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첫 번째 도읍인 한성을 고구려에 빼앗기고 두 번째 도읍으로 선택한 곳, 공주. 험준한 산지로 둘러싸여 육로로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고, 금강의 진입로 폭이 좁아서 많은 병력이 진입하기 어려운 천연의 요새와 같았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는 공주에서 새 궁궐을 세우고, 산성을 쌓고 국력을 회복했다. 그 결과 다시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중흥기를 맞이하였다. 475년, 백제는 고구려 대군의 침공으로 남한산성 아래에 있던 왕도 한성을 함락당하고 개로왕이 죽음을 당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그리하여 왕도로서의 수명을 다한 한성을 포기하고 공주를 제2의 왕도로 결정하였다. 당시 공주로 가는 길은 복잡했을 뿐만 아니라 깊은 산골길을 지나야 했기 때문에 천연의 요새로 안성맞춤이었다. 논산천안고속도로 공주IC를 나와 금강교를 건너기 전, 유유히 흐르는 금강 위에 솟은 기암절벽과 이를 둘러싼 산성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부터 성왕이 부여로 천도한 538년까지 백제의 도성이었던 공산성이다. 강과 산을 효율적으로 이용해 산성을 쌓은 예는 많다. 도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역사학자 최영희 교수는 “고구려의 평양 대동강의 청류벽, 백제의 공주 금강의 공산성과 부여 백마강의 사비성은 규모의 크고 작음이 다를 뿐 똑같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공산성은 웅장하지는 않으나 백제의 전통을 이은 역사의 내음이 풍기는 산성이라고 평하였다. 공산성의 입구는 금서루다. 성의 4개 성문 중 서쪽 문루다.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 있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은 것을 1993년 동문터에 영동루, 서문터에 금서루를 복원하였다. 성 안에는 임류각지, 영은사, 쌍수정, 연지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금서루 입구에는 관찰사, 목사 등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린 공적비가 늘어서 있다. 공적비군을 지나 금서루에 오르면 양쪽으로 성벽이 길게 뻗어 있다. 동서 길이 약 800m, 남북 길이 약 400m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는데, 성곽의 총 둘레는 약 2660m다.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굴곡형이며,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 대부분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이름도 백제시대에는 ‘웅진성’, 고려시대 이후에는 ‘공산성’, 조선시대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공산성의 매력은 성벽을 따라 성을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다는 점과 성벽을 걸으면서 공주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다는 점이다. 금서루에서 진남루 방향으로 왼쪽 성벽을 따라 걸으면 공주 시가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공북루가 있는 오른쪽 성벽을 따라 걸으면 금강의 물길과 강 너머 시내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성벽을 걸으면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을 볼 수 있다. 무심코 지나가면 다 같은 깃발처럼 보이지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깃발의 색이 다름을 발견할 수 있다. 공산성의 깃발은 송산리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것이다. 사신도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각 방위를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이 외부의 사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도 담고 있다. 깃발 테두리에는 사신도의 동물이 상징하는 색이 반영되어 있다. 동쪽의 용은 파란색, 서쪽의 호랑이는 흰색, 남쪽의 주작은 붉은색, 북쪽의 거북은 검은색을 상징한다. 공산성에는 원래 자리에 있지 못하고, 이름도 여러 번 바뀐 건물이 있다. 동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2층 누각 광복루다. 공산성에는 충청감영에 소속된 군사가 주둔하던 중군영이 있었는데, 광복루는 중군영의 출입문이자 외부를 감시하던 대문의 누각이었다. 원래 있던 자리는 북문인 공북루 옆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현 위치로 옮기며 본래 이름인 ‘해상루’를 ‘웅심각’으로 바꿨다. 광복 직후인 1946년 공산성을 방문한 김구 선생과 이시영 선생이 이 누각을 보고 나라를 되찾은 것을 기리며 ‘광복루’라 고쳐 불렀다. 공산성은 우리 역사의 영광과 비애의 현장이기도 하다.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가 부흥하는 터전이면서 백제 멸망의 슬픈 현장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사비성(부여)이 함락되자 공산성으로 몸을 피해 저항했다. 성을 지키고 있던 웅진방령군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5일 만에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고 당나라로 끌려갔다. 이 외에 통일신라시대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고 고려 현종과 조선 인조가 파천한 곳이기도 하다. 고려 명종 때 귀족의 횡포와 차별에 맞서 민란을 일으킨 망이 망소이 형제는 공산성을 점령하고 반란의 본부로 삼았다. 공산성에서 서해 방면으로 금강을 크게 휘돌아 내려가면 고마나루가 있다. 지금이야 과거의 나루터 흔적은 없고 잡목이 우거진 평범한 강변에 불과하지만 웅진 백제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장소다. 공주는 금강 물길의 요충지였고, 고마나루는 근방의 최대 나루터였다. 국내적으로는 군산에서 서해의 해산물을 실은 배가 금강을 거슬러 강경을 거쳐 공주에 머물렀다. 그리고 다시 금강을 올라가 부강에서 충북, 강원도와 교역을 했다. 백제는 금강을 통한 해상무역으로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해외 교역도 활발했다. 금강을 따라 내려가면 서해에 이르고 중국, 일본과 해로로 연결된다.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전한 538년(성왕 16)은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한 해다.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백제와 일본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마나루에서 가장 먼저 발걸음이 닿는 곳은 곰사당이다. 운치 있는 소나무 숲을 지나 만나는 곰사당은 고마나루 전설에 등장하는 암곰과 새끼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앞마당에 있는 웅신단비에 전설이 적혀 있다. “옛날 강 건너 연미산에 살고 있던 암곰 한 마리가 금강에서 고기잡이하는 어부를 끌고 가 동굴 속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세월이 흘러 곰은 두 명의 자식을 낳았다. 어부는 강 건너 인간세상을 그리워하면서 지내던 중 암곰이 동굴의 문을 닫지 않고 사냥 간 틈을 타 나룻배를 타고 도망쳤다. 뒤늦게 사실을 안 암곰은 새끼 두 마리를 품에 안고 남편에게 돌아와달라고 애원하였다.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고 암곰은 새끼를 안은 채 강물에 몸을 던졌다. 고마나루는 곰의 애절한 사연이 얽혀 이름 붙인 곳이라 전해진다.” 사당 안에 돌 곰상이 모셔져 있다. 이 돌 곰상은 1972년 무령왕릉과 왕릉원 주변 밭에서 발견된 돌 곰상의 모형이다. 진품은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돌 곰상이 제작된 시기는 백제시대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신앙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기도 하고 무덤에 넣기 위해 만들어진 껴묻거리라는 의견도 있다. 껴묻거리라 보는 이유는 부여 구아리 건물터에서 흙으로 만든 곰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돌 곰상과는 재료와 크기가 다르지만 기본적인 모양이 비슷해서 진묘수(무덤을 지키기 위해 놓는 돌로 만든 동물)로 본다. 곰사당에서 고마나루로 가는 길은 소나무 숲길이다. 바람결에 묻어난 솔잎의 향기로 걷는 즐거움이 있다. 길 중간중간에는 곰 조형물이 놓여 있다. 새끼를 품은 엄마 곰을 보노라면 고마나루의 전설이 더욱 애잔하게 다가온다. 소나무 숲길이 끝나는 곳에 고마나루가 있다. 나루터의 흔적은 없다. 여느 강변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눈에 띄는 게 있다면 강으로 내려가는 곳에 ‘웅진수신지단(熊津水神之壇)’이라는 비석이 세워진 웅진단이 있다는 것뿐. 웅진단은 곰에 대한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는데 점차 수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는 일 년에 두 번 산천제와 함께 웅진단 제사가 치러졌다고 한다. 1971년 봄, 공주발 뉴스 하나가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무령왕릉의 발굴 소식이다. 송산리고분군 중 5호 돌방무덤과 6호 벽돌무덤에 물이 스며드는 걸 막기 위한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백제 무령왕릉이 발견된 것이다. 송산리 고분들은 백제 왕족의 무덤으로 알려지면서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도굴을 당했다. 그런데 천년도 훨씬 전의 신비한 모습을 간직한 ‘처녀분’의 모습으로 무령왕릉이 발견됐으니 세상이 떠들썩할 만하다. 고분의 주인이 무령왕이라는 것은 왕과 왕비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글이 새겨진 지석 2장을 통해서다. 왕의 지석 앞면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인 계묘년(523) 5월 7일 돌아가셔서 을사년(525) 8월 12일에 이르러 태묘에 모셨다(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 丙戌朔 七日壬辰崩 到乙巳年八月 癸酉朔 十二日甲申 安登冠大墓 立志如左)”고 적혀 있다. 사마왕은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이다. 40세에 왕위에 올라 62세에 죽기까지 23년간 백제를 다스렸다. 왕비의 지석 앞면에는 왕비의 사망 연월일과 개장일이 적혀 있다. 뒷면에는 “돈 1만 문을 가지고 을사년(525) 8월 12일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토왕, 토백, 토부모(토지신), 지하의 여러 관리 및 지방장관에게 땅을 사서 무덤을 쓴다. 이를 위하여 문서를 만들어 명시하니 어떤 법령도 이 영역에 미치지 아니한다(錢一万文右一件 乙巳年八月十二日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以前件錢 詢土王 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 故立券爲明 不從律令)”라는 내용이 명기되어 있다. 지석을 통해 무령왕은 죽은 후 2년 3개월 동안 가매장했다가 왕릉에 모셨고, 왕비도 2년 3개월 동안 가매장했다가 무령왕릉에 함께 모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백제 왕족의 장례 문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사실이다. 이 외에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왕과 왕비의 왕관, 몸장식 등을 비롯해 수천 점에 달한다. 화려하고 세련된 장식들은 백제의 문화가 얼마나 세련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에는 무령왕릉 외에도 송산리 1~6호분까지 7기가 복원되어 있다. 송산리 1~5호분은 백제의 전통적 묘제인 굴식돌방무덤이며,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이다. 무덤의 내부 구조와 출토된 유물에 대한 궁금증은 고분군 모형 전시관에서 해결할 수 있다. 송산리 5호분, 송산리 6호분, 무령왕릉의 모형이 상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송산리 5호분 내부에서는 굴식돌방무덤의 형태를, 송산리 6호분에서는 동·서·남·북 사방에서 무덤의 주인을 지키는 동물을 그린 사신도를 관찰할 수 있다. 무령왕릉관에 들어서면 벽돌식 무덤과 화려한 금관과 금제 귀걸이 등 출토 유물, 무덤의 구조를 볼 수 있다. 실제 출토된 유물은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고분군 모형 전시관에는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무령왕릉은 연꽃을 비롯한 28가지의 벽돌을 터널 형태로 쌓아올려 방처럼 조성했다. 이러한 구조는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형식이다. 무덤 입구에 석수 한 마리가 놓여 있고 그 앞에 왕과 왕비의 지석이 나란히 놓여 있다. 벽돌방 안에는 왕이 동쪽, 왕비가 서쪽에 놓였다. 머리는 입구 쪽인 남쪽을 향하였다. 설명자료에 의하면 무령왕릉 목관에 일본산 금송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역시 백제가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음을 알려주는 증거다. 전시관을 나와 왼쪽 계단을 올라가면 고분군이 펼쳐진다. 제일 먼저 모습을 보이는 건 송산리 6호분이고 그 옆으로 송산리 5호분, 무령왕릉 순서로 나란히 놓여 있다. 초록으로 가득한 고분군 가장자리에 난 길을 따라 걸으면 송산리 1~4호분, 송산리 방단계단형 적석유구 등이 있다. 중동성당 영화, TV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촬영지다. 1898년 공주에 처음 천주교가 전해지고, 1936년에 중동성당이 완공됐다. 1921년 부임한 최종철 마르코 신부가 서울의 약현성당을 모델로 설계했다. 본당은 고딕 양식으로 붉은 벽돌을 쌓아올렸다. 실내에는 팔각으로 조각된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유리화(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환한 빛이 들어오는데 그 분위기가 매우 성스럽다. 완공 당시에는 성당과 사제관, 수녀원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본당과 구 사제관만 남아 있다. -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성당길 6 - 전화 : 041-856-1033 금강철교 금강철교는 충남도청과 맞바꾼 다리라고 할 수 있다. 본래 공주에는 금강을 연결하는 ‘동구춘폐’라는 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는 겨울에만 설치하는 배다리였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식민정책의 편의를 위해 1932년 대전으로 충남도청을 옮겼다. 이에 공주 시민의 반대가 심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공주~대전 간 신작로를 개설하면서 금강철교를 놓았다. 당시에는 ‘한강 이남의 가장 긴다리’로 불렸다. -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신관동 공주한옥마을 공주에서 백제를 주제로 여행할 때 가장 안성맞춤인 숙박시설이다. 공산성, 고마나루, 무령왕릉과 왕릉원 등 백제 유적지가 가깝다. 특히 걷기 여행을 즐겨한다면 한옥마을 둘레길을 이용해 다양한 여행 코스를 구성할 수도 있다. 공주한옥마을은 개별 숙박동 16동, 단체 숙박동 6동을 지어 2010년 문을 열었다. 한옥은 소나무와 삼나무 집성재를 사용해 전통미를 한껏 살렸고, 실내에는 이용의 편리함을 위해 에어컨, 냉장고, 헤어드라이어 등 현대적 시설을 갖췄다. 특히 겨울에는 구들장 체험이 가능하도록 전통 구들장을 놓았다.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풍경은 시골 마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공주한옥마을의 또 다른 매력은 규모가 커서 한옥과 한옥 사이의 돌담 골목을 산책하다 보면 마치 민속마을을 방문한 기분이 든다는 점이다. 오가는 길에 만나는 능수버들과 들꽃, 앙증맞은 소품들이 정겹다. 체험시설동이 있어 전통 체험도 가능하다. 전통문화체험관에서는 삼색 인절미 만들기, 백제 차 이야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공예공방촌에서는 한지, 도자기, 매듭 등을 가르쳐준다. -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관광단지길 12 - 전화 : 041-840-8900 - 홈페이지 : www.gongju.go.kr/hanok.do - 가격대 : 일반형 10만 원(주중), 12만 원(주말) / 초가형 13만 원(주중), 15만 원(주말) / 전통형·고급형 15만 원(주중), 20만 원(주말) / 우성관·양반형 20만 원(주중), 25만 원(주말) / 단체숙박동 10만 원(주중), 12만 원(주말) 아느칸 모텔 5층 건물에 35개 객실이 있다. 객실은 스탠더드 일반실, 특실, 준특실, 가족실 4가지 종류가 있다. 가족실은 온돌룸으로 아이를 동반한 가족 숙박객이 이용하기 편리하다. 특실에는 월풀 욕조가 있다. 장애인을 위한 목욕의자와 청각장애인을 위한 시각경보기도 마련되어 있다. 공용 주방에서는 간단한 취사도 가능하다. 2일 이상 숙박하면 무료 세탁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객실 인테리어는 화사한 편이다. 핑크, 그린, 블루 등 밝은색 벽지를 사용했고, 객실마다 대형 풍경 사진을 걸었다. 침구류가 깔끔하고, 욕실이 청결하다. 온양온천, 지중해마을, 외암민속마을, 곡교천 은행나무길 등 주변 관광지까지 자동차로 10분이면 닿는다. - 주소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모산로 142 - 전화 : 041-548-5958 - 홈페이지 : 없음 - 가격대 : 4만5000원~ <1박 2일 여행 코스> 첫째 날 / 공산성 → 고마나루 → 무령왕릉과 왕릉원 → 국립공주박물관 → 공주한옥마을 둘째 날 / 메타세쿼이아길 → 제민천과 원도심 → 금학생태공원 ○ 대중교통 정보 [버스] 서울-공주 :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1일 5회(07:10, 08:50, 12:10, 14:20, 17:30) 운행, 약 2시간 10분 소요 서울남부터미널에서 1일 3회(09:00, 15:10, 20:30) 운행, 약 1시간 30분 소요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1일 16회(06:45~23:05) 운행, 약 1시간 30분 소요 ○ 자가운전 정보 천안논산고속도로 남공주IC → 40번 국도(무령왕릉 방면 좌회전) → 무령왕릉과 왕릉원 앞 좌회전 → 공주한옥마을 글/사진 : 오주환(여행작가) ※위 정보는 2021년 10월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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