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이도는 그리 세지 않으면서 울릉도의 해안 절경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왔다. 울릉도 개척의 역사를 품은 태하부터 걸어보자. 섬의 북서쪽에 자리한 태하는 울릉도 개척당시부터 1907년까지, 그러니까 지금의 도동으로 행정 중심이 옮겨질 때까지 울릉도의 중심이었다. 왜일까? 가만히 울릉도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북서쪽으로 삐죽 튀어나온 태하는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울릉도 땅이다. 남한만 두고 따지자면 울릉도에서 가장 가까운 경북 울진 죽변에서 태하까지 거리는 130km. 울릉도행 배가 출항하는 묵호에서 도동항까지가 161km임을 감안하면 태하는 육지에서 가장 먼저 닿을 수 있는 울릉도 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지혜로운 우리 선조들이 그 사실을 놓쳤을 리 없다. 세금이나 노역을 피해 울릉도에 입도한 이들(주로 강원·삼척·포항 등 동해안 지역의)은 물론 공도정책으로 섬을 순시하러 온 안무사 등 모두 이곳 태하를 통해 울릉도에 입도했다. 이쯤 잠깐 울릉도의 과거를 살펴보자. 1882년(고종 19) 울릉도 개척령 반포 후 검찰사 이규원은 54명의 개척민과 함께 울릉도에 발을 딛는다. 울릉도 북서쪽 태하를 통해서였다. 1416년(태종 16) 공도정책 이후 400여 년 만의 일이었다. 강력한 왕권을 원했던 군주 태종 이방원은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데다 물길도 거세고 깊어 관리가 어려운 울릉도를 아예 비우기로 한다. 공도정책, 우리말로 풀면 빈섬정책이다. 왜구의 노략질, 세금을 제대로 걷을 수 없다는 것도 섬을 비우는 이유에 속했다. 당시 상황이 기록된 세종실록 한 구절을 살펴보자. '당초에 강원도 평해 고을 사람 김을지, 이만, 김울을금 등이 무릉도에 도망가 살던 것을 병신년에 국가에서 인우를 보내어 다 데리고 나왔는데 계묘년에 을지 등 남녀 28명이 다시 본디 섬에 도망가서 살면서 금년 5월에 을지 등 7인이 아내와 자식을 섬에 두고 작은 배를 타고 몰래 평해군 구미포(울진)에 왔다가 발각되었다. 감사가 잡아 가두고 본군에서 급보하여 도로 데려오기로 하고서 인우가 군인 50명을 거느리고 군기와 3개월 양식을 갖춘 다음 배를 타고 나섰다. 섬은 동해 가운데 있고 인우는 삼척 사람이었다.'
<세종실록 29권, 세종 칠년 8월 갑술년(1425년 8월8일)> 여기서 ‘인우’는 검찰사 이규원보다 먼저 울릉도를 찾았던 안무사 김인우를 뜻한다. 안무사는 전쟁이나 반란 직후 민심 수습을 위해 지방에 특사로 파견하던 관직이다. 수토정책 명을 받들어 울릉도를 찾은 김인우는 섬 곳곳을 뒤져 민초들을 찾아낸다. 그런데, 육지로 떠나기 전날 밤 김인우는 “동남동녀 한쌍을 두고 가라”는 꿈을 꾼다. 기이한 꿈이었지만 이를 무시하고 배를 띄우려하자 파도가 험악해진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린 아이 둘에게 거짓 심부름을 시켜 섬 안으로 보내자 날은 잠잠해진다. 그리고 그 틈에 배를 띄워 무사히 육지에 닿는다. 몇 년 뒤, 다시 울릉도를 찾게 된 김인우는 동남동녀를 찾고, 양지바른 해안가에 꼭 껴안은 모양의 백골과 만난다. 몇 년 뒤 김인우가 울릉도를 다시 찾았다는 대목에서 사람은 살지 못하게 했으나 주기적으로 안무사(수토관)를 보내 섬을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수백년이 흐른 지금, 전설은 옛 울릉군청 지척의 ‘성하신당’에서 만날 수 있다. 성하신당은 울릉도 개척 후 대대로 소원을 빌어온 기도처다. 매년 삼짇날에 농사나 어업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태하의 역사를 알고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 어떤가. 이 평화로운 어촌 마을에서 울릉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망망대해 어디쯤에선가 자연풍에 몸을 맡기고 이 섬을 향하던 이들을 그리게 한다. 태하마을로 들어서면 안내표지판을 따라 모노레일로 향하자. 제법 가파른 경사도로 올라가는 모노레일은 흡사 홍콩의 ‘트램’같다. 6분이면 태하등대 근처로 데려다준다. 여기서부터는 왼쪽길을 향해 10분 정도 걸으면 태하등대가 있다. 아니다. 태하등대보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대풍감이 먼저다. 대풍감(待風坎). 이름 그대로 바람을 기다리는 곳. 태하 해안가 석벽에 구멍난 바위를 이른다. 여기에 울릉도에서만 나는 향나무가 자생한다. 예로부터 울릉도는 배를 만들기 알맞은 나무가 풍부해 낡은 배를 타고 입도해 새 배를 만들어 가는 경우가 흔했단다. 완성한 배의 돛을 높이 달고 바위 구멍에 닻줄을 메어 놓고 육지로 불어대는 세찬 바람을 기다리던 바위라고 ‘대풍감’이다. 바람이 불어 돛이 휘어질듯하면 도끼로 닻줄을 끊어 한달음에 본토까지 갔다고.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대풍감에는 여전히 향나무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른편으로는 현포항과 송곳봉, 그리고 공암(코끼리바위)이 펼쳐진다. 내려오는 길은 모노레일을 타고 와도 좋고 약간 험한 산길을 지나 이어지는 해안산책로로 내려와도 좋다. 태하해안길은 자체만으로도 울릉도가 ‘천혜의 섬’임을 보여준다. 대풍감과 태하등대에 취해서 해안길을 걷지 않는 것은 기껏 완성한 배를 그냥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과 같다. 절대 놓치지 말자. 모노레일을 타고 내려왔다면 모노레일 승강장에서 황토굴을 향해 가보자. 황토굴 옆 소라계단을 오르면 본격적인 해안산책로가 시작된다. 원래 태하에는 황토가 많이 났다고 한다. 개척 당시 황토를 파낸 흔적이 있어 큰황토구미(큰黃土邱尾)라고 불렀다고. 이를 한자식 지명으로 표기할 때 대하(臺霞)가 되었고 다시 태하(台霞)가 되었다. 황토굴은 색깔이 남다르다. 이곳의 황토는 귀해서 나라에 상납도 했다고 전해진다. 울릉도에 왔다가는 검찰사들은 이 섬에 들렀다는 증거로 울릉도에서만 나는 황토와 향나무를 가져가야 했다. 21세기 우리들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자.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별미] 해안산책로를 걸은 후 출출하다면 ‘태하 차이나타운’에 들러보자. 광장반점(054-791-7798) 울릉반점(054-791-2235) 등 몇몇 개의 중국요리집들이 몰려있어 그리 이름 붙었다. 왜 섬에서 만나는 중국요리집은 반가운 걸까. 저렴한 가격에 든든하고 푸짐하게 속도 채울 수 있고 ‘뭍’의 음식(?)이 그리워질 즈음 찾아주면 좋다. [숙박] 안타깝게도 겨울철(12월~2월)에는 태하에서 묵기 어렵다. 여관은 3월부터 영업을 시작하고 민박집 역시 겨울철에는 이용이 쉽지 않다. 도동항이나 저동항에 숙박시설이 몰려 있으니 이 곳을 이용하자. 봄철 이후 조용한 태하마을에서 머물고 싶다면 동백장(054-791-5339)과 몇몇 민박집들을 있다. 2박 이상의 일정이라면 태하에서 하루쯤 묵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도동에서 태하까지 노선버스로 40분 거리. 1박 4만원 선. [교통] 저동→태하 노선버스 하루 15회(06:20~18:30) 운행, 요금 1500원. 천부→태하 노선버스 하루 15회(06:10~19:00) 운행, 요금 1500원. 태하→천부 노선버스 하루 15회(07:10~20:30) 운행, 요금 1500원. 태하→저동 노선버스 하루 15회(06:35~19:25) 운행, 요금 1500원. * 시간은 계절, 날씨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 문의 무릉교통 054-791-8000 [문의] - 울릉군청 054-791-2191, www.ulleung.go.kr - 문화관광체육과 054-790-6393 - 관광안내소 054-790-6454 - 글, 사진: 한국관광공사 국내스마트관광팀 이소원 취재기자( msommer@naver.com ) ※ 위 정보는 2013년 1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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