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세계가 끝나고 온 우주에 오롯이 혼자 남은 기분이 들었다. 생채기 난 삶을 다독이러 청주로 갔다.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라는 청춘의 정의는 청주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바람은 산뜻하고, 햇살은 화사하고, 신록은 싱그러운 이곳에서 지금까지 잘 견뎌왔고 앞으로도 찬란하게 빛날 나의 청춘을 달래고 응원했다. 청남대로 향했다. 진입로부터 풍광이 범상치 않다. 백합나무 430여 그루가 늘어선 가로수길, 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대청호의 푸른 물빛은 마음을 홀렸다. 누구라도 이 길 위에 서면 영화 속 주인공처럼 보일 정도다. '따뜻한 남쪽의 청와대'라는 뜻의 청남대는 1983년부터 대청호 주변 184만4000㎡ 부지를 대통령 별장으로 사용하다가 2003년 4월 18일 일반에 개방했다. 11만6000그루에 이르는 137종의 조경수, 35만 본 143종의 야생화와 멧돼지, 고라니, 삵, 너구리, 꿩이 서식하는 생태 환경은 웬만한 수목원 못지않다. 청남대 본관, 대통령 기념관, 오각정, 양어장, 초가정, 대통령 동상, 음악분수 등 다양한 코스들이 두루두루 탐방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그만큼 붐볐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선호한다면 여섯 개의 갈래로 난 대통령 길을 걷는 게 답. 물길을 따라 산책하기엔 전두환·노태우·이명박 대통령 길이 좋고, 숲길을 산책하려면 김영삼, 노무현 대통령 길이 좋다. 푸른 대청호와 청남대의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풍광을 가장 높은 곳에서 한눈에 담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 길을 선택했다. 다른 길이 산책로인 데 반해 이 길은 등산로라 힘들다. 먼저 645개로 이어진 행복의 계단을 올라야 전망대에 이르는데, 행운과 기쁨을 염원하는 계단의 이름은 지나치게 가파른 경사 앞에서 의미를 잃어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서서히 후회와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하면, 길은 이런저런 모양으로 사람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 나이 되면 뭘 좀 알 줄 알았는데 라는 나의 혼잣말이 어머니 세대 아주머니들의 대화로 메아리치는 순간, 이 고민이 앞으로도 쭉 이어질 거라는 걸 깨닫게 됐다. 잠시 쉬는 동안 멍하니 내려다본 오솔길은 생동했다. 햇살과 그림자가 바람에 이끌려 춤추듯 보여서다. 인생도 마찬가지. 슬픔과 기쁨, 환희와 비애가 서로에게 자리를 내주며 어우러져야 진짜 살아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비경을 감상하고 내려오는 어느 아주머니의 올라갈 땐 숨이 차고 내려갈 땐 무릎이 아프고…아이고 암만 좋아도 내 다리 아프면 못 오는겨 라는 말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하겠다는 결심이 굳건해졌고 두 다리에 힘이 붙었다. 적당한 때 살랑거리는 바람, 아름다운 새소리, 나무와 풀들이 지혜롭게 사는 모양새를 세세히 보고 나면, 복잡하고 싱숭생숭한 마음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환기된다. 백지장 같은 마음은 아름다운 풍광으로 오롯이 채워졌다. 내륙의 다도해라는 별칭답게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물길은 거대한 청룡 여러 마리가 꿈틀대듯 역동적이다. 이 정도의 수고로 이만큼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 계단의 의미 그대로 행운과 기쁨이다. 김대중 대통령 길의 고즈넉한 숲길은 김영삼 대통령 길과 이어진다. 청남대 최고의 명당이자, 족욕을 즐길 수 있는 행운의 샘과 땅속뿌리가 땅 위로 돌기(공기뿌리)를 밀어내는 독특한 형태의 낙우송 숲이 여기에 있다. 낙우송 길은 아름다운 풍광 덕에 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단골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 본관 앞 메타세쿼이아 숲도 매력 넘치는 공간이다. 메타세쿼이아 나무에 둘러싸인 벤치에 앉아 음악 분수를 마주 보면, 유럽 고성의 정원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청남대 인근의 문의문화재단지는 알차다. 청주에서 출토된 유적과 문화재들을 모아 조성한 곳으로 대청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아름답고 체계적으로 조성된 코스도 산책하기 좋아 청주의 명소가 됐다.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지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구릉이 잘 발달된 덕에 오래 전부터 인류가 정착해 살던 유서 깊은 곳이다. 자연스레 이 지역에는 수많은 유적이 분포돼 있다. 그중 미원 수산리 고인돌, 내수 학평리 고인돌과 대청댐 건설로 수몰된 가호리 아득이 마을의 고인돌을 문의문화재단지로 옮겨 한데 모았고,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청주 문산리 석교를 비롯해 조선시대 민가와 객사 여막 등을 고스란히 이전해 선조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했다. 문화유물전시관도 볼 만하다. 전시관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인류 화석인 흥수아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여겨지는 소로리 볍씨로 대표되는 청주 인근의 구석기 생활상에 관한 정보를 관람할 수 있다. 단지 내에서는 다양한 체험 활동도 가능하다. 전통주 체험, 캘리그래피, 차와 전통 음악의 만남, 전통 혼례 체험에 이어 매주 토요일에는 탐방객이 한복을 입고 단지 내 저잣거리를 한 바퀴 도는 한복 체험을 진행한다. 청주에 사는 사람 셋에게 청주 명소를 추천해달라고 했을 때, 모두가 단번에 언급한 곳이 상당산성이다. 남한강 지역과 금강 북부지역의 생활문화권을 가르고, 한때는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이 되기도 했던 한남금북정맥의 한 점, 여기에 상당산성이 있다. 조선의 숙종이 개축을 했고, 영조가 이인좌의 난을 겪고 대대적인 수축을 시작해 완공한 산성이지만, 원래 이 자리에 백제 때부터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기록들이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통해 전해진다. 때 이른 더위를 피해 이른 아침 움직이겠다는 의지는 게으름에 꺾였고 정오가 다 되어서야 산성 초입인 남문에 도착했다. 이미 산성을 한 바퀴 돌고 나온 부지런한 어르신은 성곽길은 해가 들어 더우니, 안쪽 숲길로 돌아 힘내서 걸으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걸으면 걸을수록 자꾸만 몸이 성곽길로 쏠린다. 성곽길 아래로 광활하게 펼쳐지는 청주 시내의 전경, 볼록볼록 솟아난 맞은편 산등성이의 절경을 도무지 뿌리칠 재간이 없어서다.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유사시 사람과 물자가 통과할 수 있도록 작게 낸 암문(暗門)도 못 봤을 터. 여자 혼자 태양이 수직으로 내리쬐고, 인적이 드문 길을 걷게 할 만큼 매력적인 풍광은 남문에서 20분 거리인 서문까지 이어졌고, 다시 40분 거리인 동암문까지 이어졌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더위를 피할 요량으로 가늘게 난 샛길을 따라 내려왔다. 샛길 따라 내려가다 그늘진 안쪽 숲길로 들어서겠다는 심산이었는데, 샛길은 점점 가늘어지고 가팔라지고, 자취를 감췄다. 불안해졌다.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어쩌나'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누가 들을까' 등의 최악의 상황만 상상하며 내려오길 십여 분, 내 발끝은 누군가 세워둔 얕은 담 위에 있었고, 뛰어내리니 남의 집 밭이다. 좀 더 현실적인 걱정과 한탄이 시작됐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이며 주차장에서 얼마나 먼 곳인가, 나는 어쩌다 이 폭염에 땡볕이 내리쬐는 시골길을 걷게 됐나, 왜 지도를 챙겨오지 않았나' 등등. 밭길을 따라 내려가니 아기자기한 마을이 나타났고, 마을 앞 저수지 주변으로 사람들이 산책을 하거나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저수지 맞은편에는 향토 음식을 파는 식당과 카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평온한 풍경에 마음이 놓여, 길을 잘못 들지 않았다면 이런 정취를 놓쳤을 거라며 스스로를 위안했지만, 간사하고 어리석다. 마을과 저수지는 산성의 중심이어서 샛길로 들어서지 않았어도 당연히 지나칠 풍경이었다. 다음번에는 남문에서 서문으로, 다시 동문에서 남문으로 온전히 한 바퀴를 돌겠다는 오기를 품고 산성을 나섰다. 헛웃음이 나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추억이다. 녹음이 우거진 청주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인 우암산 우회로를 달리면 청주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수암골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 바로 아래로 색색의 지붕이 옹기종기 모인 수암골이 있다. 수암골은 6·25전쟁 이후 피난민이 터전을 이룬 동네다. 청주의 마지막 달동네였던 이곳이 청주 최고의 명소가 된 것은 2008년부터다. 공공예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마을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아기자기한 벽화들이 동네에 활기를 불어넣자 탐방객들이 늘어났다. 이후 '제빵왕 김탁구', '카인과 아벨' 등 드라마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치르게 됐다. 동네를 구석구석 돌아보는 데는 대략 삼십 분, 천천히 오래 봐도 한 시간이다. 마을 초입의 삼충상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앉았다. 사각사각 바람에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 삼충상회 할머니의 알록달록한 빨래가 푸른 하늘을 수놓는 평화롭고 서정적인 풍경에 반해 엉덩이 떼기가 쉽지 않다. 청주 청원구 내수읍 형동리에 화가 운보 김기창의 사저이자 문화예술공간인 운보의 집이 있다. 1976년, 아내이자 화가인 박래향이 타계한 후 김기창은 어머니의 고향에 집을 짓고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비 내리는 날씨 덕에 상당산 자락으로 구름과 안개가 짙게 낀 풍경은 그의 호 운보(雲甫)와 묘하게 어울렸다. 초입의 돌기둥에 새겨진 '나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조용한 속에서 내 예술에 정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라는 글귀 위로 빗물이 세차게 흘렀다. 운보의 집에는 관리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안채, 미술관, 조각공원과 분재공원, 수석공원까지 이르는 5만평의 공간이 내 집인 듯했다. 거대한 규모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느낌이라 아늑하기까지 했다. 사랑채엔 작은 중정 한가득 장미가 탐스럽게 피었고, 정돈된 안채 주변으로 그의 취향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분재와 수석들이 여기저기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오래된 한옥의 결은 기품 있고 우아했다. 대청마루에 앉아 비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는 시간은 무엇과도 바꾸기 싫을 만큼 소중했다. 바보산수, 만원 권 지폐의 세종대왕 초상, 청록산수, 군마도 등의 대작을 그린 화가의 예술혼이 곳곳에 오롯이 배어 있었다. 미술관을 관람하고 나자 비가 그치고 해가 나기 시작했다. 그림 그리는 대가의 공간은 눈길 닿는 곳마다 그림처럼 아름답다. 수십 번을 가도 질리지 않을 섬세함이 사람의 마음을 잡아 끌었다. 특히 국내 10대 명석(名石) 중 코끼리, 여인상, 백경, 명상의 돌 등은 가치 환산이 불가한 국보급 수준이라고 하니, 자세히 보자. 청남대 -주소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청남대길 646 -문의 : 043-257-5080 http://chnam.chungbuk.go.kr 문의문화재단지 -주소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대청호반로 751-27 -문의 : 043-251-3288 청주 상당산성 -주소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성내로 70 -문의 : 043-201-0202 수암골 벽화마을 -주소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수암로 58 (수동) 일대 -문의 : 043-201-2043 운보의 집 -주소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형동2길 92-41 -문의 : 043-213-0570 http://woonbo.kr 출처 : 청사초롱 6호 글, 사진 : 문유선(여행작가) ※ 위 정보는 2019년 3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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