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것은 늘 멀리 있다. 한반도 끝자락, 육지로 가지 하나를 뻗어 가까스로 섬을 면하고 있는 전남 고흥으로 향했다. 그곳에 가면 그리운 모든 것이 기다릴 것만 같았다. 한나절을 꼬박 달려 도착한 고흥은 유자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를 기다린다면 노란 리본을 나무에 매달아주오’ 라는 노랫말처럼, 초록 이파리 사이 노란 유자가 알알이 박혀 있었다. 진한 향기에 몹시 그리워하던 친구를 만난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움은 어느새 아쉬움이 되었고, 마음은 이미 다음을 기약하고 있었다. 고흥은 보성과 순천 아래 아슬아슬하게 걸린 반도다. 육지에 매달린 모양이 잘 여며진 주머니 같다. 논밭이며 갈대 습지가 노랗게 변하는 계절엔 울퉁불퉁 유자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는 유자가 고흥의 특산물인 것과도 연관이 깊다. 고흥 유자는 전국 생산량의 38%에 이른다. 온화한 기후와 부드러운 해풍 덕에 맛과 향이 진하고 껍질이 두꺼운 것으로 유명하다.겨울이 오기 전 늦가을이 되면 고흥은 유자 수확으로 분주해진다. 유자나무는 가시가 있어 열매를 따기 쉽지 않다. 비바람이라도 세차게 불면 억센 가시가 폭신한 유자 껍질을 뚫어 상처를 내기도 한다. 궁중음식 전문가 한복선 선생은 가시를 은장도에 비유하며 유자를 함부로 접할 수 없는 고귀한 여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유자 수확은 대개 두 개 조로 역할을 나눠 이뤄진다. 유자를 따서 떨어뜨리면 밑에서는 유자 상태를 확인하고 상자에 담는다. 툭, 어른 주먹만한 노란 열매가 발밑에 구르면 가을은 한 뼘 더 멀어진다. 따끈한 유자차 한잔이 마음의 빈자리를 메워준다 해도, 짧은 가을에 대한 목마름까지 달래주지는 못한다. 떠날 채비를 하는 늦가을의 흔적은 고흥 곳곳에서 느껴진다. 두원면과 도덕면을 하나로 잇는 고흥만 방조제에 서면 겨울 철새 맞을 준비로 바쁜 고흥호가 드넓게 펼쳐진다. 호수 가장자리에는 누런 갈대밭이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방향을 바꿔 간척지 안으로 들어서면 사방팔방으로 뻗은 황금 들녘이 찬란하다. 사람의 여운이 빠져나간 고요한 바다에는 노랗고 붉은 가을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고흥의 늦가을은 화가 천경자의 작품에도 스며있다. 알려졌다시피 천경자 화백은 고흥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그림을 구상할 때마다 고흥의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어릴 적 형성된 풍부한 감수성이 화가로서의 꿈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때문인지 그의 붓끝에서 내린 물감에는 고흥을 닮은 색이 많다. 고흥의 바다풍경을 시각화한 작품 ‘바다의 찬가(초혼)’는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샛노란 장식들이며 갈대빛깔 머리카락에도 고흥의 색감이 녹아 있다.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길례언니’ 역시 고향에서의 기억을 담은 작품이다. 천경자 화백은 이 인물을 놓고 ‘어린 시절, 노란 원피스를 입고 지나가는 여인의 모습이 너무도 강렬해 화폭에 담은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길례언니는 고향 언니로, 소록도에서 나병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라고 말하기도 했다. 고흥까지 온 이상 천 화백의 흔적 하나쯤은 찾고 싶었다. 하지만 살던 집도, 전시관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래서 소록도로 향했다. 길례언니가 소록도 간호사였는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았다. 소록도는 고흥반도 남서쪽 끄트머리, 녹동항 앞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이다. 섬의 생김새가 어린 사슴을 닮았다고 해서 소록도(小鹿島)라 불린다. 이름만큼 경치도 아름다워 고흥 8경 중 두 번째를 차지하지만, 뭇사람들에겐 한센병(나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더 알려졌다. 녹동항에서 소록도까지는 불과 600m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를 두고도 90여 년간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2009년 소록대교가 놓이면서 이제는 자동차로 쉽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소록대교를 건너 소록도 주차장에 이르면 여기서부터는 걸어야 한다. 그것도 섬 전체가 아니라 중앙공원 등 일부 구역만 돌아볼 수 있다. 더불어 주민이 아니라면 오후 5시에는 섬에서 빠져나와야 하고, 다음날 오전 9시 이전에는 출입할 수 없다. 이는 섬 전체가 한센인들의 치료공간이자 생활공간인 까닭이다. 지금도 소록도에는 한센병 환자와 의료진, 자원봉사자 7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주차장에서 중앙공원 입구까지는 울창한 송림을 따라 들어간다.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걷는 1km 남짓의 산책로가 꽤 호젓하다. 하지만 오래전 이 일대는 눈물이 끊이지 않는 탄식의 장소였다. 솔밭을 경계로 한센인 부모와 그들의 아이들이 한 달에 한 번 눈물로 재회했다. 가운데 길을 중심으로 한쪽에는 부모들이, 다른 한쪽에는 아이들이 줄지어 섰다. 혹여 나균이 전염될 수 있다는 이유로 눈으로만 서로에게 안부를 물었다. 산책로 끝에는 국립소록도병원이 자리했다. 입구에 가로 110m에 달하는 옹벽 벽화가 눈길을 끈다. 소록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표현한 작품이다. 피 흘리는 사슴은 과거를, 주민 530명의 얼굴은 현재를,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사슴은 미래를 상징한다. 병원을 지나 중앙공원으로 향한다. 공원 입구 왼쪽에는 생활자료관이 있다. 이곳에선 소록도의 자연과 역사, 환자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갖가지 자료가 발길을 잡는다. 자료관 앞에는 검시실과 감금실이 있다. 두 곳 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지어진 건물로 인권 유린이 자행된 곳이다. 검시실은 두 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앞방은 사망 환자의 사체 검안을 위한 해부실로 주로 사용되고, 뒷방에서는 한센인의 단종수술(정관수술)이 집행됐다. 건물 안에는 수술대와 검시대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저리게 한다. 철장으로 둘러싸인 감금실 또한 한이 깊게 서린 공간이다. 형무소와 다름없던 그곳에서는 환자들을 가두고, 먹이지 않고, 때리는 등 부당한 가학행위가 벌어졌다. 게다가 출소하는 환자에게는 예외 없이 단종수술을 감행했다. 차가운 철장을 벗어난다 해도 더 잔인한 고통의 감옥이 그들을 기다렸던 것이다. 제법 숙연한 마음으로 감금실을 지나 세탁실로 향했다. 최근 옛 감금실 일부와 세탁실을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꾸민 ‘소록 작은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소록도, 자연 등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공간과 어우러져 묘한 느낌을 풍긴다. 중앙공원은 1940년 완공됐다.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들여온 황금편백나무, 당종려나무, 나한송 등이 잘 가꿔져 있어 잠시 소록도라는 생각을 잊게 한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이내 가슴이 먹먹해진다. 공원이 조성되기까지 강제로 동원된 한센병 환자는 연간 6만여 명.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 돌을 나르고 나무를 다듬은 한센인의 피와 눈물이 곳곳에 흐른다. 소록도의 상징인 구라탑은 중앙공원 중심에 놓여 있다. 천사가 창을 들고 싸우는 모습에 나병을 구제한다는 의미가 담겼다. 탑에 적힌 ‘한센병은 낫는다’ 는 글귀에서 슬픈 결의가 느껴진다. 소록도에 노란 원피스 차림의 ‘길례언니’는 없었지만, 대신 감사를 만났고, 희망을 배웠다. 그냥 그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속상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목에 뭐가 걸려서 안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복잡한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어 거금도로 달렸다. 거금도는 소록도에서 거금대교를 딛고 건너간다. 거금대교는 다리 상판이 2층으로 된 복층 다리다. 상층부는 자동차 전용, 하층부는 자전거나 보행자가 주인공이다. 복층 구조의 다리는 우리나라에 여럿 있지만, 한 층 전체를 다 자전거나 보행자에게 내어준 다리는 거금대교가 처음이다. 유자 빛깔의 늘씬한 거금대교를 건너면 거금대교 휴게소가 나오고, 하늘로 손을 뻗은 사람 모양의 조형물을 만난다. 높이 20m에 달하는 이 거대한 조형물의 이름은 ‘꿈을 품은 거인’이다. 고요히 잠들어 있던 고흥을 마침내 깨어난 거인으로 표현했다. 나로호 발사를 성공시키며 하늘 문을 연 우주항공도시 고흥을 되새기게 한다. 거금도에 도착해 섬을 한 바퀴 도는 해안일주도로에 오른다. ‘작은 제주도’라 불리는 거금도에서는 가다가 마음에 끌려 멈춘 곳이 경승지가 된다. 한갓진 길을 따라 이어지는 남해의 푸른 물결과, 계절이 무색할 만큼 푸릇푸릇한 양파밭, 전복 양식장 사이를 지나는 작은 어선까지, 눈에 담는 장면마다 그림이다. 섬 안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보이는 곳은 오천항 일대다. 이쪽의 바다에는 제법 번성한 어촌마을의 포구와 그 앞에 떠 있는 섬들이 서로 어우러져 그윽한 정취를 빚어낸다. 오천몽돌해변도 들러본다. 바다와 바람이 둥글둥글 다듬어 놓은 몽돌이 해변에 지천이다. 돌의 크기로 보면 몽돌이라기보다는 공룡알에 가깝다. 오천항 위쪽 도로 옆에 조성된 소원동산은 거금도 주민들이 새해 첫해를 보러 가장 많이 찾는 명소다. 팔각정과 전망대가 서 있는 이곳에서는 섬과 섬 사이로 뜨는 일출을 만날 수 있다. 월포마을은 매생이로 유명하다. 겨울에 오면 바다 위에 드리워진 매생이밭을 실컷 볼 수 있다. 지금은 매생이 포자 채묘 작업이 한창이다. 대나무 발을 얕은 바닷가에 깔아 자연 채묘를 한다. 현지에서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풍경이 이방인의 눈엔 마냥 특별하기만 하다. 월포까지 왔다면 매생이 듬뿍 넣고 끓인 칼국수를 놓쳐서는 안 된다. 죽처럼 부드러운 매생이는 입안에 넣고 후물거리면 저절로 녹아 없어져 버린다. 금산면 신평리에 위치한 월포가든은 오로지 매생이로만 떡국과 칼국수를 차려내는 집이다. 달달하고 향긋한 매생이 국물에 마음까지 사르르 녹아내린다. 거금도는 프로레슬러 ‘박치기왕’ 김일의 고향이기도 하다. 1960~70년대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절, 온 국민은 일본 선수를 한방에 때려눕히던 그의 박치기 한 방에 시름을 잊곤 했다. 금산면소재지에 가면 그를 기념하는 체육관이 있다. 큰 볼거리는 없지만, 퍽퍽한 일상에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기 좋다. 김일기념체육관이 자리한 금산면소재지는 시간이 멈춘 듯 나른하고 평온한 마을이다. 주로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 나왔을 법한 조그만 구멍가게와 허름한 미용실, 최근엔 보기 힘든 식육점과 시계방까지, 어쩐지 동네 자체가 거대한 영화 세트장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오래된 동네의 오래된 간판, 그곳의 오래된 이야기를 따라 기웃거리다 보면 의기소침해진 마음의 주름이 조금씩 펴진다. 출처 : 청사초롱 11+12호 글, 사진 : 청사초롱 박은경 기자 ※ 위 정보는 2015년 12월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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