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500번째 《청사초롱》이 나오기까지 서른두 번의 봄이 다녀갔다. 언제나 봄은 기다리는 순간에 이미 멀리서부터 오고 있었다. 서른두 번의 기다림과 서른두 해의 봄. 그 찬란한 시간을 거슬러 올랐다. 봄이 언제쯤 올까 초조하기도 하고 싱숭생숭하기도 하던 찰나, 겨울 동안 세상을 만날 준비를 마친 식물들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다. 그토록 기다렸던 사소한 봄. 그리고 매년 같은 자리에서 고개를 내미는 꽃들. 이 봄, 우리는 얼마나 많은 꽃을 보게 될까. 차창 바깥에서 들어오는 햇볕이 따뜻해 깜빡 조는 날이 많아지고, 길을 걷다가도 자주 코를 벌름거리고 기지개를 켠다. 환한 꽃그늘 아래서 잠시 눈 감는 사이, 봄은 또 얼마나 쉬이 가버릴까. 꽃 같은 시절이 또 한 번 간다. 봄은 꽃이다. 뺨에 와 닿는 바람이 아무리 따스해도, 매화 몇 송이가 꽃망울을 터트려야 비로소 깨닫는다. ‘아, 봄이구나.’ 그래서 늘 3월이면 꽃, 아니 봄을 찾아 떠났다. 때로는 식물원이나 꽃시장에 그쳤지만, 대개는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달렸다. 그렇게 며칠을 머물며 걸었고, 발품에 보상이라도 하듯 길마다 꽃 잔치가 열렸다. 서른두 해를 지나면서 가장 많은 봄소식을 전한 곳은 제주였다. 제주는 언제나 한 발 먼저 봄이 만개했다. 3월만 되면 아릿한 유채꽃 향기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산방산과 광치기해변, 가시리 마을 일대를 돌아다니며 봄을 수집했다. 유채꽃과 바다를 사진에 담기 위해 볕 좋은 날을 고르고, 마음에 드는 풍경을 찾으면 서슴없이 차를 세웠다. 유채가 한바탕 노란색을 쏟아놓고 나면 곧이어 벚꽃이 흐드러졌다. 봄 안에서 이어지는 꽃들의 릴레이였다. 벚꽃 명소로 소문난 전농로와 한라수목원, 삼성혈의 꽃길을 걸었다. 규모는 전농로 일대가 으뜸이었지만 호젓하기로는 한라수목원이나 삼성혈이 한결 나았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내려가는 섬진강도 3월이면 어김없이 꽃소식을 보냈다. 광양 다압리 일대에 매화가 눈처럼 쌓이면, 구례 산동마을에는 알큰한 산수유가 터졌다. 산수유 노란 물이 옅어질 즘, 섬진강은 다시 벚꽃으로 뒤덮였다. 하동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십리벚꽃길은 4월에 접어들면서 바람과 함께 꽃비로 내려앉았다. 거제의 봄도 제주나 섬진강만큼 성급하게 꽃잎을 열었다. 3월이 막 지나 다녀온 공곶이는 이미 수선화로 뒤덮여 있었다. 푸른 이파리 가득 내려앉은 별무리의 향기가 온몸을 감쌌다. 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이 어느덧 저만치 물러난 겨울의 뒷모습처럼 느껴졌다. 이듬해 찾은 청산도의 봄은 좀 달랐다. 뭍에서부터 부지런히 달려온 이방인에게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아무리 ‘슬로시티’라지만 게으름을 피우는 꽃망울이 야속했다. 샛노란 유채꽃이 수를 놓는다는 돌담길에서는 여전히 겨울 냄새가 났다. 결국엔 우연히 마주친 매화나무 한 그루에 만족하고 돌아서야 했다. 제천 청풍호반의 봄도 더디게 찾아왔다. 어디를 기웃거리다가 오는지 국내에서 벚꽃이 가장 늦게 피는 곳으로 알려졌다. 4월 중순경 달려간 청풍호는 꽃피고 녹음이 우거진 봄을 그림처럼 담아내고 있었다. 청풍문화재단지부터 청풍면 소재지까지, 10km 넘게 만개한 벚나무가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냥 돌아서기는 아쉬워 의림지에도 들렀다. 호반길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화사한 풍경이 펼쳐졌다. 벚나무가 드리워진 물 위에는 아이들 의 성화에 못 이겨 나온 오리배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입구에 있는 작은 놀이 공원에도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벚꽃이 지고 남녘에서는 철쭉꽃이 타들어갔다. 보성 일림산은 4월 끝자락에 피는 산철쭉으로 유명하다. 자그마치 100ha(약 30만평)에 이른다는 철쭉 군락지는 가히 장관이었다. 이곳 철쭉은 유독 키가 커서 꽃 터널을 걷는 기분이었다. 해풍을 맞고 자라서인지 꽃의 색이 유독 붉고 진하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면 온 산에 꽃불이 넘실거렸다. 연기도 냄새도 없이 타오르는 산야를 오롯이 헤아리기엔 봄이 너무 짧았다. 그리고 찾아온 서른세 번째 봄. 제주에 사는 친구가 꽃소식을 물어왔다. 이곳은 매화가 한창인데 그곳은 봄꽃이 피었는지 궁금해했다. 돌이켜보면 늘 남쪽에 도착한 봄을 마중 나가느라 달려오는 봄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3월이 시작되고, 섬진강 매화가 만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불현듯 부지런히 달려오고 있을 새봄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마침 화담숲 재개장이 코앞이었다. 며칠을 기다렸다 카메라를 챙겨 경기도 광주로 향했다. 화담숲은 발이봉 기슭에 자리한 생태수목원이다. 올해로 개장 6년을 맞았다. 곤지암리조트 옆에 자리해 있어 가끔 오해를 받지만, 리조트와는 무관하다. LG상록재단이 자연생태환경 복원과 보호를 위해 시작한 공익사업 가운데 하나다. 여느 수목원과 달리 겨울이 면 문을 닫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화담숲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5.2km탐방로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봄의 몸짓에 귀를 기울였다. 모노레일을 이용하면 한결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지만, 행여 봄을 놓칠까 싶어 초조한 마음에 그냥 걷기로 했다. 이끼원과 자작나무 숲을 지나고 전망대에 이를 때까지 이렇다 할 봄기운은 없었다. ‘생각보다 봄이 더 멀리 있나 보네’ 실망감이 솟으려는 찰나 어디선가 계절이 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겨우내 얼었던 세상이 녹아내리는 소리였다. 그리고는 이내 초록빛으로 우거진 소나무 정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아무리 사시사철 푸른 솔잎이라지만, 그마저도 왠지 달라 보였다. 새싹을 틔우기 전 물이 통통하게 오르듯, 몸통 가득 봄을 촉촉하게 머금은 모습이었다. 분재 온실에서 나와 물레방아를 등지고 내려가는데 샛노란 꽃이 눈에 박혔다. 개나리와 닮은 영춘화였다. 얼마나 반갑던지 보자마자 “와! 꽃이네!” 하고 소리쳐 버렸다. 영춘화에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는 복수초가 화사함을 뽐내고 있었다. 풍년화도 접힌 꽃잎을 사방으로 펼쳐들었다. 둘러보니 곧 있으면 개나리, 깽깽이풀, 수선화, 금낭화, 은방울꽃도 꽃망울을 터트릴 조짐이었다. 분명 먼 바다에서 시작된 봄은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봄, 다시 봄이었다. 출처 : 청사초롱 글, 사진 : 박은경(청사초롱 기자) ※ 위 정보는 2019년 11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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