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비 소식이 있어 걱정했는데, 고속도로를 벗어나면서 비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조금 서둘러 길을 나선 건, 청보리밭의 아침 풍경을 즐기고픈 마음 때문이다. 축제는 왁자지껄해야 제맛이지만, 그래도 여유롭게 청보리밭을 돌아보고 싶었다. 기회가 되면 보리밭을 뒤덮은 안개도, 그 안개를 비집고 솟는 태양도 보고 싶었다. 오전 7시, 여전히 두터운 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아무래도 안개와 일출을 보기는 틀린 모양이다. 그래도 코끝으로 전해오는 진한 풀 냄새에 마음이 들뜬다. 비 온 뒤 한층 짙어진 봄의 향기를 좇아 청보리밭으로 간다. 보리는 어느새 어른 무릎까지 자랐다.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 이삭도 제법 모양을 갖췄다. 겨우내 싹을 틔우고 매서운 추위를 버텨낸 보리는 그렇게 사춘기를 지나 늠름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세상 두려울 것 없는, 혈기 방장한 20대의 모습 말이다. 4월의 보리를 청보리라 부르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청보리는 보리의 종(種)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종과 상관없이 젊은 보리를 모두 청보리라 한다. 인종과 피부색이 달라도 모든 젊음을 청춘이라 부르듯이. 올해로 14회를 맞은 고창 청보리밭축제는 대한민국 대표 축제 중 하나다. 연간 보리 400t을 생산하는 대규모 경작지가 빼어난 경관과 어우러져 우리 농촌의 새로운 모델, 이른바 '경관 농업'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구릉을 따라 330만여 ㎡에 펼쳐진 청보리밭은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도, 허리 꼿꼿이 세우고 당당히 선 모습도 매력적이다. 청보리밭의 멋을 제대로 느끼려면 걸어봐야 한다. 청보리와 유채꽃이 어우러진 풍경을 길동무 삼아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보면 바람에 서걱대는 보릿대에서, 고혹적인 향기를 머금은 유채꽃에서 봄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걷다가 힘들면 보리밭 곳곳에 마련된 정자에 앉아 다리쉼한다. 정자에서는 잠시 눈을 감아보자. 바람 소리와 꽃향기는 눈을 감아야 더 잘 느껴진다. 기분이 동하면 '보리밭' 한 소절 불러도 좋다. 도깨비숲, 호랑이왕대밭, 잉어못 등 청보리밭을 걷다 만나는 테마 공간도 흥미롭다. 도깨비숲은 도깨비의 횡포를 참다못한 주민들이 도깨비를 대숲에 몰아넣고, 다시는 나오지 못하도록 절을 짓고 사천왕상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도깨비가 나타날 때마다 종을 쳤다는 의종각은 도깨비숲 뒤에, 돌로 만든 사천왕상은 백민기념관 입구에서 만날 수 있다. 사천왕상이 백민기념관에 있는 것은 도깨비를 가두기 위해 세운 절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도깨비숲 맞은편에 있는 호랑이왕대밭은 도깨비의 심술궂은 장난을 피해 호랑이가 숨어든 곳이다. 도깨비가 얼마나 심술을 부렸으면 호랑이가 대밭으로 숨었을까. 대밭 입구에 겁먹은 표정으로 웅크린 호랑이 모형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이번 축제에선 이 공간을 '이야기가 있는 테마 길'로 조성해 관람객이 길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 나설 수 있도록 했다. 산책로 바닥에 있는 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청보리밭에 얽힌 도깨비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흥미롭다. 보리밭 산책에 출출해진 배는 보리밥으로 채운다. 고슬고슬한 보리밥에 고사리, 상추, 콩나물을 넣고 고추장에 쓱쓱 비벼 먹는 꽁보리밥이 말 그대로 별미다. 여기에 튼실한 총각김치 하나 올리면 더 바랄 게 없다. 학원농장직영식당에는 보리새싹비빔밥과 함께 봄날 집 나간 입맛을 찾아줄 메밀묵, 메밀국수도 있다. 보리를 주제로 펼치는 축제답게 보리를 이용한 먹거리도 다양하다. 장년층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보리개떡과 보리떡이 배고팠던 시절을 생각하며 먹는 추억의 맛이라면, 젊은 층의 입맛을 겨냥한 보리커피는 보리를 이용한 퓨전 식품이라 할 만하다. 보리커피에는 원두와 보리가 7:3 비율로 들어간다. 일반 커피에 비해 뒷맛이 구수한 건 이 황금 비율 때문이다. 새콤달콤한 보리강정과 바삭바삭한 보리새싹쿠키, 부드러운 식감이 일품인 보리발효빵은 아이들 입맛을 저격할 준비를 마쳤다. 청보리밭 건너편 주행사장에서 보리개떡을 직접 빚고 구워보는 체험도 가능하다. 축제장 입구에 마련된 농경유물전시관도 한번쯤 찾아볼 만하다. 이제는 흔히 볼 수 없는 탈곡기와 가마니틀 등 다양한 전통 농기구가 전시되어 여기저기에서 나 어릴 적에는~으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들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시관 내 널찍한 평상에서 행사 도우미로 나선 마을 어르신들이 멍석과 망태기 등을 짜는 모습도 친근하다. 보릿골체험마당에서는 보리 새싹으로 비누를, 보릿대로 보리피리를 만들어볼 수 있다. 이번 고창 청보리밭축제의 주제는 '한국인의 본향 고창, 도깨비가 사랑한 청보리밭'이다. 한국인의 본향이 고창이라니 무슨 뜻일까. 아마 고창의 고인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고인돌은 전 세계적으로 발견되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은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이 유일하다. 그중에도 고창 지역에 가장 많은 고인돌이 분포되는데, 그 수는 무려 2000기가 넘는다. 고창에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인돌만 447기다. 고창 청보리밭축제가 열리는 학원농장에서 차로 30분 거리인 고창고인돌박물관은 청동기시대의 각종 유물과 생활상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박물관 3층에 마련된 체험학습실에서는 불 피우기, 암각화 그리기, 고인돌 만들기 등을 체험해볼 수 있다. 원형 움집의 내부를 실물 크기로 재현한 포토 존도 인상적이다. 야외전시실은 선사인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선사마을, 모형으로 만든 고인돌의 덮개돌을 운반해볼 수 있는 체험마당으로 꾸며졌다. 고인돌탐방열차를 이용하면 실제 고인돌을 만날 수도 있다. 고창 청보리밭축제 -주소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공음면 학원농장길 158-6 -문의 : 063-564-9897(고창청보리밭축제위원회) http://chungbori.gochang.go.kr/index.gochang 주변 음식점 -학원농장직영식당 : 보리새싹비빔밥 / 공음면 학원농장길 158-6 / 063-564-9897 -풍천가든 : 풍천장어 / 아산면 선운사로 7 / 063-562-7520 -용궁횟집 : 주꾸미철판구이 / 상하면 진암구시포로 542-1 / 063-563-0031 숙소 -힐링카운티1~15 : 고창읍 석정2로 207-49 / 063-560-7300 http://www.huespapension.com/ -넥스텔 : 고창읍 월암수월길 112 / 063-564-8999 -호텔석정힐 : 고창읍 석정2로 192 / 063-563-7711 http://www.hillcc.com/ 글, 사진 : 정철훈(여행작가) ※ 위 정보는 2019년 3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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