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p 조선은 제4대 임금인 세종대에 이르러 문화와 과학 기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세종은 밖으로는 명, 일본, 여진 등과 적절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고 안으로는 훈민정음 창제, 측우기와 같은 과학 기구 제작 등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문화와 과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태종대에서 이어받은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며 가장 훌륭한 글자다. 세계 어떤 나라의 문자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과학적인 표기체계요,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다.」 영어도 아니고 한자도 아니다. 바로 우리가 매일 듣고 쓰고 말하는 한글 얘기다.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며 배우기 쉽고 편리하여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한글. 한글의 소중함을 아로새기는 '한글여행'이 지금 시작된다. 작년 9월, 인도네시아의 작은 부톤 섬의 찌아찌아족은 사라져가는 토속어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언어를 한글로 채택했다. 일찍이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는 한글을 ‘자음 모음을 조합하면 인간의 목청에서 나오는 어떠한 소리도 정확하게 표현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가르켜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고 극찬했다. 찌아찌아족의 선택, 펄벅 여사의 극찬에는 단순한 이유가 있다. 한글이 배우기 쉽기 때문이다. 무한대의 표현력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 쓰는 음성, 문자의 수단’으로 의미되는 ‘언어’의 사전적 정의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허나 다른 민족이 한글을 쓰는 모습엔 ‘반색’ 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태도는 오히려 역주행 중이다. 한글에 외국어, 혹은 외래어를 적당히 버무려 말해야 교양을 겸비한 마냥 말이다. 그뿐인가. 세계에서 가장 편한 한글을 물려주었더니, 범람하는 신조어들로 한글을 파괴하기에 바쁘다. 우스갯소리로 한글 접두어는 나쁜 의미, 영어 접두어는 좋은 의미로 사용된다지 않는가. 이를테면, ‘왕짜증’ ‘킹왕짱’처럼. 이것은 푸대접이다. 겉으론 자랑하곤 속으론 푸대접하고 있단 의미다. 익숙함과 무관심이 푸대접을 낳진 않았을까 생각해볼 필요도 있을 듯싶다. 이참에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 한글을 찾아 문화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알면 사랑하게 된다지 않나. 그렇게 조금씩 알아가고, 사랑하고, 자랑하자. ‘한글여행’ 의 시작은 세종대왕이다. 세대를 넘어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칭송 받는 세종대왕은 1397년 5월 15일 조선 3대 임금인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그는 지극한 애민정신과 민본사상에 기초하여 한글을 반포하고 과학기술, 문화예술, 군사, 외교, 농경, 천문 등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를 이룩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업적은 바로 한글창제.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데 편하게 할 뿐이다.” 이처럼 세종대왕은 한자로 제 뜻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그리고 온 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쓰도록 장려했다. 훈민정음은 애초에 서민들을 위해 만든 글인 만큼 배우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제야 백성들은 일상어와 한자어가 조화롭게 기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고, 이로써 우리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독창적인 언어를 갖게 된 것이다. 또한 훈민정음 해례에는 한글을 들어 ‘바람소리, 학 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짓는 소리까지 무엇이든 소리 나는 대로 글자를 쓸 수 있다’고 적혀있다. 그만큼 한글은 세계의 어느 문자보다 모양을 만든 원리가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란 얘기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한글여행’에 나서볼까.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세종대왕 동상과 동상 후면 지하에 마련된 전시공간인 ‘세종이야기’에 가면 한글 창제과정과 더불어 인간 세종에서부터 대왕 세종까지의 전 생애와 업적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 들고 오른손은 가볍게 올린 좌상 형태의 세종대왕 동상을 보자. 그의 얼굴엔 진실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듯 온화한 미소가 담겨있다. 주변에는 해시계, 측우기, 혼천의 등 대왕의 업적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한 각종 조형물도 설치되어 있다. 후면 지하에 위치한 ‘세종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모두 6개의 테마로 꾸며진 이루어져 있는데 맨 먼저 만나는 것은 바로 ‘위대한 성군 세종’. 왼편으로는 세종의 업적들과 한글의 아름다움을 영상으로 표현하고, 오른 편으로는 훈민정음과 혼천의 등 세종대왕을 대표하는 유물과 그림들을 음각화 모형으로 연출해 세종대왕의 리더십과 정치적 업적 등을 보여준다 세종대왕의 어린 시절의 모습, 세자 책봉과 즉위, 세종의 품성과 취미 등을 소개하며 세종의 연대기를 영상과 이미지로 보여주는 공간인 ‘인간세종’도 있다. 한글 제작 원리는 물론 창제과정을 모형과 그래픽 패널로 구성,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고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용비어천가 등 한글로 된 문헌유물이 전시된 ‘한글창제’도 흥미진진하다. 또한 세종대왕의 어진을 홀로그램으로 전시하고 ‘노비 출산휴가제도’, ‘전세제도 공법 여론조사’ 등 백성을 섬긴 세종의 애민사상이 영상으로 소개되는 공간인 ‘민본사상’과 혼천의와 자격루 등의 발명품들이 홀로그램으로 재연되고 천장에는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바닥에는 해시계를 연출해 과학과 예술 분야에서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세종의 업적을 돌아보게 하는 ‘과학과 예술’도 볼만 하다. 이 외에도 세종대왕의 군사정책을 엿볼 수 있는 ‘군사정책’과 6개의 전시관을 나서면 세종대왕 영상관과 소규모 강연을 할 수 있는 ‘소통의 뜰’이 마련돼 있다. 세종이야기는 매일 오전 10시~오후 8시까지 무료로 개방되며 매주 월요일은 휴무한다. KT와 세종문화회관,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등 모두 3곳에서 진·출입이 가능하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곳이 집현전이라는 사실은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사실일 터. 허나 그 집현전이 지금의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에 대해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집현전의 옛터는 바로 경복궁 수정전 자리다. 수정전은 국왕이 조회와 정사를 보는 근정전이나 사정전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만큼 세종이 집현전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의미한다. 집현전 터에 세워진 수정전은 사정전에서 서쪽으로 빠져나오면 바로 보일 만큼 높직한 기단 위에 버티고 선 커다란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경복궁 중건(1867) 때 복원해놓은 수정전은 고종 초기에는 왕이 기거하는 곳으로, 이후에는 신료들과 정무를 의논하는 편전으로 사용되다가 갑오개혁 시절에는 군국기무처 및 내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다시 돌아와서, 집현전에서는 각종 학문연구와 편찬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 하나가 한글 창제다. 한글창제의 길이 그렇게 수월치 만은 않았다. 중국과의 갈등뿐만 아니라 유교적 세계관을 가진 사대부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세종대왕과 학자들은 백성을 사랑하는 위민(爲民)의 마음으로 밤낮없이 연구에 매진하며 한글 창제를 진행한다. 그리하여 1443년 훈민정음이 완성되지만 이듬해 2월 최만리 등 7인이 중국과의 관계와 성리학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상소를 올린다. 이에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바로 반포하지 않고 ‘용비어천가’를 짓는 등 훈민정음의 체계를 다듬어 나간다. 이후 1446년 세종은 훈민정음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정식으로 알리게 된다. 그렇다면 집현전에서 만들어진 훈민정음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비밀의 화원’으로 불리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 선생이 1938년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일제 암흑기에 우리문화재를 수호하는데 앞장섰던 문화재수집가인 전형필 선생. 그가 평생 동안 수집한 문화재가 이곳에 소장돼 있다. 소장유물이 대다수 국보급으로 우리나라 제일의 고서화 소장처다. 훈민정음도 그 중 하나다.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원본이라 불리는 이 책에는 한글의 제작원리와 제작시기가 명시돼 있다. 무엇보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본이다. 그렇다면 간송미술관이 왜 ‘비밀의 화원’이라 불릴까. 그 이유는 바로 봄과 가을, 일년에 딱 두 번만 전시회를 열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한국 미술품들이 공개되는 전시 기간 내내 작은 미술관은 온종일 사람들로 북적인다. 훈민정음 역시 그 기간에만 볼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마지막으로 둘러볼 곳은 바로 세종대왕이 잠든 릉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세종대왕릉은 경기도 여주에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좌측에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 건립한 유물전시관인 세종전이 있으며, 세종전에는 세종대왕의 어진과 당시에 발명하여 사용한 과학기구, 악기류와 세종대에 간행된 책들이 함께 진열되어 있다. 세종전 앞 야외유물전시장에는 해시계, 천상열차분야지도, 자격루, 관천대, 측우기, 혼천의, 간의 등 15점의 각종 복원유물들이 전시되어있어 세종시대의 과학기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홍살문과 참도를 지나면 만나게 되는 세종대왕릉은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능의 하나로서 소헌왕후 심씨와의 합장릉이다. 봉분 둘레에 돌난간을 둘렀으며 12개의 석주에는 12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세종대왕릉은 위엄이 서려있기도 하지만, 마치 가족들의 나들이 공원처럼 평온하기 그지없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백성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쉼터를 내어주는 세종대왕의 애민(愛民)의 마음을 감히 느껴볼 수 있다. ‘세종대왕 일대기실’ ‘한글실’ ‘과학실’ ‘국악실’ 등 전시실을 통해 세종대왕의 업적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한글악보, 세종실록지리지, 활자인쇄기, 오륜행실도, 규표(척도기기), 간의, 승자총통, 휴대용 오목해시계(보물), 해금, 자바라 등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은 물론 새로운 볼거리들로 가득하다. 특히 세종대왕 일대기실에는 재위 32년간의 업적을 그대로 담은 ‘왕자시절 독서도’ ‘즉위도’ ‘대마도정벌도’ ‘주자소도’ ‘세종대왕어진’ ‘훈민정음반포도’ ‘집현전학자도’ ‘서운관’ 등 그림도 볼 만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111호 한글관. 한글관에서는 훈민정음의 창제부터, 한자를 한글로 만든 과정, 생활 속의 한글과, 한글의 창제 원리, 세계 언어학자들이 평가한 한글의 우수성을 보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휴대전화기 ‘천지인’의 한글입력원리에 관한 설명도 흥미를 끈다. 천지인을 “한글창제원리와 조형적인 특징을 활용한 휴대전화기 문자입력방법”이라고 정의한다. 휴대 전화에도 우주 원리를 담은 한글 창제 원리인 천지인을 형상화 한 ‘ㆍ, ㅡ, ㅣ’ 세 개로 모든 모음을 표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인의 정보 검색 및 저장 능력이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앞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종 이야기 - 문의 : 세종이야기 02-399-1114~6 (매주 월요일 휴관) 경복궁 수정전 - 문의 : 경복궁 안내소 02-3700-3900 (매주 화요일 휴관) 세종대왕기념관 - 문의 : 세종대왕기념관 02-969-8851(매주 월요일 휴관) 간송미술관 - 문의 : 간송 미술관 02-762-0442 (전시기간 외 방문불가. 봄, 여름 2회 개관) ※ 위 정보는 2016년 9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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