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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머​리가 복잡해지고 마음을 다잡을 수 없을 때면, 나는 무작정 걷는다. 운동화 끈을 조이고, 이어폰을 귓속 깊은 곳으로 밀어 넣고 나면 어디든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첫사랑과 헤어졌을 때도, 오랫동안 준비했던 시험에 떨어졌을 때도,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튼튼한 두 다리는 나를 아무 생각이 필요 없는 곳으로 데려다주곤 했다. ​이번에는 먼 곳이 필요했다. 멀리 가야만 했다. 동네를, 공원을 어슬렁거리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마포대교를 몇 번씩 오가는 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종종 나를 괴롭혔던 편두통은 이제 스물네 시간 내내 왼쪽 관자놀이를 찔러대고 있었다.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슬럼프요, 번아웃이었다. ​이럴 때마다 나에게 내렸던 처방이 있다. 전부터 마음에 담아두었던 곳으로 떠나는 거다. 묵호항에서 망상해변을 지나 옥계해변까지 이어지는 길. 드라이브하기 좋은 길이라며 몇 번 오갔던 적은 있지만, 두 다리로 걷는 건 처음이었다. 묵호역에 KTX가 정차한다. 그렇다면야 더욱더 서두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정확히 오전 9시 45분에 청량리역을 출발한 KTX 열차는 정오 즈음 묵호역에 도착했다. 끼니를 해결하고 출발할까 싶었지만, 기차에서 이런저런 간식을 챙겨 먹어서인지 든든했다. 배부른 상태보다야 가벼운 몸으로 걷는 게 낫기도 했다. 묵호역을 떠나 항구 쪽으로 들어섰다. 한적해 보이는 게 이 동네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선이 들어오고 있는 포구엔 여전히 사람들이 북적였다. 논골담길을 따라 올랐다. 꽤 오랜만에 찾은 이 마을은 유난히 따스했다. 하늘에서 한껏 쏟아주는 햇볕 때문이겠지. 마을의 풍경을 담은 벽화들, 익살맞은 글귀들, 하늘거리는 바람개비와 화사하게 피어난 봄꽃들이 골목 구석구석에서 어김없이 등장해 마음을 살살 달래주었다. 봄이구나. 발걸음이 느려지고 있었다. 해파랑길 34코스라는 게 출발점과 도착점이 명확한 길이라지만, 다 걸을 필요는 없었다. 원하는 곳까지만 가기로 했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다면 미련 없이 주저앉아 쉬어가면 되니까. 초입부터 이렇게 발목을 잡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냥 떠나기에는 아쉬웠다. 바람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공간, 그러니까 논골담길 꼭대기에 올랐다.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해 창밖이 잘 보이는 테이블을 골라 앉았다. 손끝에 내려앉은 햇살이,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언덕 아래에서 일렁이는 바다의 빛깔이 좋았다. 이어폰을 꽂고, 조금 경쾌한 재즈를 골랐다. 복잡했던 마음이 한결 나아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길 잘했어. 논골담길을 내려와 해안 길 위를 걸어 나갔다. 이번에는 이어폰을 빼고 바다가 들려주는 소리에 집중하기로 했다. 방금 전까지 들었던 재즈만큼이나 밝고 청량한 파도 소리가 이어졌다. 거친 파도가 해안선 옆으로 솟은 바위를, 새하얀 방파제를 때리는 소리는 정말이지 속이 다 시원했다. 나 대신 소리를 내질러주는 것만 같았달까. 지루할 거라 생각했던 건 기우였다. 길은 내내 바다와 함께였다. 함께 걷는 사람이 없어도 좋았다. 음악이 없어도 가벼웠다. 요 며칠 사이 머리를 강하게 짓누르는 듯했던 편두통은 이미 씻은 듯이 사라졌다. 걱정도, 근심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갈매기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이 내 손짓을 인사로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만. 어달해변을 지나고 있었을 때 문득, 몇 년 전 여름에도 이 길을 걸은 적이 있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참 평온한 곳이었는데. 바다가 잘 보이는 카페에 앉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셨던 기억도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모래사장을 맨발로 밟으며 거닐기도 했더랬지. 그때 추억에 젖어, 잠시 방파제에 걸터앉아 풍경을 즐기기로 했다. 그때의 그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을 다시금 손에 쥐어 든 것은 물론이다. 몇 년 새에 이곳에 카페가 많이 들어섰다. 어달의 매력을 나만 아는 게 아니라는 뜻인 게다. 아! 바닷가에 올 때면 내심 기대하는 장면이 있다. 소소한 어촌, 바닷가 쪽에 묶어 놓은 줄에 생선을 내걸어 말리는 모습이다. 재미있으면서도 귀여운, 그러다가도 그 생선의 눈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안쓰러워지기도 하는 상황들이 그저 소소한 즐거움이어서다.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들의 사냥 본능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혹은 애처롭기도. 이번에는 대진항 어귀를 지나다가 바로 그 장면을 마주쳤다. 여지는 없었다. 딱 상상한 모습 그대로의 순간이었다. 나 또한 여지없이 카메라를 들고야 말았다. 물론 눈치 빠른 길고양이 녀석들은 모두 사라져버린 후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소소한 풍경에 스며들며 대진항도, 노봉해변도 지나쳤다. 망상역을 건너는 KTX와 함께 망상해변에 닿았다. 이른 봄의 바다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리기에 적당했다. 끝 모르고 길게 뻗은 모래사장에서 내 자리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무런 방해도 없는 곳을 찾아내는 게, 여기서는 그렇게나 쉬운 일이었다. 모래사장 끄트머리에 앉았다. 발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파도가 밀려왔다. 다들 ‘망상’이라는 이름을 농담처럼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바랄 망(望)에 상서로워질 상(祥)을 쓴단다, 여기. 그 '망상(望祥)'이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좋은 일이 있기를, 답답했던 모든 것들이 잘 풀리기를. 그저 무탈하기를. 여기에서 멈출까 하다가, 이왕이면 끝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 망상해변 이후로 이어지는 일부 구간이 변경되었다. 해파랑길 표지는 왼쪽 굴다리를 통과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진상 오른쪽 길로 진행해야 옥계해변으로 향할 수 있다. 7번 국도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북쪽으로, 여전히 바다를 벗 삼아 걸어 나갔다. 강릉 옥계해변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놓인 고가도로는 나름대로 전망대의 역할을 해주었고, 여전히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기찻길은 이따금 반가운 인사를 건넬 수 있도록 열차를 보내주었다. 옥계해변에 도착하자, 울창한 소나무 숲이 양팔을 펼치고 따스하게 맞아주고 있었다.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도착지점이 어디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걸었다. 의자에서 쉬기도, 선베드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저물어가는 해는 숲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이제는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봐두었던 카페에 들러 쉬어가기로 했다. 다행히 옥계해변과 묵호를 오가는 버스가 있어, 돌아가는 길은 조금 수월했다. 어달의 해변에 자리를 잡고 있는 그 카페에 2층에 앉아,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찰나의 바다를 바라보며 책을 펼쳤다. 귓가에선 다시 재즈가 흘렀다. ▶︎걷는 시간 5시간 ​▶︎거리 13.8km ​▶︎걷기 순서 묵호역입구 - (1.6km) - 묵호등대공원 - (5.8km) - 망상해변 ~ (6.4km) - 한국여성수련원입구 ​▶︎코스 난이도 쉬움 ▶︎관광 포인트 - 국민관광지 제2호로 지정된 동해안 최고의 해수욕장 망상 해변 - 묵호동 산 중턱에 위치한 묵호등대. 출렁다리와 등대오름길 산책이 일품 - 도시적인 카페와 싱싱한 활어 횟집이 조화를 이루는 어달해변 ​▶︎화장실 및 매점 묵호역, 대진항, 망상해변 등지에 화장실과 매점이 위치 ​▶︎교통편 동해종합버스터미널에서 시내버스 21-1번 이용, 동해프라자 정류장 하차 후 도보 이용 ▶︎길 상세보기 - 해파랑길 34코스 출처 : 한국관광공사 레저관광팀 두루누비 글, 사진 : 김정흠(여행작가) ※ 위 정보는 2021년 3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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