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p 제주도는 바람, 돌, 여자가 많아 삼다도라 불린다지만, 알려지지 않은 역사 또한 길다. 특히, 5학년 2학기 3단원 ‘유교문화가 발달한 조선’ 에 나오는 조선 양반이었던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가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그의 고난과 예술혼을 느껴보자. 가을의 제주도는 여행하기 더없이 아름다운 날들의 연속이다. 그 안에는 포근한 날씨, 알맞은 바람, 걷기 좋은 청명한 하늘,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 냄새, 풀냄새... 뿐만 아니라, 태초 제주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박물관들이 존재한다. 보통 제주도를 방문하는 분들은 놀라운 자연의 풍광을 보기위해 시간을 투자하느라 박물관을 건너뛰기 쉽다. 그러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제주편을 출간한 유홍준 교수도 제주도에서 국립제주박물관은 반드시 방문해야 제주도에 왔다고 할 수 있다 했다. 제주의 속살을 구석구석 이해하지 않고서 제주에 대해 알았다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제주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주 역사와 자연의 보고인 국립제주박물관과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그리고 제주에서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보내며 ‘세한도’ 라는 걸작을 남기고 수많은 학문의 영글음을 보여주셨던 추사 김정희 선생의 유배지를 설레는 마음으로 돌아보도록 하자.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중앙홀의 대표적인 전시물은 의외로 하늘 위를 올려다보아야 볼 수 있다. 국립제주박물관 천장을 가득 메운 아름다운 탐라개국신화 스테인드 글라스가 그것. 탐라의 개국신화를 상징하는 고,을,부 세분의 신인이 화살을 쏘아 그들이 다스릴 영토를 결정하는 장면이 스테인드 글라스에 표현되었다. 탐라의 개국신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일찍이 탐라국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 년 전 한라산의 신비한 기운을 받은 신선들이 땅 한가운데에서 솟아났는데 그들은 각각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라는 신선들로 탐라국의 시조들이 되었다.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세 분의 신인(神人)들은 먼 바다에서 건너온 동해 벽랑국(상상의 나라)에서 보내온 세 분의 공주들과 결혼하면서 비로소 가정을 꾸리고 신인(神人)들에서 인간으로의 삶을 시작한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이 세 을나는 처음에 수렵, 채취생활(선시시대의 생활)을 했었으나, 가정을 꾸리게 되자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며 정착생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 곳에 정착하여 살아가자,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이 늘어나면서 나라를 세워야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들은 서로 싸우거나 피를 흘려 탐라국을 독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늘을 향해 멀리 활을 쏘아 경계를 이루는 지역을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고대왕국을 형성하였고,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는 탐라국을 세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왕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탐라국의 시초이다. 그 후 탐라국은 이후 수천 년 간 독자적인 왕국을 이루며 다른 나라와 교류하며 국가의 생명을 이어가다가 고려시대에 통합된다. 피를 나눈 형제지간이 세운 나라들이라 할지라도 서로 죽고 죽이는 영토전쟁이 당연시되었던 고대국가들 사이에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권력을 나누어가지며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해온 탐라국은 바다만큼이나 너그럽고 평화를 사랑하는 제주인들의 민주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전시물을 자세히 구경하다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유물 하나가 눈에 띈다. 진흙으로 만들어진 보석모양의 물건인데 육지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던 곱은 옥을 닮았다. 옥이 생산되지 않던 제주도에서 치장을 할 때 부유한 사람들은 옥을 수입해서 치장을 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은 진흙을 구워 옥장신구를 대신 했다고 한다. 원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전복칼은 곽지리 조개무지유적에서 발굴되었다. 육지의 반달돌칼과 비슷한 모양으로 생겼는데,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에서는 석기류를 제작하기보다는 조개 구하기가 더 쉬웠을 것이다. 전복을 3분의 1정도 되는 면을 잘라내어 날카롭게 끝을 다듬은 다음에 날로 사용하는 반대 면에 구멍을 뚫어 끈을 꿰어 전복칼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간석기를 만들 돌이 부족했던 제주사람들의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2007년 6월 27일, 대한민국 최초로『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제주도 민속 자연사박물관은 유네스코 지정유산인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성산일출봉 응회구, 거문오름 용암동굴계(거문오름을 포함한 벵뒤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 등 3개소를 설명패널과 동영상으로 알기 쉽게 설명해 놓았다. 김녕굴 막장의 용암폭포를 재현했으며,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중 비공개 용암동굴이면서 석회동굴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당처물 동굴을 모델로 동굴내부의 종유석, 종유관, 석순 등 다양한 동물 생성물을 표현한 자료는 아이들에게 큰 인기이다. 제주 용암동굴의 아름다움은 특히 육지에서 관람 온 사람들에게는 신비감을 자아낸다. 우리나라는 지형적으로 석회암동굴을 많이 접할 수 있기 때문에, 화산작용으로 만들어진 용암동굴의 신비로움은 더 크다 할 수 있다. 추사 김정희는 어렸을 때부터 글씨와 그림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으며 재주를 알아본 아버지는 당시 뛰어난 학자였던 박제가에게 가르침을 받게 하니, 이때부터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박제가와의 귀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스승 박제가의 도움으로 김정희는 젊은 시절부터 청나라 학자들과 많은 교류를 가졌으며, 청나라의 대학자인 옹방강과 완원과 같은 훌륭한 분들의 제자로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김정희는 서른세 살이라는 뒤늦은 나이에 과거 급제를 했으며 충청도 암행어사를 거쳐 동부승지의 자리에 까지 오르는 등 승승장구하며 승진을 거듭해, 쉰 세 살의 나이에는 형조참판의 벼슬에 까지 올랐다. 그러나 김정희 역시 당파싸움의 소용돌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54살에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로 갈 예정이었으나 김정희를 시기한 정적들의 탄핵을 받아 바로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 제주도에서 약 9년의 유배생활을 했다. 제주도와 북청 등으로 12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친 김정희는 벼슬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오로지 학문과 그림에 정진하는 것으로 일생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1856년 10월 7일 서울 봉은사의 현판인 ‘판전’이라는 글씨를 쓰고, 사흘 후에 세상을 떠났다. 추사 김정희의 삶이 녹아있는 유배지는 추사 김정희의 글과 그림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하여 지금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복원되어있다. 그의 작품과 유품들은 구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다행히도 추사 김정희의 글과 그림을 사랑하던 지식인들이 개인 소장유물들을 기증하여 오늘날 추사관이라는 전시관이 탄생할 수 있었다.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의 집을 닮은 세모꼴 모양의 길고 현대적인 건축물은 외관부터 시선을 압도한다. 추사관에서 추사의 글과 그림, 그의 초상화와 글씨 등을 통해 받은 감동은 유배지를 그대로 본 떠 만든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 집터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나지막한 돌담장 안에 심겨져있는 가시달린 탱자나무가 당시 유배생활의 고통을 말해주고 있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강도순의 집에 위리안치되어 있었다. 위리안치는 가시울타리를 쳐서 집 밖으로 죄인이 나가지 못하도록 만들어놓은 것으로, 유배형 중에서도 가장 극한 형벌이라 할 수 있다. 힘든 시간 속에서도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에서도 많은 청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는데, 그가 청년들과 함께 학문을 논하며 공부하던 곳을 밖거리라 한다.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에 가면 이 공간들을 관람할 수 있다. 추사 김정희 유배지는 제주도 4.3사건 때 불에 타 없어졌으나 강도순의 후손 고증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국립제주박물관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주동로 17 -문의 : 064-720-8000 http://jeju.museum.go.kr/html/kr/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성로 40 -문의 : 064-710-7708 http://museum.jeju.go.kr/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 -문의 : 064-760-3406 ※ 위 정보는 2016년 9월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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