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Bunker)의 존재 이유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데 있다. 숨겨진 공간. 어둠에 가까운 벙커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당연히 ‘빛’일 것이다. 전혀 반대이지만 떨어질 수 없는 두 대상이 만나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그것도 예술이라는 멋진 옷을 입고서. 글 정철훈 사진 정철훈 나와 ‘빛의 벙커’와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제주의 숨은 일출명소로 알려진 대수산봉에 올라 멋진 일출을 감상한 뒤 다음 코스는 어디가 좋을까 하고 지도를 살피다 우연히 대수산봉 서쪽에서 ‘빛의 벙커’를 발견했다. 제주 커피박물관 바움이 있는 곳이었다. 낯선 이름에 호기심이 동해 스마트폰으로 빛의 벙커를 검색했다. 결과는 빙고! 셀 수 없이 많은 관람 후기 대부분이 ‘강추’, ‘최고’, ‘꼭 가봐야 할 곳’ 등으로 꼭꼭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기대에 부풀어 찾은 첫 방문은 다음 전시 준비를 위한 휴관으로 불발. 그래서 다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빛의 벙커는 ‘프랑스 몰입형 미디어아트’를 선보이는 공간이다. 프랑스도 알겠고 미디어아트도 감이 잡히는데, 몰입형이라니. 몰입이라는 것이 누가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매표소에 비치된 안내책자를 보며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솔직히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서 ‘멋지다’는 생각은 했지만 ‘몰입’이란 단어가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한데 불 꺼진 영화관으로 들어가듯 큼직한 출입문을 열고 전시실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막연하게 느꼈던 그 몰입이라는 게 시작됐다. 빛의 벙커에서 추구하는 몰입형 미디어아트가 수십 대의 프로젝터가 쏟아내는 영상과 수십 대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음악으로 자신을 잠시나마 잊게 만드는, 그래서 그 넓은 공간 안에 영상과 음악만 존재한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라면 나는 전시실에 머무는 1시간 동안 온전한 몰입을 경험한 셈이다. 고흐와 고갱의 작품 속에 파묻힌 채. 그건 최면처럼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빛의 벙커는 원래 국가기간통신망 운영을 위해 비밀리에 건설된 곳이다. 생각의 전환을 통해 약 3000㎡의 공간이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관으로 새로 태어났다. 한국통신(현 KT) 해저 광케이블센터와 서버 기지로 활용됐던 이곳은 2018년 11월, <빛의 벙커 : 클림트>전을 통해 세상에 깜짝 등장했다. 프랑스의 ‘레보 드 프로방스-빛의 채석장’과 ‘파리-빛의 아틀리에’에 이어 세 번째로 선보인 프랑스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관이다. 프랑스가 아닌 다른 나라에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관이 마련된 건 제주 ‘빛의 벙커’가 유일하다. 빛의 벙커가 야심차게 준비한 <클림트>전은 작품이 전시되는 8개월 동안 무려 40여만 명의 관람객을 불러들였다. 쓸모를 다해 폐허로 남은 비밀벙커의 화려한 부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바통을 이어 받은 빛의 벙커 두 번째 주인공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다. 2020년 10월 25일까지 계속되는 <빛의 벙커 : 반 고흐>전에서는 고흐의 대표작 ‘감자 먹는 사람들(The Potato Eaters)’(1885),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1889), ‘해바라기(Sunflowers)’(1888) 등을 포함한 회화 800여 점과 1000여 점의 드로잉을 몰입형 미디어아트로 만날 수 있다. 10개 섹션으로 구성된 32분짜리 영상은 뉘넨(Neunen)에서 아를(Arles), 파리(Paris), 생레미 드 프로방스(Saint Rémy de Provence)를 거쳐 생을 마감한 오베르쉬르우아즈(Auvers-sur-Oise)까지 고흐의 흔적을 속도감 있게, 하지만 촘촘히 좇는다. 몰입형 미디어아트가 자랑하는 다양한 애니메이션 기법은 원작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특히 고흐가 즐겨 사용한 강렬한 색감과 거친 붓 터치를 섬세한 빛으로 표현해낸 점이 인상적이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화려한 영상만큼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장엄한 음악도 몰입형 미디어아트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조연이다. 재니스 조플린, 조반니 바티스타 룰리, 에드바르 그리그, 자코모 푸치니, 안토니오 비발디, 요하네스 브람스 등 클래식과 재즈를 넘나드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은 고흐의 강렬한 작품만큼 울림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클림트>전에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가 서브전으로 참여했다면, 이번 <반 고흐>전의 서브전은 고흐와 강한 예술적 영향을 주고받은 폴 고갱이 맡았다. ‘섬의 부름’이란 부제가 붙은 폴 고갱 특별 전시는 10분 정도 이어진다. 빛의 벙커는 벽과 바닥, 심지어 기둥까지도 전시공간으로 활용한다. 축구장 절반 크기의 벙커 내부를 구석구석 비추는 수십 대의 프로젝터는 벽지 장인의 손길처럼 벽과 벽이 만나는 좁은 틈마저도 놓치지 않는다. 새하얀 캔버스가 화가의 상상력을 펼쳐 보이는 창작의 공간이라면 기둥과 콘크리트로 마감한 벙커 내부는 몰입형 미디어아트를 구현하는 기술의 장이다. 몰입형 미디어아티스트들은 각각의 공간에 최적화된 영상으로 관람객을 맞는다.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제작한 같은 영상이라고 해도 상영되는 곳이 어디인가에 따라 작품의 감동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빛의 벙커는 빛의 벙커로서, 레보 드 프로방스-빛의 채석장은 레보 드 프로방스-빛의 채석장으로서 고흐의 작품을 소화해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원작의 감동을 넘어서는 몰입형 미디어아트의 매력은 여기에서 생긴다. 실제로 전시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면 미디어아트의 이런 매력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내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벽과 기둥의 이미지가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다거나, 애니메이션 효과를 통해 좌우로 움직이는 이미지 때문에 두 벽이 맞닿는 것 같은 착시를 경험하게 되는 것 등등. 고집불통 미술평론가들에게는 어떻게 비칠는지 모르겠지만, 예술이란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즐길 때 그 가치가 극대화되는 것이니만큼 이 모든 시도가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천장을 제외한 모든 공간이 전시장으로 활용되는 빛의 벙커에서도 명당은 있다. 출입구를 지나 우측으로 보이는 길이 100m, 높이 5.5m의 거대한 벽면이 그곳이다. 관람객 대부분은 이곳을 마주하고 앉거나 서서 작품을 감상한다. 편집을 통해 몰입형 미디어아트로 재창조된 작품이 아닌 원작을 감상하고 싶다면 전시장 내 마련된 갤러리 룸을 찾으면 된다. 삼면을 벽으로 막아 만든 이곳에서는 주변의 현란한 영상에서 벗어나 작품의 제목, 제작 시기 등에 집중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작은 출입구를 제외한 사면과 천장, 바닥을 온통 유리로 마감한 미러 룸에서 만나는 영상도 이색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2039-22 ✔ 문의 1522-2653 ✔ 홈페이지 www.bunkerdelumieres.com ✔ 식당 - 오조해녀의집 : 전복죽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한도로 141-13 | 064-784-7789 - 도라지식당 : 갈치조림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연삼로 128 | 064-722-3142 - 진주식당 : 전복뚝배기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태평로 353 | 064-762-5158 ✔ 숙소 - 취다선리조트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해맞이해안로 2688 | 064-735-1600 | www.chuidasun.com - 플레이스캠프제주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동류암로 20 | 064-766-3000 | www.playcegroup.com - 서귀포KAL호텔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칠십리로 242 | 064-733-2001 | www.kalhotel.co.kr/seogwipo/ ✔ 여행 팁 빛의 벙커는 전문 해설가의 음성으로 전시를 더욱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도록 오디오 가이드를 제공한다. 김찬용 도슨트와 방송인 파비앙의 목소리로 빛의 벙커를 만나는 오디오 가이드는 빛의 벙커 홈페이지나 모바일 ‘가이드온’을 통해 무료 이용이 가능하다. ※ 위 정보는 2019년 12월에 작성된 것입니다.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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