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p 조선 후기는 농경 사회에서 상공업 사회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의 학문이 실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실 문제에 적극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등장한 학문이 실학이다. 18세기 실학의 대가인 다산 정약용의 학문연구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갈수록 정치는 낡고, 경제는 어렵다. 위정이 아닌 위민의 마음을 가진 사람과 차 한 잔 마시고 싶다면... 남도답사 1번지 강진으로 가보자. 강진에는 200여 년 전 오직 백성을 위한 충정으로 평생을 살았던 천재학자 다산 정약용의 아우라가 가득하다. “이런 곳이라면 나도 몇 달 만 유배당했으면 좋겠네.” 동백나무가 늘어서 붉은 꽃을 피우는 오솔길을 지나 다산초당 천일각에 서서 호수 같은 강진만을 마주하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과연 하늘같은 임에게서 버림받고 ‘땅 또는 바다의 끝’으로 유배당한 자들의 삶은 어떠했을지 궁금해진다. 지난날의 영화를 잊지 못한 채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술과 가무로 지내다 끝내 쓸쓸한 생을 마감한 이도 있었겠고, 성총회복(聖寵回復)이 있었으나 더 이상 권좌에 욕심을 내지 않고,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며 마지막까지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어찌하면 더욱 풍요롭게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뇌로 평생을 바친 자도 있었을 터. 감히 짐작건대, 망망대해 고독한 귀양지에서 떠나온 임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그리고 분노는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었던 지극히 진실 된 감정이리라. 그래서일까. 비극의 상황에서도 절망치 않고 수많은 저술로 자신을 멋스럽게 승화시킨 유배자들의 열정은 더욱 빛을 발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 그도 빛나는 열정을 가진 이 중에 하나였다. 학문을 사랑했던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18년 동안 고락을 함께 하였으나 순조가 즉위하자마자 당쟁에 휘말리면서 난신적자(亂臣賊子)로 몰려 경북 장기를 거쳐 강진으로 유배당하였던 다산. 나고 자란 고향은 아니지만 18년의 귀양살이 중 약 10여년을 여기서 보냈기에, 정신적 고향이라 일컬어지는 강진 곳곳에는 그의 흔적들이 산재해있다. 봄이 되면 성숙한 여인의 붉은 순정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동백이 발 길 멈출 곳 없는 나그네 마음에 불을 지피는 백련사의 부도밭 주변의 정취(다산과의 교류가 있었던 혜장선사가 있었던 절)와 다산이 8년 동안 거주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지표’ 등의 불후의 저작들을 만들어내었던 다산초당, 그리고 혜장선사와 다산이 함께 오르며 생각을 정리하고, 삶의 의미를 사색하던 오솔길까지… 잠시 여유를 갖고 찬찬히 다산의 흔적을 더듬어보자. “차를 마시는 백성은 흥하고, 술을 즐겨 마시는 백성은 멸한다.” 다산(茶山)이라는 호에서 알 수 있듯 다산 정약용은 차와 관계가 깊다. 차와의 인연 또한 백련사의 주지스님이었던 혜장선사와의 만남에서 시작된 것이다. 다산이 혜장선사를 처음 만난 것은 강진으로 유배 온 이듬해.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마땅히 교류할 사람을 찾지 못했던 다산은 백련사에 갔다가 혜장선사와 조우하게 된다. 그 당시 혜장선사는 추사 김정희의 스승인 옹방강이 ‘해동의 두보’라고 칭송할 만큼 뛰어난 스님이었고, 불가의 학승이면서도 유교의 경전에 관심이 깊었다. 이런 혜장선사는 다산 정약용에게 용돈도 주고, 귀한 차도 가끔 내려주기도 하였다 한다. 그러다가 다산이 다산초당에 기거, 만덕산 고갯길을 넘는 오솔길을 넘나들면서 본격적으로 교류하게 됐다. 그리고는 차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함께 차를 마시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다산의 다도애(茶道愛)는 더욱 깊어지기 시작했고, 혜장의 유교지식 또한 넓어지기 시작했다. 백련사로 들어가는 언덕길에는 기름진 동백나무의 진초록 잎사귀 사이에 붉은 꽃이 나무에 불을 피우듯 송이송이 피어있다. 더욱 흐드러지게 핀 동백꽃을 감상하려면 곧장 절 내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백련사 부도밭 주변으로 가보는 것이 좋다. 이 곳 백련사의 동백은 초봄인 3, 4월경에 꽃을 피우며 집단으로 군락을 이뤄 자생하고 있는 희귀식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 백련사는 ‘남쪽바다에 임해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며 동백 또한 곁들여져 정취가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아름답다. 허니 이 시기에 찾는 이들은 동백꽃불에 휩싸인 산사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을 얻을 수 있다. 동백나무의 조화에 취하다 보면 어느새 백련사에 이른다. 신라 말에 창건된 백련사는 고려 명종 때 80여 칸으로 중창되었고, 고려 후기에 8명의 국사를 배출할 정도로 융성했다. 현재는 대웅전, 응진당, 명부전, 칠성각, 요사채 등의 건물이 남아있다. 백련사 안에는 ‘백련다원’이라는 찻집이 있다. 산사의 참 맛을 아는 이라면 이곳에서 ‘차’ 한잔 마시고 가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 잠시 눈을 감고 그윽한 차향을 음미해보자. 머리를 어지럽히던 생각들을 하나하나 추슬러보는 여유도 생기고, 200여 년 전 다산의 생활도 상상케 된다. 다시 길을 떠나자. 다산이 10여 년 동안 머물렀던 다산초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백련사 주차장으로 가 차로 이동해 다산초당 주차장에서 다시 가파른 고갯길로 올라가는 방법이 있지만, 진정 다산의 흔적을 더듬고자 한다면, 다산과 혜장선사가 교유를 위해 걸었을 숲 속 오솔길을 따라 가는 것이 좋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오솔길은 약 800m, 성인의 걸음으로 40분이면 당도할 거리다. 붉은 동백꽃의 물결과 산새의 지저귐, 대나무숲 소리 들으며 걷노라면 휘파람이 절로 나온다. 홀로 사색하며 걷기에 더 없이 좋은 길인 셈.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힐 때쯤 다산초당에 이르게 된다. 초당은 다산이 유배기간 중 10년 동안 생활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한 곳이다. 이곳에는 동암, 다산초당, 서암, 천일각 등의 건물과 다산사경이라고 불리는 정석,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들의 유적들이 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동암의 현판에 판각된 글씨인 ‘다산동암’은 다산 정약용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 아래편 우측에 있는 건물은 서암으로 다산의 제자들이 기거했던 곳이며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했다고 하여 일명 ‘다성각’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다산초당의 현판을 바라보니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눈길을 휘어잡는다. 원래 다산이 유배시절에 머물던 초당은 말 그대로 초가집이었으나 노후로 붕괴되었던 것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1957년 복원한 것이다. 다산초당에는 다산선생의 채취가 남아있는 다산 4경이 있는데, 초당 뒤쪽 다산선생 직접 병풍바위에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직접 수맥을 찾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이 그것이다. 특히나 연못주변에는 백일홍과 대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하게 한다. 다산초당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곳은 천일각이다. 바로 다산이 천주교 박해로 멀리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며 바라보았던 곳이다. 뜨거운 인간애를 가진 다산이 훗날 정약전의 부음을 듣고 이 곳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지는 충분히 짐작 되고도 남는다. 그것도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면서 깊은 슬픔을 토해내는 그 아이러니한 상황이 참으로 가슴을 적신다. 가만히 신발을 벗고 정자에 오른다. 눈앞으로 펼쳐지는 강진만의 풍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잔잔한 바다 위 점점이 떠있는 작은 섬들…. 날씨가 좋으면 멀리 완도 쪽 다도해가 한 눈에 들어오기도 한단다. 다산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이번 기행의 ‘유종의 미’는 다산유물전시관에서 거두는 것이 좋겠다. 다산유물전시관은 다산초당 남쪽으로 약 800미터 지점에 위치해있는데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을 전시하고 있다. 오늘, 다산의 마음이 그립다. 4월의 봄, 참 어렵다. 온통 어려운 일뿐이다. 변화 없이 자꾸 반복되는 낡은 정치도 그렇고, 갈수록 꼬여만 가는 서민 경제는 더욱 그렇다. 세상이 이처럼 어지러울 때면 나도 모르게 다산을 찾게 된다. 진정 백성을 위하는 충정, 위민(爲民)의 마음이 그리워짐 때문이리라. 따뜻한 봄 햇살의 배웅을 받으며 내려가는 길, 문득 우리가 몸담고 있는 대한민국에는 ‘다산과 같은 마음을 지닌 위정자들이 과연 몇 분이나 계실까’ 궁금해졌다. 강진은 먹는 즐거움이 있어 여행의 매력이 배가 되는 곳이다. 기름진 강진평야와 청정한 강진만에서 나오는 해물과 나물들이 남도 아낙네의 손맛으로 버무려진 남도한정식은 강진 기행에서 절대로 빠뜨려서는 안 될 아주 특별한 음식이다. 전어무침, 해삼, 개불, 광어, 게, 굴, 새우, 전복, 가오리찜, 홍어, 민어찜, 조기탕, 토하젓, 바지락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만큼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나오니, 남도한정식을 먹기로 다짐했다면, 전날 밤 배는 쏴~악 비워두는 것이 좋겠다. 월출산의 천황봉과 구정봉을 좌우로 두고 남쪽에 자리한 천년고찰. 국보로 지정된 무위사의 극락보전 내부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이 벽화는 성종 7년에 그려진 것으로 조선시대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아미타삼존불은 4각의 연화대좌에 결가부좌를 하고 관음과 지장보살을 협시한 불화로써 지장보살이 표현된 매우 희귀한 예술품이다. 영랑 김윤식 선생은 ‘모란이 피기까지’로 유명한 시인이다. 영랑생가의 안채는 일부 구조가 변형되고 시멘트 기와로 변형되어 있던 것을 군에서 초가로 복원하였으며 큰 방은 선생의 부친이 거처하였던 방이고 좌측의 중마루가 있는 작은 방은 영랑 선생이 결혼 후 거처하였던 방이다. 영랑생가에서 시인이 쓴 시비석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재미. 마량항포구는 바다와 함께 사는 사람들의 삶의 의욕과 도심을 떠나온 강태공의 여유로움이 어우러진 곳이다. 유서 깊은 마도진이 있고, 까막섬이 수묵화처럼 떠 있으며 고금도와 약산도가 든든하게 풍랑을 막아주는 마량포구는 천혜의 미항. 특히 까막섬은 열대성 난대림 120여종이 빽빽이 우거져 희귀식물의 보고로 통한다. 이 두 개의 섬은 마량항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빼어난 구도를 연출한다. 무위사 -주소 :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무위사로 308 -문의 : 061-432-4974 http://www.muwisa.com/ 영랑생가 -주소 :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영량생가길 15 -문의 : 061-430-3185 마량항 -주소 : 전라남도 강진군 마량면 마량리 987 -문의 : 061-430-3265 ※ 위 정보는 2016년 9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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