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p 백제는 근초고왕 때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으며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웃 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하며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 하였다. 한성백제박물관은 5학년 2학기 1단원의 ‘삼국시대의 건국과 발전’ 과정 중 백제의 전성기를 중심으로 한 백제의 문화적 특징과 풍속, 한강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전과 교류 관계 등을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있어 고대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백제의 금동관은 우아하다. 엄청 크고 화려했던 신라의 금관이나 하늘로 뻗어 나갈듯한 힘찬 기상이 느껴지는 고구려의 금관과는 또 다른 단정하고 깔끔하게 머리 위에 사뿐히 얹어지는 형태로 된 날렵한 맵시는 박물관 안에 전시되어있는 금관을 다시 한 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보통 우리는 금관을 왕이 착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백제금동관은 성격을 조금 달리한다.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된 금동관의 출토지역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백제의 도읍지인 한성과 연관성이 없는 충남 서산 부장리, 공주 수촌리, 익산 입점리, 나주 신촌리, 고흥 길두리, 심지어 일본 구마모토현에 이르기까지 왕이나 쓸법했을 백제금동관모가 출토되고 있다. 당시 한성백제의 중앙정부에서는 백제왕의 세력이 미치는 지역의 수장들에게 금동관모를 하사했다고 한다. 지역별로 흩어져있는 귀족들에게 금동관모를 하사하면서 백제왕의 힘을 과시하고 자기세력화 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백제금동관모는 금동신발과 한 세트로 발견되었는데 이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이 발견된 지역을 묶어보면 백제의 세력범위를 짐작해볼 수 있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공들여 모셔오고자 했던 칠지도. 칠지도의 진품은 지금 일본 이소노카미 신궁에 있다. 칠지도는 369년경 백제가 일본 왕에게 하사한 검으로 처음 칠지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일본 학계에서는 일본이 백제를 다스렸다는 결정적인 증거라며 한바탕 떠들썩했다고 한다. 즉, 일본에게 백제왕이 선물을 바쳤다는 뜻으로 일본은 해석했다. 그러나 지금은 희미해서 거의 보이지 않지만 x선 판독으로 알아낸 칠지도 안에 담긴 글귀를 해석해보면 백제의 왕이 제후국인 왜의 왕에게 하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해 당시 황제국이었던 백제가 제후국인 왜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뜻이다. 결정적인 증거는 왜의 왕을 ‘호왕’으로 불렀던 것을 들 수 있다. ‘호왕’은 제후국의 왕을 일컫는 말이다. 칠지도는 일곱 개의 나뭇가지가 아름답게 뻗쳐 있는 모양새이다. 예로부터 나무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상징했다.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했던 나무를 검안에 상징물로 담음으로써 검의 신성함에 빛을 더했다. 당시 칠지도를 왜왕에게 하사했을 때 백제는 근초고왕시대였다. 아시다시피 근초고왕은 4세기 백제를 삼국 중 가장 강성했던 국가로 이끌었던 왕이다. 근초고왕의 자부심과 당당함은 중국과 왜에까지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탄생한 명품검 칠지도를 일본이 아닌 국내에서 만나볼 날을 기다려본다. 익산하면 무왕이 천도를 꿈꾸었던 왕도로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 미륵사지는 당시 서동으로 불렸던 무왕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선화공주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창건했던 사찰로 많은 사람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익산사람들은 서동과 선화공주를 실제 부부라 굳게 믿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2009년 미륵사지에 남아있던 탑의 복원 작업을 위해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와 금제사리봉안기를 통해 전설이 아닌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다. 금제사리봉안기에 기록된 사실에 따르면 미륵사를 창건한 사람은 신라출신의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무왕의 비 사택적덕녀라고 한다. 무왕은 백제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정식왕비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혹시 있을지 모를 신분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마를 캐는 아이(서동)으로 위장하여 숨어 살고 있었다. 권력의 무서운 칼날을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29대왕이었던 법왕이 반대세력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자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이유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왕은 서민으로 살았기에 그를 지지해주고 뒷받침해줄 세력이 없었다. 무왕은 왕위에 올라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며 왕권을 강화해나갔지만 한편으로 익산 지역의 최고 권력층이었던 사택가문의 딸인 사택적덕녀와 혼인함으로써 익산세력을 지지기반으로 삼아 그 뜻을 더욱 크게 펼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익산미륵사지 사리장엄구와 금제 사리봉안기의 발견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낭만적인 베일에 가려져있던 역사적 진실을 규명해주는 귀중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위 사진은 백제인들의 재치를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둥글넓적하게 되어있는 것은 여성용변기이며 작은 구멍이 뚫려있는 것은 ‘호자’라고 불리었던 남성용변기다. 손잡이를 잡고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있는 것을 보고 박물관에서 그만 웃음을 터뜨리는 분들도 많다. 이런 남성용변기를 중국에서는 술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했다는데 백제인들은 변기로 그 용도를 바꿨다고 한다. 백제인들의 재치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백제인들의 도교사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유물이 백제금동대향로와 산수무늬 벽돌이다. 불교국가였던 고려, 유교국가였던 조선 전에 삼국시대에는 유교와 불교, 도교, 민간신앙 등이 고루 섞여있던 시대였다. 백제 능산리 고분군 주차장 공사장에서 1400여년전의 모습 그대로 진흙에 싸여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에 대한 유물이 드물었던 시대에 백제문화에 대한 편견을 한 번에 날려줄 만한 획기적인 대 발견이었다. 숨쉬기 힘들 정도로 정교한 꾸밈과 철학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이 아름다운 향로 안에 신선이 사는 꿈의 세상에 대한 백제인들의 상상력과 창의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백제인들이 꿈꾸는 신선의 세계 꼭대기에는 날렵하게 날아오를듯한 봉황이 한 마리 사뿐히 올려져 있다. 무심결에 지나치지 말고 무늬 하나하나에 살아있는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껴보자. 백제 금동대향로와 더불어 도교에 대한 백제인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유물로는 산수무늬 벽돌이 유명하다.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신선세계의 산풍경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신비스러운 모습이다. 산수무늬 벽돌 속 산 가운데 오롯하게 들어앉아있는 집 한 채는 자연 속에 점 하나로 살고 싶은 백제인들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한성백제박물관 관람을 마쳤다면 잠시 올림픽공원 벤치에 앉아 따뜻한 봄 햇살을 가득 머금은 채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봄바람을 즐겨보자. 어느 정도 마음을 채웠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몽촌토성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보자. 몽촌토성은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백제의 주요 성곽 중 하나로 풍납토성보다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적들이 드넓은 한강을 건너 쳐들어오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풍납토성이다. 험준한 풍납토성을 함락시켰다면 그것이 끝이 아니다. 백제에게는 몽촌토성이라고 하는 제 2의 성이 기다리고 있다. 몽촌토성은 토성주변에 목책을 둘러 한층 더 방어력을 업그레이드했다. 지금은 세월의 흔적에 깎이고 깎인 상태이지만 당시에는 바늘을 찔러도 흙이 가루 하나 날리지 않을 정도로 견고한 성이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몽촌토성 주변에도 한강만큼은 아니지만 널찍한 해자가 있다. 산책하다 보면 과거에는 치열했던 격전지였을 이 해자에 청둥오리 떼들이 한가롭게 떠다니고 있다. 몽촌토성을 나와 걷다 보면 백제 군인들의 임시 거주지였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수혈주거지터가 있다. 또 한성백제박물관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올림픽공원 내에 백제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몽촌역사관도 함께 관람할 수 있다. 몽촌역사관의 영상실을 방문하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 대한 자세한 역사적 지식을 공부한 후 전시관을 둘러보면 백제역사를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성백제 500년의 도읍이었던 서울 송파구 일대는 백제역사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사적 현장이다. 그 현장 가운데 한성백제박물관이 있다. 한성백제의 역사적 현장을 따라 갈 수 있는 석촌동, 방이동 고분군 일대와 풍납토성, 몽촌토성을 답사했다면 이 답사장소를 한꺼번에 공부할 수 있는 한성백제박물관에서 한성백제의 모든 공부를 마무리 해보자. 한성백제박물관 -주소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성대로 71 -문의 : 02-2152-5800 http://baekjemuseum.seoul.go.kr/ ※ 위 정보는 2017년 3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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