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이름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어 가던 14세기 말,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격동의 시대. 바람 앞의 등불 같은 '고려' 끝자락과 두려울 것 없이 성큼성큼 다가오던 '조선'의 시작점을 살아가던 이들의 삶은 어땠을까. KBS1에서 인기리에 방영중인 <정도전>을 따라 역사 여행을 떠나봤다. 전주와 남원, 진안에서 만난 살아있는 조선의 역사 따라 출발! 고려말에서 조선초, 이 시대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몇 있다.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그리고 태종 이방원과 정몽주다. 고려 충신 정몽주에게 새나라 '조선'을 함께 건국하자 회유하던 조선의 세 번째 왕 태조 이방원의 시 '하여가'와 고려 충신으로 생을 마친 정몽주의 답가 '단심가' 한 소절 읊어보며 조선시대 역사 여행을 시작해보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 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 '하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 '단심가'
결국 정몽주는 개경의 선지교(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제거된다. 그의 죽음은 새나라 건국에 날개가 된다. 4개월 뒤인 1392년 8월 이성계는 고려 공양왕에게 왕위를 받아 조선을 건국한다. 500년 고려의 끝 그리고 500년 조선의 시작이었다. 역사의 승자는 이성계였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잡은 이성계는 최영 세력을 숙청하고 조선의 태조가 된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조선의 '소프트웨어'를 완성한 정도전이 있었다. <조선경국전>의 저술자이자 '조선'이라는 나라의 설계자 정도전. 1398년, 정몽주에 이어 이방원에게 제거되기 전까지 그는 조선 최고의 권력자이자 설계자로 활약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고려에서는 변방인으로 새나라 조선에서는 개국공신으로 꽃을 피우나 싶더니 태종 이방원에게 제거된 후 조선 말기에 가서야 복원된 정도전. 하지만 그가 주장하고 기획한 한양 천도, 경복궁, 한양 도성 등은 조선시대를 관통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는 성문의 이름도 그의 작품이다. 미비한 신분 탓에 외면당하던 고려를 벗어나 새로운 나라에서 잠시나마 마음껏 춤출 수 있었던 정도전이 꿈꾸던 '백성들이 살만한'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전주를 비롯해 남원과 진안 등 전북특별자치도 지역은 조선의 건국과 뗄 수 없는 공간이다. 특히 '가장 한국적인 고장'으로 꼽히는 전주에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태조 어진 (임금님 초상화)을 비롯해 전주이씨 시조 묘역인 조경묘 ,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승리한 후 쉬어 갔다던 오목대 와 이목대 등 얘깃거리가 넘쳐난다. 상당수가 전주한옥마을 지척에 자리하니 한옥마을부터 살펴보자. 태조 어진을 모신 경기전 정전 (보물 제1578호)에 들어선다.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를 뜻하는 경기전 은 조선 건국을 기념해 건립됐다. 기둥 아래 하얗게 덧칠한 구름을 타고 왕을 배알하러 다가간다. 안으로는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들의 대립, 밖으로는 왜구와 홍건적이 들끓던 고려말 혼란기, 최영과 함께 고려 최고 무장으로 꼽히던 이성계는 새나라를 개국한다. 경기전에 모신 태조 어진(국보 제317호)이 푸른 곤룡포를 입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태조 어진 진품은 어진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일년에 한번, 한달 정도 대중에게 공개된다. 올해는 아직 일정이 나오지 않았다. 경기전 전정을 나와 조선왕조실록의 보관소 전주사고를 지나 조경묘 로 향한다. 조선을 개국한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과 시조비인 경주김씨의 위패를 모신 시조사당이다. 조선을 개국한 왕의 뿌리를 찾고 그 타당성을 입증하는 것은 새로운 왕조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업이었으리라. 조경묘를 지나 예종대왕 태실 및 비 와 닿는다. 왕가에서는 왕손이 태어나면 그 태를 석실에 보관했는데 이를 '태실'이라 한다. 부도와 비슷한 모양이다. 원래 전북 완주 구이면 태실마을에 있던 것을 1970년 경기전으로 가져왔다. 경기전 부속건물까지 보고 나면 오목대 와 이목대 로 가보자. '대'는 돈대(墩臺), 조금 높직한 평지를 뜻하는데 지금 우리들이 오목대, 이목대라고 부르는 실체는 공간이라기보다 고종황제 흔적이 담긴 비석을 말한다. 오목대는 이성계, 이목대는 이성계의 선조인 이안사와 연이 있는 공간이다. 오목대는 전주한옥마을 초입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닿는다. 중간에 펼쳐지는 한옥마을도 놓치지 말자. 오목대는 1380년 남원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격파한 이성계가 개선길에 잠시 머물렀던 공간이다. 1900년에 만들어진 비석이 자리를 지킨다. 남원 운봉의 황산대첩 승전비가 있던 터(남원황산대첩비지․사적 104호)와 더불어 조선 개국전 이성계의 활약을 드러낸다. 오목대에서 오목교를 건너면 승암산 자락의 자만동 벽화마을이다. 이 일대를 이목대라고 한다. 이목대란 과연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참 고민을 하다 이목대 비석과 닿는다. '목조대왕이 살았던 옛 터(穆祖大王舊居遺址)'라고 써 있다. 고종황제의 친필로 알려진다.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덕분에 '목조대왕'으로 추존된 이안사는 전주의 내로라는 토착 세력이었다. 이목대 자리는 태조의 선조들이 대대로 살았던 공간. 관기 문제로 대립하던 이안사가 삼척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이 일대는 전주 이씨가 모여 살았다고 전해진다. 여기까지가 전주한옥마을에서 살펴본 조선의 흔적이다. 전주 중앙동의 풍패지관 (보물583호)과 진안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한 회안대군묘 까지 보고나면 전주에서의 역사여행은 거의 마무리 된다. 풍패지관은 조선시대의 객사로 현판에 적힌 '풍패'가 이곳이 조선왕조의 본향임을 알려준다. 한나라 고조의 고향인 '풍패'는 이후 왕조의 본향을 의미하는 상징이 됐다. 객사이자 관사로 사용됐으며 감실에 전패를 모셔 임금에 대한 예를 올렸다. 회안대군은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 이방간이다. 제1차 왕자의 난에 정도전 무리를 제거하는데 힘을 보태 회안공이 된 '왕자의 난'의 또 다른 주역이다. 동생 이방원(후일의 태종)을 향한 공격이 실패해 귀양살이로 남은 일생을 보냈다. 이렇듯 곳곳에 조선 개국 초의 왕위쟁탈전 흔적이 남아있다. 앞서 잠시 소개한 남원 운봉의 황산대첩비지와 황산대업 당시 고려군과 왜군의 주요 전투지였던 피바위도 고려의 끝자락을 기억하는 역사적 공간이다. 어쩌면 이곳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이성계는 새 나라를 꿈꾸지는 않았을까. 황산대첩 승리후 전주로 돌아가던 길에 만난 마이산은 꿈속에서 금척을 받은 곳과 닮았다고 조선건국의 천명지로 알려진다. 마이산 은수사와 주필대 등도 놓치지 말자. 주변 음식점 조점례 남문피순대(남부시장)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전동3가 2-198/ 피순대 / 063-232-5006 왱이집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경원2동/ 콩나물국밥 / 063-287-6980 삼백집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고사동 454-1/ 콩나물국밥/ 063-284-2227 http://www.300zip.com/ 현대옥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2가/ 콩나물국밥/ 063-228-0020 숙소 베니키아 전주한성호텔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고사동 1가 199 / 063-288-0014 풍남관광호텔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 3가 43-2 / 063-286-7800 한옥생활체험관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33-4 / 063-287-6300 학인당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향교길 45) 105-4/ 063-284-9929 전주관광호텔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3가 28/ 063-280-7700 글, 사진 : 한국관광공사 국내스마트관광팀 이소원 취재기자( msommer@naver.com ) ※ 위 정보는 2016년 8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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