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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백제는 근초고왕 때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으며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웃 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하며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 하였다. 한성백제박물관은 5학년 2학기 1단원의 ‘삼국시대의 건국과 발전’ 과정 중 백제의 전성기를 중심으로 한 백제의 문화적 특징과 풍속, 한강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전과 교류 관계 등을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있어 고대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한성백제박물관이 드디어 개관했다. 역사를 사랑하는 많은 어린이들과 부모님들에게 정말 기쁜 소식이 될 것이다. 특히 한성백제박물관은 한성백제의 방어시설이 위치한 몽촌토성 안에 있어서 사시사철 아름답게 변해가는 자연 속에서 백제에 대해 열심히 공부할 수 있어서 더욱 매력적인 여행지이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재미있는 백제이야기도 공부하고 올림픽공원 몽촌토성에서 봄빛 가득한 트레킹도 즐길 수 있는 일석이조의 재미있는 교과서 여행 속으로 다 함께 들어가 보자. 한성백제박물관의 문을 열고 입장하면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토성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로 한성백제의 도성이었던 풍납토성. 실제 풍납토성의 규모와 일치하도록 지하 2층에서 지상 2층까지 토성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기 때문에 당시 어마어마했던 풍납토성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다. 너비 약 43미터 높이 9~11미터 가량의 풍납토성을 얇게 잘라낸 단면으로 복원했는데 이와 같은 전사기법으로 인해 풍납토성을 보다 실감나게 관람할 수 있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서울이지만 한성백제의 도읍지인 송파구 풍납동 일대는 평평한 땅이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단단한 성이 필요했다. 그래서 한성 백제인들은 궁궐주변을 튼튼한 토성으로 둘렀다. 성의 안쪽은 완만하게 하고 성 바깥쪽은 가파르게 만들어 적들이 침입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게다가 풍납토성은 자연적으로 형성되어있는 넓은 한강이 해자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성을 만들기에 적합한 위치였다. 지금 남아있는 송파구 일대의 풍납토성은 나지막이 겨우 한때 성이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규모로 남아있지만 한성백제박물관에서는 당시 모습 그대로 관람할 수 있다.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된 풍납토성은 만드는 방법도 자세하게 재현되어있다. 벽돌모양의 네모난 틀에 진흙과 짚, 나뭇가지를 잘라 꾹꾹 밟아 흙틀을 만들고 그 흙덩이를 벽돌집 짓듯이 차례차례 쌓아 올리면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토성이 완성된다. 토성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튼튼했다고 한다. 돌로 견고하게 쌓은 석성보다 무너뜨리기 힘들었다고 하니 백제인들의 지혜가 놀라울 따름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은 고구려 출신이었다. 부여에서 갈라져 나와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토착귀족 세력 중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계루부의 족장 연취타발의 딸, 소서노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힘을 얻게 되는데 소서노에게는 죽은 전남편인 우태와 결혼하여 낳은 아이 온조와 비류가 있었다. 주몽은 비록 자기자식은 아니었지만 온조와 비류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나 부여에서 친아들인 유리가 찾아오자 유리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온조와 비류는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다. 형인 비류는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에 자리를 잡고 온조는 당시 마한땅이었던 색리국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아 뜻을 펼치게 되었다. 당시 백제를 위협했던 말갈과 낙랑국을 차례로 물리친 온조는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 터전을 잡았으며 작은 나라들의 연합이었던 마한까지 정복하여 비로소 고대국가로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시작은 마한국의 작은 나라 색리국이었지만 백제는 점점 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근초고왕대에 이르러서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는 맹주로 성장해나간다. 한강이라는 물과 기름진 땅을 바탕으로 일본, 중국, 마한의 여러 국가들의 다양한 문화를 융합한 백제의 시작은 아름답고 창대한 것이었다. 한강유역을 차지한다는 것은 곧 문화적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강은 중국과 일본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한강유역을 차지한다는 것은 곧 발전된 문화를 받아들이고 또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육로로 무역을 하려면 여러 나라가 가로막혀있어 전쟁을 피해갈 수 없었겠지만 해상을 통해서라면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했으니 물줄기를 따라 이동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중요한 교통로였는지 짐작이 가도고 남는다.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된 백제의 배를 통해 당시 발달된 항해기술을 짐작해볼 수 있다. 백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 가장 먼저 한강유역을 차지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빛나는 문화의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백제는 중국으로부터는 흑유항아리와 청동초두, 허리띠꾸미개와 같은 고급스러운 물품들을 들여왔으며 일본에게는 칠지도와 같은 뛰어난 철제품을 하사하는 등 백제의 발달된 문화를 전하는데 앞장섰다. 한강을 중심으로 중국과 왜등과 활발한 문화교류를 통해 백제는 더욱 큰 나라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 백제 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살았고 어떤 여가 생활을 즐겼으며 어떤 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을까?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된 화첩 ‘양직공도’를 통해 당시 백제인의 문화와 옷차림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박물관에는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집 자리를 복원하여 당시 사람들의 옷차림과 생활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폭이 넓은 단정한 옷에 백제인들이 즐겨 쓰는 좁고 날렵한 관은 우아하고 단정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백제인만의 미적 감각을 짐작케 해준다. 백제 사람들은 토착신앙을 바탕으로 유교, 도교, 불교 등의 종교를 믿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유교와 도가사상의 보급은 한자가 널리 보급되는데 공헌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그 위에 불교가 전해져 널리 퍼졌다. 한성백제박물관에는 당시 백제인들이 여가생활로 즐겼던 바둑판이 재현되어 있는데 한성백제박물관을 대표할 만큼 공들여 세공한 걸작이라고 한다. 고급스러운 자단목에 상아, 화각, 은판, 흑단목, 화양목 등 최고급 재료들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바둑판은 놓치지 말아야 할 볼거리다. 백제에서 바둑을 가장 사랑했던 왕은 개로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개로왕과 고구려 첩자 승려 도림에 대한 일화는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삶의 여정을 지나 영원한 안식처인 무덤으로 옮겨오면 다양한 한성백제의 무덤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여러 가지 무덤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무덤은 석촌동 고분군에서 볼 수 있는 적석총이다. 백제초기의 무덤들은 고구려의 무덤양식과 비슷한 양식을 보인다. 그 이유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바로 고구려인이었기 때문. 한성백제 초기에 백제의 귀족들은 고구려인의 생활풍습과 비슷하게 삶을 꾸려갔지만 세월이 흘러 여러 문화가 융합되면서 백제 특유의 고유한 문화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백제는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에게 크게 패해 무릎을 꿇은 이후 한성백제의 견고했던 옹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은 백제의 도읍 한성을 함락시키고 아차산성 아래에서 개로왕의 목을 친다. 551년 백제와 신라연합군이 다시 한강유역을 되찾기까지 76년간 한성지역은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 이를 증명하는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 당시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다. 한강유역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수막새는 백제와 사뭇 달라진 형식이다. 금방이라도 툭 튀어 나올듯한 부리부리한 선을 자랑하는 고구려의 기와는 강하고 힘찬 선이 매력이다. 박물관에 전시된 호우명 그릇 또한 눈여겨볼만한 유물이다. 호우명 그릇은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유물로 손꼽힌다. 한성백제 이후 웅진과 사비로 도읍을 옮기며 발굴된 중요한 유물들이 복제품으로 전시되고 있는데 아무래도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유물은 ‘백제금동대향로’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일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교과서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국보인 만큼 눈여겨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무령왕은 웅진 백제를 대표하는 왕이며 개로왕대에 이르러 거의 죽어가던 백제를 다시 부흥시킨 왕으로도 유명하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사마왕으로 알려져 있던 무령왕의 존재가 세상에 다시 나타난 것은 1971년 무령왕릉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이후부터이다. 실제 무령왕의 존재가 찬란한 유물과 함께 그 모습을 드러내자 대한민국 전체가 술렁였다. 무령왕은 중국 남조와 교류하고 왜에게 백제의 문화를 전파하며 문화강국으로서 백제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귀족세력에 의해 약화될 대로 약화되었던 왕권을 굳건히 일으켜 세웠던 백제 최고의 왕들 중 한 분이다. 박물관 전시실 한켠에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당당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중 하나인 진묘수는 무덤으로 들어오는 나쁜 무리를 막아주는 상상의 동물로 중국의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었으며 무령왕릉에서도 출토되었다. 당시 학자들이 무덤을 발굴 할 때 무덤 앞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던 동물이 바로 진묘수였다. 진묘수 하나만을 놓고 보더라도 무령왕이 중국 남조와 교류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진묘수는 뭉툭한 입술과 짧은 다리를 하고 있는 형상이다. 한성백제박물관과 몽촌토성 -주소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성대로 71 -문의 : 02-2152-5800 ※ 위 정보는 2017년 3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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