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수
본문 내용
온전한 가을의 정취을 느끼려 무량사 를 찾았다. 소설 쓰는 윤대녕은 무량사를 ‘계절이 침몰하는 장지(葬地)’라 했다. 이 잎 다 떨어지면 한 해가 간다는 안타까움이 일으킨 연상이리라. 하지만 금빛보다 풍요로운 들녘의 가을색이 어설픈 애처로움 따위는 한순간에 삼켜버린다. 조선의 풍운아이자 천재 시인이었던 김시습이 말년을 보낸 부여 무량사에서 지나온 계절을 묻을 수 있을까…. 무량사는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절집 군데군데에 아직 지난 여름의 왕성함도 남아 있다. 매표소를 지나니 곧 일주문이다. 일주문 이마에 ‘만수산무량사’라는 현판이 커다랗다.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의 ‘무량(無量)’과 만년(萬年)을 누린다는 산 이름 ‘만수(萬壽)’가 조화롭다. 무량사는 통일신라 문성왕(재위 839~857) 때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거의 모든 사찰과 건축 문화재가 그렇듯, 무량사 역시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없어졌다가 1623년(인조 1)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작은 계곡을 지나 천왕문에 닿자 우측으로 잘생긴 당간지주 하나가 방문객을 맞는다. 당간지주란 절의 깃발을 매달아놓았던 길쭉한 장대, 즉 당간(幢竿)을 좌우에서 지탱했던 지주석을 말한다. 여기서부터 절의 경내가 시작된다는 일종의 표식이다. 천왕문에 오르자 천왕문의 사각 프레임 안에 무량사 석등과 오층석탑, 그 너머로 극락전이 겹쳐 들어온다. 너무나 안정적인 앵글이다.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들어올릴 법한 구도다. 그런데 이 멋진 전망을 디자인한 설계자는 절의 중심부인 극락전을 100% 노출시키지 않았다. 극락전 지붕을 소나무와 느티나무 가지로 살짝 가려놓았다. 나뭇가지를 피해 사진을 찍으려고 앉았다 섰다, 이리저리 자리도 바꿔보지만 소용없다. 그러기를 1분 남짓? 아! 부처님의 처소를 살포시 가려주는 고수의 멋진 한 수였음을 깨닫는다. 저 나뭇가지가 없었다면 과연 극락전이 뻥 뚫려 시원해 보였을까? 오히려 저 나뭇가지로 인해 극락전의 은밀한 멋이 더해졌음을 알게 된다. 극락전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지붕을 가렸던 소나무에 이르자 비로소 석등과 오층석탑, 극락전이 한눈에 잡힌다. 무량사의 석등, 오층석탑, 극락전은 모두 국가가 지정한 보물급 문화재다. 문화재라는 것이 아는 만큼 보이는 거라지만 안내판을 가득 채운 문화재의 이력과 미술사적 지식은 이 가을 이 절집을 감상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일부러 자세히 다가가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일어난 지식의 먼지가 끈끈한 감정의 표면에 앉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저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세 보물을 바라본다. 큰 시야에서 보니 땅에서 시작된 시선이 석등과 석탑 꼭대기를 지나 극락전 용마루로 이어지는 상승감을 일으킨다. 거기에 심각한 파손과 손상 없이 오백년, 천년을 이어온 역사성이 절집의 품위를 더하고 있다. 극락전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아본다. 극락전의 우람한 체구를 받치고 있는 기둥들의 배가 유난히 불룩하다. 흔히 말하는 배흘림기둥이다. 외관은 2층으로 보이지만 극락전 내부는 층을 나누지 않은 통층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2층을 실제 사용하기 위함이 아닌, 건물의 격식과 위엄을 나타내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극락전 뒤뜰을 돌아 건물 우측 담장 앞에 있는 단풍나무 아래에 선다. 오후 느지막이 무량사에 온 것은 행운이다. 해는 만수산 서쪽 자락을 향하기 시작했고, 따사로운 가을 오후의 볕이 경내를 넉넉히 비치고 있다. 단풍나무 아래에서 단풍잎으로 역광을 가리고 셔터를 누르니 가을빛이 풍성하게 표현된 좋은 사진이 나온다. '사진은 발로 찍는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때마침 스님도 한 분 지나간다. 무량사에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하나 있다. 늘 풍운아, 천재 작가, 신동 등의 별칭과 함께 소개되는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다. 극락전을 지나 왼쪽으로 작은 개천을 건너면 영정각 안에 김시습의 초상화가 있다.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인정하지 않고 평생 승려와 처사로 살았다. 21세 때 속세를 떠나 전국을 유랑하다가 만년에 이곳 무량사로 들어와 59세에 입적했다. 영정각 안 김시습의 초상화를 살펴본다. 영정은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렬한 원색의 불화와는 표현 기법이 다르다. 관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조선 사대부의 초상화와도 다르다. 영정 속 김시습은 두 손을 소매 안에 가지런히 모았으나 미간을 찌푸린 채 인상을 쓰고 있다. 그래서 많은 평론가들이 세상에 불만을 품은 저항지식인의 풍모를 잘 담아냈다고 평하곤 한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스물한 살 되던 해에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읽던 책을 모두 불태우고 속세를 떠나 승려가 되었고, 그 타고난 천재성과 품은 뜻을 펴보지 못하고 평생을 떠돌다가 절집에서 죽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김시습의 삶은 불운과 비장함, 사회에 대한 날선 비판으로만 가득차 있지는 않다. 그는 속세를 떠나 관동, 호남 등을 유람하며 풍광을 즐기고 시를 지었다. 30대에는 경주 금오산, 즉 지금의 경주 남산에서 6년 동안 칩거하며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그 몰입의 결과물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평가받는 《금오신화》다. 김시습은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우한 천재였을까? 아니면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을까? 결국 그의 방랑을 권력과 주류로부터의 소외로 보느냐, 아니면 자유로운 삶의 의지로 보느냐의 문제로 귀착된다. 그 쉽지 않은 문제에 작은 힌트를 드린다. 김시습은 《매월당집》 서문에 방랑의 동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 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경내를 둘러본 뒤 더 깊은 가을 산책을 위해 다시 일주문 쪽으로 향한다. 일주문에 닿기 전 좌측으로 태조암, 도솔암 가는 길로 빠진다. 넓은 개활지를 지나니 좌측으로 포장이 잘 된 길이 이어진다. 길은 태조암까지 1.2km 정도 계속된다. 길에 들어서자 얼마 안 돼 좌측으로 옛 무량사 터가 나온다. 지금은 억새와 잡초, 관목으로 뒤덮여 있지만 2000년에 발굴한 결과 건물의 기단과 주춧돌, ‘무량사’라 찍혀 있는 명문기와 등이 나와 이곳이 원래 무량사 자리였음이 확인되었다. 다시 길을 간다. 이내 도솔암을 지나 태조암에 닿는다. 태조암에 이르는 동안 2개의 화장실과 벤치만 띄엄띄엄 놓여 있을 뿐 오가는 사람은 없다. 이 길에는 까치도 없는지 잎이 다 떨어진 감나무에 붉은 감만이 탐스럽게 달려 있다. 조용한 산책로를 독차지할 수 있는, 시시하지만 담백한 길이다. 태조암 우측으로 텃밭을 지나면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만수산 등산을 계획했다면 태조암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된다. 태조암을 돌아나와 사찰 밖으로 완전히 나간다. 주차장으로 가기 전 볼 것이 하나 더 있다. 떠나가려는 방문객에게 무량사는 김시습의 부도를 떡하니 내어놓는다. 승려의 사리를 안장한 묘탑인 부도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고승을 많이 배출했다는 의미로 사찰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식당가 초입 무진암으로 가는 길에 무량사 부도군이 있다. 여러 부도 중 김시습의 부도가 가장 우뚝하다. 크기와 생김 모두 완성도가 가장 높다. 김시습의 부도는 2중 기단으로 되어 있다. 연꽃 모양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두 번째 기단의 가운뎃돌(중대석) 표면에 용무늬가 선명하다. 조선 전기의 석재 유물치고는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다. 그럼 이곳에 정말 김시습의 사리가 있는 걸까? 일제강점기 태풍이 크게 불어 주변 나무가 쓰러졌는데, 그때 부도도 함께 쓰러지며 그 밑에 있던 김시습의 사리가 발견되었다. 김시습의 사리는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무량사 주소 : 충남 부여군 외산면 무량로 203 문의 : 무량사 종무소 041-836-5067 주변 음식점 백제의 집 : 연잎밥, 마밥 / 부여군 부여읍 흑천로8번길 22 / 041-834-1212 장원막국수 : 막국수 / 부여군 부여읍 나루터로62번길 20 / 041-835-6561 구드래돌쌈밥 : 돌쌈밥 / 부여군 부여읍 나루터로 31 / 041-836-9259 숙소 롯데리조트부여 : 부여군 규암면 백제문로 400 / 041-939-1000 백제관광호텔 : 부여군 부여읍 북포로 108 / 041-835-0870 삼정부여유스호스텔 : 부여군 부여읍 나루터로 50 / 041-835-3101 글, 사진 : 이병유(여행작가) ※ 위 정보는 2020년 9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조회수

연관정보

        해당 여행기사에서 소개된 여행지들이 마음에 드시나요?

        평가를 해주시면 개인화 추천 시 활용하여 최적의 여행지를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여행톡

        여행톡

        등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벤트 정보입력 및 이벤트 참여 동의

        이벤트 개인정보 수집 · 활용 및 위탁동의

        이벤트 당첨 안내 및 경품 수령을 위한 개인정보 수집 및 활용에 대한 동의 입니다.
        관련 정보는 당첨자 발표일 기준 3개월간 유지되며, 이후 폐기 처리됩니다.

        개인정보 입력 및 수집 이용 (필수)
        • 주소
        • ※ 실물경품 당첨 시 해당 주소로 배송되므로 정확하게 기입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입력으로 인한 당첨 불이익 (경품 미수령, 오배송 등)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개인정보 수집 활용에 관한 동의 (필수)

        한국관광공사는 이벤트 당첨자 선발 및 안내를 위해 이벤트 참여자의 개인 정보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참여자의 사전 동의 없이는 개인 정보를 절대로 공개하지 않습니다.

        • 수집 목적 : 이벤트 참여 및 경품 발송
        • 수집 항목 : 이름, 휴대폰 번호
        • 보유 및 이용 기간
          • - 이벤트 참가자 개인 정보 보유, 이용 기간 : 개인 정보 수집, 동의 일로부터 이벤트 종료 시점까지
          • - 이벤트 당첨자 개인 정보 보유, 이용 기간 : 당첨자 발표일 기준 3개월까지 보유 / 경품 배송 완료일까지 이용
        • 개인 정보 파기절차 및 방법

          이용자의 개인 정보는 원칙적으로 개인 정보의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되면 지체 없이 파기합니다.
          회사의 개인 정보 파기 절차 및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 (1) 파기절차
          • - 이용자의 개인 정보는 목적이 달성된 후 즉시 파기됩니다.
        • (2) 파기방법
          • - 종이에 출력된 개인 정보는 분쇄기로 분쇄하거나 소각을 통하여 파기합니다.
          • - 전자적 파일 형태로 저장된 개인 정보는 기록을 재생할 수 없는 기술적 방법을 사용하여 삭제합니다.
        • 개인 정보의 취급 위탁

          회사는 이벤트 경품 제공과 관련하여 원활한 업무 수행을 위해 이용자의 개인 정보를 타 업체에 위탁하여 처리할 수 있으며, 위 처리는 이용자가 동의한 개인 정보의 이용 목적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고 행사 종료 시 일괄 폐기하도록 합니다.

        • - 이벤트 진행 : (주) 유니에스아이엔씨
        • - 이벤트 경품 발송 : ㈜ 티사이언티픽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동의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