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p 1876년 이루어진 강화도 조약으로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문호가 개방되면서 개항이 시작되었다.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지만 조선에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은 앞 다투어 개항장인 인천을 거점으로 각종 이권을 손아귀에 쥐려 하였고 팔미도는 그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일본은 팔미도 등대 건설을 강권하였고 정부는 1903년 팔미도 등대를 완공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생생한 현장을 느껴보자. 서럽도록 외롭고 시리도록 쓸쓸한 서해안의 작은 등대섬 팔미도. 붉은 석양이 스러지고 난 밤바다에 암회색 커튼 같은 어둠이 쳐진다. 하나둘 찬별이 아롱지고, 발 아래에는 한 척 어선만이 아득한 수평선을 흐른다. 어둠의 장막을 뚫고 일순 한줌의 빛이 비치더니 밤길 떠나는 배의 바닷길을 이끌어준다. 어두운 밤바다 홀로 밝혀온 팔미도 등대에게는 오직 별과 바람, 파도가 전부였다. 일제의 강제에 의해 등대가 만들어진 후 군인과 등대지기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6년간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이었던 팔미도 등대가 일반인에게 개방된 것은 지난 2009년 1월 1일. 1903년, 처음으로 불을 밝힌 이래 꼬박 한 세기 동안 우리 민족의 질곡과 환희의 역사를 증언해온 팔미도 등대의 ‘106년간의 기억’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바닷가 모래 퇴적층으로 연결된 두 개의 섬이 마치 여덟 팔 자처럼 양쪽으로 뻗어 내린 꼬리와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팔미도. 한 때 인천사람들에게 팔미도는 팔미귀선(八尾歸船), 즉 낙조에 팔미도를 돌아드는 범선의 자취가 아름다워 인천팔경의 하나로 손꼽혔던 해상 경승지였다. 그리고 또 하나. 팔미도 그 꼭대기에는 파란만장했던 한국근대사를 지켜본 ‘최초의 근대식 등대’인 팔미도 등대가 있다. 이 등대에게 늘 따라붙는 ‘최초’라는 수식어 배경에는 감추고 싶은 슬픈 그늘이 있다. 바로 1903년 일제강점기 시절 군사적 필요에 의한 일본의 강권에 의해 만들어진 등대라는 것이다. 일본은 팔미도를 서울 진출의 필수 거점으로 삼아 등대를 설치하고 한반도 침탈에 나섰던 것. 물론 뼈아픈 역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불을 밝힌 팔미도 등대는 6.25 당시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인천상륙작전에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한마디로 팔미도 등대는 우리 민족의 빛과 그늘을 함께 해 온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09년 1월 1일, 한국전쟁 이후 해상경계를 위해 주둔한 군인과 등대지기 외에 민간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었던 팔미도 등대의 문이 열렸다. ‘2009년 인천방문의 해’를 맞아 인천시가 106년간 잊혀져 있던 작은 섬 팔미도 관광을 허용한 것이다. 팔미도를 가기 위해서는 연안부두에서 팔미도행 유람선을 타야 한다. 부두를 출발해 인천대교를 거쳐 팔미도까지는 왕복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송도와 영종도를 잇는 인천대교는 총 길이 21.3Km에 달하는 국내에서 가장 크고 긴 다리이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구조물의 웅장함으로 보는 이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여성의 각선미를 연상시키는 모양도 꽤 이색적이다. 팔미도 등대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지 않다. 뱃길을 따라 50여분쯤 달리다 보면 아스라이 하얀 팔미도 등대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배에서 내려 담쟁이 넝쿨이 보듬고 있는 숲을 따라 가파른 등대 길을 오르다 보면 처음으로 만나는 것은 팔미도 등대 건립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천년의 빛 광장’ 조형물이다. 이곳에서 펼쳐지는 낙조의 풍경은 한 폭의 수채와 같다고들 한다. 조금 더 오르면 옛 등대사무실인 해군 팔미교회가 있다. 드디어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팔미도 등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모두 2개의 등대가 있는데, 먼저 보이는 것이 꼭 100년을 채우고 은퇴한 팔미도 등대이고, 뒤에 있는 것이 위성항법시스템까지 감춘 새로운 첨단 등대다. 등대 옆쪽으로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장군의 부조상이 새겨진 기념석도 있다. “맥아더가 민족의 원흉이라니, 또는 영웅이라니 사실 그 동안 말이 많았잖아요. 그런 논쟁과는 상관없이 어찌됐건 인천은 맥아더 그 양반이랑 떼려야 뗄 수가 없죠. 구석구석 그 흔적들이 남아있으니 말이요. 그 중에서도 팔미도는 국가적으로 봤을 때도 대단히 상징성이 있는 곳이지요. 헌데 중요한 군사요충지라 그 동안 못 들어오게 했잖아요. 역사적 의미를 떠나서 106년 동안 사람 손이 타지 않아서인지 원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인 것이 참 아름답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진기라도 가지고 올 걸…” 서울에서 왔다는 김병례 할아버지(73세)는 아쉬운 듯 계속 핸드폰만 만지작거린다. 새로 만들어진 등대는 모두 4층으로 등대 홍보관과 전망대까지 갖춰져 있다. 맥아더 장군 기념석이 있는 곳을 지나 등대 홍보관으로 들어가면 인천 상륙작전을 생생한 영상과 디오라마로 재연한 모습을 볼 수 있다. 3층은 항로표지 역사관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등대와 항로표지의 역사와 발달사를 전시한 공간으로 첨단 그래픽패널과 전자북 등 흥미 있게 체험학습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4층 팔미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하늘정원 전망대에서 맛보는 풍광은 가히 사람들을 압도시키기에 충분하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북동쪽으로는 인천항과 인천대교, 그리고 송도신도시가, 남서쪽으로는 영흥대교, 영흥도, 자월도가, 북서쪽으로는 무의도와 인천공항이 또렷이 보인다. 일제의 필요와 강압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우리나라를 지키는데 큰 공을 세웠던 팔미도 등대. 1903년 처음으로 불을 밝힌 후 시대의 아픔을 멍에처럼 덮어쓰고 서 있던 팔미도 등대는 모든 임무를 마치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그 ‘불빛’은 이제 새로운 등대에게로 넘겨졌다. 새로운 등대에는 더 이상 ‘슬픔’이 아닌 영원한 ‘희망’의 빛이 밝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방에 누우면 밤하늘의 별과 달이 보일 만큼 가장 높은 곳에 살지만 가장 낮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흔히들 달동네라 부른다. 금세 허물어질 듯 차곡차곡 집이 쌓인 달동네에는 여느 부잣집마냥 문과 담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우리 집은 이웃집 담이 되고, 자연스레 그 담은 다시 모두가 이용하는 골목이었다. 달동네에서는 서로 남의 집을 오가며 밥을 먹는 경우가 흔하고, 수제비를 끓이다 이웃사람이 오면 물 조금 더 붓고 수저 하나 더 놓으면 그만이었다. 작은 것 하나부터 기쁨에, 그리고 고통까지 함께 나누며 살아갔던 곳이 바로 우리 시대 달동네였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공원 등 도심개발로 잊혀가는 달동네의 숨겨진 이야기를 담은 박물관이 있다. 전국에서 단 하나뿐인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이 바로 그곳이다. 1960~70년대 실제로 인천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던 ‘수도국산’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송림산 꼭대기에 수도국이 세워지면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개항기 이후 일본인들이 중구 전동 지역에 살게 되자 그곳에 살던 주민들이 쫓겨와 둥지를 튼 후 수도국산은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된 것. 이어 6.25전쟁을 겪으면서 생겨난 피난민들과 1960년대에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로 전형적인 달동네가 탄생되었다. 캬랴멜, 이발소 등 달동네 박물관에는 그때 그 시절의 추억들이 그대로 담겨있다. 300평 규모의 달동네 박물관은 달동네의 옛 정취가 서린 물품과 작품들로 가득하다. 입구에서부터 달동네 당시의 판자촌, 공동화장실, 구멍가게, 연탄가게, 솜틀집, 이발소 등의 가게들이 실제와 똑같이 재현되어있다. 특히 맨 처음 맞이하는 솜틀집은 3대째 운영되던 은율솜틀집의 주인의 물건을 들여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맞은 편 송현상회는 어릴 적 먹었던 캬라멜과 쫀득이 등 ‘진짜 옛날 먹을 것’들이 즐비하다. 마치 달동네의 어둑한 거리를 비추던 흐릿한 보안등마냥 켜진 조명도 옛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상가들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달동네 집들을 볼 수 있다. 좁디좁은 골목골목, 담도 없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작은 방들은 힘겨운 삶을 살았을 달동네 사람들의 설움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누런 신문지를 덕지덕지 바른 방안, 손때가 묻어 반질거리는 장롱 등 어느 것 하나 ‘그때 그 시절’ 아닌 것이 없다. 이따금씩 개 짖는 소리와 고양이 우는 소리, 다듬이 소리, 통금시간을 알리는 딱딱이 소리도 들려 온다. 담과 벽에는 ‘오늘은 쥐 잡는 날’. ‘북괴남침 예고 없다 총력안보’ 등 정부의 대국민 홍보물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다른 담벼락에는 그 시절 영화계를 주름잡던 여배우들의 포스터로 도배가 되어 있다. 체험거리도 다양하다. 새벽녘 고된 몸을 일으켜 가족들을 위해 연탄을 갈았을 우리 어머님의 삶을 반추해 보는 ‘연탄불 갈기’ 체험과 여고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는 ‘교복 입어보기’ 체험도 있다. 추억을 파는 기념품 판매소에는 달고나 뽑기에서부터 못난이 삼형제, 12연방 고무줄 총까지 추억이 생각나게 하는 물건들로 가득하다.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은 요즘 아이들에게는 교과서에서나 봄직한 달동네의 풍경의 보며 힘겹게 살았을 부모님의 삶을 간접경험 해 볼 수 있는 공간이, 머리 희끗희끗한 나이의 어른들에게는 기억 속에서 잊혀가던 유년시절의 향수를 회상케 해주기는 추억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온 나라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잘 살아보자고 땀 흘렸던 그 때 그 시절. 오늘날 그 시대의 생활상을 경험한 세대와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함께 어울러 살고 있다. 이곳에서 어려운 시절, 일상의 손때가 묻어있는 생활용품을 보며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가 서로 묻고 답하며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 팔미도 등대 - 주소 : 인천광역시 중구 팔미로 15 - 문의 : 032-885-0001 달동네박물관 - 주소 : 인천광역시 동구 솔빛로 51 - 문의 : 032-770-6130 ※ 위 정보는 2016년 9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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