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5곳. 그중 낯선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산성지구의 명활성이다. 남산, 월성, 대릉원, 황룡사지구는 너무도 친숙한 곳이기에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그런데 명활성은 느낌이 다르다. ‘여긴 어디지?’, ‘경주에 이런 곳도 있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모르고 있었으니 명활성이 어떻게 생겼는지,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알 턱이 없다. 명활성을 찾아가는 길은 의외로 쉽다. 시내에서 보문단지로 가다가 보문호 앞 삼거리에서 감포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바로 명활성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에서 산성까지는 100여 m. 여느 관광지와 달리 관광안내소도, 주차장도 없다. 더구나 명활성 복원을 위한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라 주변이 산만하고 어지럽다. 찾는 여행객도 거의 없는 곳이라 언제나 조용하기만 하다. 눈앞에 드러난 명활성은 잘 정돈된 모습이다. 다듬지 않은 돌을 차곡차곡 쌓은 것이 꽤 단단해 보인다. 약 50m만 복원해놓은 탓에 너무 짧은 느낌도 강하다. 본래 명활산 골짜기를 감싸며 쌓은 산성의 길이는 6km에 달한다고 한다. 대부분 성벽이 무너져 흙에 덮여 있어 산성다운 위엄은 볼 수 없다. 몇 군데에만 옛 모습이 남아 있는데, 발굴장 뒤로 이어진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산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정도 능선에 오르면 ‘이것이 산성이구나!’ 하고 알 수 있을 만한 성벽이 나온다. 산성 아래로는 보문단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산성을 밟고 올라서니 ‘왜 여기에 산성을 쌓았을까?’, ‘명활성이 중요한 곳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안타깝게도 명활성을 언제 쌓았는지는 알 수 없다. 신라 제18대 실성왕 4년(405) 명활성에 침입한 왜적을 물리쳤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쌓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토성과 석성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흙으로 성을 쌓았다가 후대에 돌로 쌓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해 신라 초기의 산성임을 말해준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바다에서는 왜적이 호시탐탐 노략질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황에서 전국에 산성을 축조했다. 그중에는 경주를 보호하기 위한 산성도 여럿 있다. 경주의 동쪽 관문에 쌓은 명활성은 남산성, 선도산성, 북형산성, 부산성 등과 함께 수도를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명활성이 경주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명활성의 중요성은 역사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 ‘명활전’이라는 것이 보이는데, 이는 명활성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추정된다. 관청을 두어 관리할 만큼 명활성이 중요했음을 알려주는 단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도 많다. 제19대 눌지왕 15년(431)에는 왜적이 이곳을 포위하고 점령하려 했다. 제20대 자비왕 16년(473)에는 산성을 고쳐 쌓았다. 이는 자비왕 2년(459) 7월에 동해안에 침입한 왜적이 경주까지 쳐 들어와 월성을 포위한 적이 있었기에 수도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18년(475)부터 제21대 소지왕 10년(288)까지 왕이 명활성으로 들어가 거주했다. 당시는 삼국 중 고구려가 가장 번성한 때다.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백제의 개로왕이 아차성에서 죽고 백제는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했다. 신라도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죽령과 동해안을 통해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종합해보면 자비왕이 명활성으로 들어간 것은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명활성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으로 ‘비담의 난’을 꼽을 수 있다. 비담은 TV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 존재감을 알린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출생연도, 부모 등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다만 선덕여왕 14년(645)에 화백회의 수장인 상대등에 올랐으며, 647년에 선덕여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10일 만에 진압당해 구족이 멸문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을 뿐이다. 상대등이 된 비담은 정치 주도권을 놓고 김춘추, 김유신과 경쟁했다. 세력이 밀리자 선덕여왕의 실정을 이유로 염종 등 진골 귀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지만, 그 이면에는 중앙집권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려는 왕실과 자신들의 위치를 불안하게 여긴 귀족 간 힘의 논리가 작용했다. 반란을 일으킨 비담은 명활성에 웅거하고, 김유신이 지휘하는 왕군은 월성에 집결해서 10여 일 동안 공방을 벌였다. 승부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월성에 큰 별이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비담은 선덕여왕이 패전할 조짐이라며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이에 김유신은 율동의 성부산에서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뒤 연에 매달아 하늘로 띄웠다. 그리고 사람들을 시켜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독려했다. 그 뒤 김유신은 난을 진압하고 비담을 잡아 구족을 멸했다. 비담의 난 이후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 세력은 점차 후퇴하고,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등극하면서 강력한 신라는 중앙집권체제를 성립했다. 명활성과 관련한 유물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높이 66.8cm, 두께 16.5cm의 직사각형으로 된 명활산성작성비다. 1988년 8월, 명활성 내에서 포도농사를 짓던 농부가 성벽의 일부가 빗물에 드러나면서 모습을 보인 비석을 발견했다. 비의 전면에 9행, 148자로 된 글이 적혀 있다. 명활성을 쌓을 당시의 기록이다. 내용은 작성 간지가 있는 서두, 축조 공사 총책임자의 인명, 축성 공사 실무자의 인명 및 담당 거리, 공사 담당 위치, 작성 참가자의 수, 공사기간, 글쓴이의 인명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비문을 통해 신라 진흥왕 때 관직과 직명을 비롯해 1개 집단 안에 3개의 분단으로 편제된 역 동원 체제를 이해할 수 있다. 경주 명활성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문의 : 054-779-6109 주변 음식점 -숙영식당 : 보리밥 /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60 / 054-772-3369 -삼포쌈밥 : 쌈밥 /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90-2 / 054-749-5776 숙소 -신라부티크호텔 : 경상북도 경주시 강변로 200 황실예식장 / 054-745-3500 -숨게스트하우스 : 경상북도 경주시 북정로 66-1 / 054-742-0220 http://gyeongju.sumhostel.com/index.php -라궁 : 경상북도 경주시 엑스포로 55-12 / 054-778-2100 -베니키아 스위스로젠호텔 :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로 465-37 / 054-748-4848 -힐튼호텔 :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로 484-7 / 054-745-7788 http://www.hiltongyeongju.co.kr/html/main/ -호텔현대 경주 :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로 338 / 054-748-2233 http://www.hyundaihotel.com/home/ 글, 사진 : 오주환(여행작가) ※ 위 정보는 2019년 3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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