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켜켜이 쌓인 성벽과 초가에서 그리운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600년의 시간을 굳건히 지켜온 성벽이 품은 삶의 이야기는 진하고 애달프다. 귓가에서 속살거리는 이야기에 반해 다시 찾게 되는 곳. 지금 내 앞에 당당히 서 있는 순천 낙안읍성이 그런 곳이다. 글 정철훈 사진 한국관광공사 DB 여전하다. 튼실한 성벽도, 예쁜 돌담도. 그날과 다른 게 있다면 구름 한 점 없는 투명한 하늘 정도다. 3년 전이다. 예보에 없던 비에 툴툴대며 순천 낙안읍성을 찾았다. 잿빛 하늘이 쏟아내는 소낙비에도 읍성은 당당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비 때문이었겠지. 인터넷 검색 창에 ‘낙안읍성’을 써넣으면 첫머리에 뜨는 남문 옆 계단까지만 가보려고 했던 것은.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감당하며 터벅터벅 가파른 계단 끝에 섰을 때,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그리고 물 먹은 화선지에 부드러운 붓으로 그려놓은 듯한 무지개가 머리 위로 떠올랐다. 그날의 감동이란. 그때 비에 젖은 성벽이 내게 말을 걸었다. 우리가 품어낸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냐고. 3년이 지나, 다시 이곳을 찾은 건 그날 미처 듣지 못한 성벽의 이야기를 마저 듣고 싶은 마음에서다. 남해에 접한 순천은 예로부터 왜구의 침략이 잦았던 고을이다. 순천만 물길 따라 내륙으로 들어온 왜구는 순천 곳곳을 누비며 노략질을 일삼았다. 즐겁고(樂) 편안(安)해야 하는 낙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1397년 전라수군첨절제사 김빈길 장군이 군민과 힘을 모아 토성을 쌓은 이유다. 순천 낙안읍성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흙을 다져 쌓은 야트막한 토성은 30년 뒤 견고한 석성으로 탈바꿈한다. 왜구에 맞서기 위해 석성으로 증축해달라는 전라도관찰사의 장계에 따른 조처였다. <세종실록>에는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성을 돌로 다시 쌓아 규모를 넓혔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그리고 약 200년 뒤 마을을 지켜주던 든든한 낙안읍성에 크나큰 시련이 닥쳤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다. 임금마저 의주로 도망쳐 버린 7년 전쟁. 그 끝은 참혹했다. 낙안읍성도 그 참혹함을 피해갈 수 없었다. 왜군의 손에 철저히 유린당한 낙안읍성을 지금의 모습으로 되살린 이가 임경업 장군이다. 1626년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은 낙안에 머무는 동안 성을 복구하고 주민을 위해 많은 성정을 베풀었다. 그래서일까.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임경업 장군이 하룻밤 만에 성을 쌓았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오뉘 힘내기’ 설화 속 주인공인 아들과 딸 대신 임경업 장군과 누이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임경업 장군 남매가 성 쌓기와 베옷 짓기로 내기를 했고, 누이가 베옷 짓기를 먼저 마쳤지만 동생을 위해 성이 완성될 때까지 옷고름을 달지 않고 기다렸다는 훈훈한 내용이다. 어머니가 건넨 뜨거운 팥죽을 먹다 내기에서 진 딸이 죽음을 맞는 ‘흑성산 오뉘 힘내기’ 설화의 비극적인 결말과는 사뭇 다르다. 임경업 장군에 대한 주민의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이야기다. 마을 주민들은 임경업 장군의 어진 다스림을 기려 성 안에 임경업장군비각(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47호)을 세우고, 동문 밖 충민사에 임경업과 김빈길 두 장군의 위패를 모셔 봄가을로 제사 지낸다. 임경업 장군은 낙안면 동내리에서 정월 대보름에 지내는 당산제의 주신이기도 하다. 순천 낙안읍성은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조선 전기 양식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석성이다. 여느 읍성과 마찬가지로 동 서 남, 세 방향으로 성문을 내고 동문과 남문에는 ‘ㄷ’ 자형 옹성을 쌓았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작은 성으로 항아리 모양의 원형으로 쌓는 경우가 가장 흔하지만 순천 낙안읍성처럼 ‘ㄷ’ 자나 ‘ㄱ’ 자, 심지어는 삼각 모양으로 쌓는 경우도 있다. 성벽에 둘러싸인 성 안 마을은 3개의 성문을 잇는 ‘T’ 자형 길을 따라 민가와 관청 구역이 나뉘는데, 동헌과 낙안객사(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70호) 등 관청 건물은 북쪽에, 민가는 남쪽에 자리한다. 우리나라 3대 읍성(고창·해미·낙안 읍성) 중 유일하게 산에 기대지 않고 분지에 쌓은 평지성이라는 점도 순천 낙안읍성의 특징이다. 동서로 길게 터 잡은 성의 둘레는 1410m, 높이는 3~5m다. 자연석을 이용해 쌓은 성곽은 큰 돌이 움직이지 않도록 돌과 돌 사이에 작을 돌을 끼워넣는 ‘쐐기 박음’을 해 태풍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하다. 순천 낙안읍성에는 지금도 200여 명의 주민이 산다. 관광객을 위해 출퇴근하는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라 대를 이어 온기로 집을 지켜온 이들이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그리고 아들로. 그 세월이 무려 600년이다. 폐가는 낡고 허물어진 집이 아니다. 온기가 빠져나간 집이 폐가다. 성 안에 촘촘히 자리한, 3칸짜리 키 작은 초가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대를 이어 사람의 온기로 가득 채워온 공간. 순천 낙안읍성 안에 터 잡은 300여 채의 초가 중 순천 낙안읍성 이방댁(국가민속문화재 제92호)과 순천 낙안읍성 들마루집(국가민속문화재 제93호)을 포함한 9채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었던 힘이다.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주 양동마을처럼 집성촌을 이뤄 대를 잇는 민속마을은 더러 있어도 성 안 마을의 풍습을 이처럼 오랜 세월 지켜온 마을은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이 유일하다. 성 안 마을 풍경은 여느 시골처럼 평범하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초가에서는 매일 아침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낮게 깔린 연기 사이로 아침 햇살이 스미면 그제야 게으른 수탉이 길게 홰를 친다. 600년을 이어왔고 600년을 이어갈 풍경이다. 봄이 오면 모를 내고 가을걷이 마치면 새 짚으로 지붕을 엮어 겨울날 채비를 한다. 그리고 봄이 오면 다시 모를 낸다. 쳇바퀴 돌듯 똑같은 생활의 반복, 지루할 법도 한 그 무한 반복의 일상을 버텨낸 민초들의 삶이 역사고 이야기다. 가끔은 행복했지만 그보다는 이 악물고 버틴 시간이 몇 곱절은 더 많았던 고된 삶이기에 그들의 이야기에 자연스레 귀 기울이게 된다.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에는 성 안에서 대를 이어온 민초들의 삶에서 비롯한 체험거리가 다양하게 마련됐다. 집 한 채를 온전히 상가로 꾸며 유서를 쓰고, 수의를 입고, 관에 누워보는 상례체험이 있는가 하면, 복식 제대로 갖추고 새색시와 새신랑처럼 전통혼례체험도 할 수 있다. 베틀에 앉아 직접 베를 짜보는 길쌈체험, 우리 땅이 키운 풀과 꽃으로 천을 물들이는 천연염색체험도 흥미롭다. 근대 오명창으로 불리는 송만갑 선생이 나고 자란 마을답게 민요와 판소리를 따라 하고, 피리·단소·대금 같은 우리 전통악기에 대해 배우는 귀한 시간도 가져볼 수 있다. 주말에는 객사 앞 너른 잔디마당에서 판소리에 가야금을 접목한 가야금병창 공연도 펼쳐진다. 체험공간은 대부분 남쪽 민가 구역에 자리한다. 재료가 들어가는 천연염색체험, 두부·메주체험을 제외한 대부분이 무료다. 여행자는 그저 돌담 예쁜 고샅을 따라가다 만나는 체험장에서 마음 편하게 즐기면 그만이다. 순천 낙안읍성을 이야기하면서 성벽 걷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조금 편하게 성벽을 걷고 싶다면 민가와 관청 건물을 꼼꼼히 돌아본 후에 서문에서 시작해 남문을 거쳐 동문으로 나서는 게 좋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남문과 서문 사이 계단이 상당히 가파르다. 계단 위에 섰다면 서둘지 말고 잠시 머물러보시길. 혹시 모를 일이다. 내게 그랬던 것처럼, 삶이 버겁고 고되다 느끼는 당신에게 성벽이 넌지시 위로의 말을 건넬지도. ✔ 주소 전남 순천시 낙안면 충민길 30 ✔ 문의 061-749-8831 ✔ 홈페이지 www.suncheon.go.kr/nagan ✔ 식당 - 전주산들청국장 : 청국장 | 전라남도 순천시 팔마2길 78 | 061-725-6447 - 대원식당 : 한정식 | 전라남도 순천시 장천2길 30-29 | 061-744-3582 - 전망대가든 : 짱뚱어탕 | 전라남도 순천시 별량면 일출길 261 | 061-742-9496 ✔ 숙소 - 밀라노모텔 : 전라남도 순천시 장선배기2길 5-15 | 061-723-4207 - 순천 게스트하우스 느림 : 전라남도 순천시 강변로 669 | 010-9229-8917 | www.nreem.co.kr - 순천자연휴양림 :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청소년수련원길 170 | 061-749-8948 ✔ 여행 팁 순천 여행을 좀 더 알차게 하려면 통합입장권을 구입하는 게 좋다. 통합입장권은 순천 낙안읍성, 순천만국가정원, 순천만습지, 드라마촬영지, 낙안민속자연휴양림, 뿌리깊은나무박물관 등 6개 여행지를 성인 1만2000원, 청소년 8500원, 어린이 5500원에 이용할 수 있다. 통합입장권은 6개 여행지 매표소에서 구입이 가능하며, 이틀간 사용할 수 있다. ※ 위 정보는 2019년 12월에 작성된 것입니다.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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