. 그 모습에서 외할머니 얼굴을 떠올린 것 같다. 나는 외할머니를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엄마 말로는 인기가 많아 마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했다고 한다. 평소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지 않는 엄마였지만 애틋한 마음이 크다는 것은 잘 안다. 엄마는 평생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내가 아들을 낳았을 때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보여주신 정성을 잊을 수 없다. 병원에 찾아와 갓 태어난 손자 보기는 둘째로 하고 내 손을 꼭 잡은 채 “수고 많았다”며 울먹이셨다. 손자를 돌보며 내 몸조리를 해주시면서도 “됐다 마. 친정 엄마는 고마 그런 기다” 하셨다. 정작 엄마에겐 우리를 키우던 시절 친정엄마가 없었기에 많이 서러우셨을 것 같다. 아이를 낳고 보니 세상에 엄마만큼 좋은 이름이 없다. 틈 날 때마다 “엄마~엄마” 하며 자꾸 찾는다. 엄마는 가끔 귀찮다며 그만 부르라고 한다. 나는 그런 반응이 재미있어 더 한다. “부끄럼이 많아가 옷고름을 배배 꼬고 다녔지.” 엄마의 추억이 가장 많이 남은 곳은 학교다. 지금은 모교인 다대국민학교와 명사중학교 두 곳 모두 폐교되었다. 다대국민학교에 가까워지자 엄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한 학년에 한 반뿐이지만 학생수가 60~70명이나 되던 때였다. 엄마는 부끄럼이 많아 저고리 옷고름을 항상 배배 꼬아 물어뜯곤 했단다. 상상해보면 귀여운 모습이다. 6학년 때는 부반장도 맡았었다니 마냥 어리숙한 학생은 아니었나보다. 하천을 기준으로 윗마을은 다대, 아랫마을은 다포라고 불렀다. 두 마을 사이에는 물대기 문제로 늘 긴장감이 있었다. 다포는 세대 수가 적어 의견 조율에서 늘 밀렸다. 그래서 마을 대항 체육대회를 하면 지금의 연고전 뺨치는 긴장감이 흘렀다. 마을 사정에 훤한 아이들도 다대와 다포로 팀을 나누어 기 싸움을 벌이곤 했다. 그런데 다포에 예쁜 여학생이 많았다. 몇몇 남자 아이들은 속사정도 모르고 다포 가시나들을 만났다는 등 자랑을 해서 다대 여학생들이 단체로 패싸움을 벌이러 간 적도 있었다고.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학교 곳곳을 살폈다. 천연 잔디가 깔렸던 운동장은 자갈이 가득했다. 뒤뜰에 있던 우물도 터만 남았다. 엄마가 갑자기 ‘노자산~’으로 시작하는 교가를 불렀다. 질세라 ‘용지봉~’으로 시작하는 내 모교의 교가도 불렀다. 우리는 조기교육이 무섭다며 시원하게 웃었다. 명사중학교에 가려면 다대마을에서 산길로 약 40분 걸어야 한다. 학교는 북캠프지오라는 리조트형 글램핑장으로 변했다. 외지인에게 점령당했지만 건물 뼈대와 복도는 옛 모습 그대로다. 마침 김형욱, 김물길 사진작가의 전시회가 열려 잠시 구경했다. 학교 앞 명사 해변으로 나오니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다. 찰랑이는 바다와 고운 모래사장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이 풍경을 매일 만끽했을 엄마의 학창시절이 부러워졌다.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봤다. 노을을 머금은 황금빛 하늘은 금방 사라졌다. 아쉬운 마음에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렀다. 기록이 기억만큼 아름다울지는 의문이다. 명사 해변에서 만난 하늘빛처럼 인생에서 붙잡아두고 싶은 행복한 순간은 늘 순식간에 사라진다. 엄마의 매몰된 기억들을 꺼내 기록하고자 했던 모녀 여행은 당신의 기억만큼이나 생생하진 못하다. 언젠가 우리의 기억이 아주 희미해질 때에는 이 작은 흔적이 빛바랜 기억의 불씨를 살려줄 것이라 믿는다. 후기제공 : <대한민국구석구석×스테이폴리오> ‘일주일 살아보기 여행’ 이벤트 체험 선정자 배현명 님의 경상남도 거제, 옛마실펜션에서 2018.08.13 ~ 2018.08.19 일주일 간 머무르며 여행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 위 정보는 2019년 9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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