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p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지배자와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지배자의 세력이 커지면서 국가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우리나라 최조의 국가 고조선이 탄생하였다. 선사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고인돌은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인돌을 통해 청동기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 고인돌 유적은 다양한 체험활동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조롭고 지루하기 쉽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미리 다양한 책을 읽어 충분히 공부한 뒤에 관람할 수 있도록 하자. 전북특별자치도 고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다양한 모양의 고인돌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도산리 고인돌마을에서는 남쪽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방식 고인돌도 구경할 수 있다. 고인돌마을에는 숙박할 수 있는 민박집도 있고 예약을 하면 체험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선사문화체험은 인기가 높다. 무엇보다 체험프로그램 중 마을산책하기가 가장 인상적인데 시골 정취가 물씬 풍기는 마을을 마을어르신의 구수한 설명과 더불어 산책하며 마을풍경을 감상하는 재미는 일품이다. 마을 산책과정에서 고인돌마을이 자랑하는 북방식 고인돌도 만날 수 있다.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고인돌 박물관도 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약 기원전 2000여년 경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들기가 어려워 소수의 지배계층만이 사용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돌과 나무를 생활에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는 신석기시대와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농사짓기가 더욱 발전하여 오늘날 주식으로 먹는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보리, 콩, 수수 등 더 많은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 농사짓기는 사냥이나 채집활동보다 더 많은 먹거리를 사람들에게 안겨주었다.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며 먹거리를 창고에 넣고 저장하여 오랫동안 굶지 않고도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먹거리가 창고에 쌓이니 이웃의 곡식을 탐내는 무리들도 생겨났다. 그래서 다른 마을 사람들이 쳐들어와 약탈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여러 식구들이 한 마을에 모여 살아가는 공동체생활을 하게 되었다. 청동기 시대 마을은 앞에는 물이 흐르고 뒤로는 산이 있는 구릉지에 집을 지었으며 마을 앞으로는 빽빽하게 목책을 두르고 망루를 세워 다른 마을 사람들이 침입하는 것을 막았다. 마을입구에는 솟대를 세워두기도 했다. 솟대는 하늘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전령과 같은 구실을 하여 마을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 하늘에 소원을 빌면 하늘이 안전하게 마을을 보호해준다고 믿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 고인돌의 40%가 모여 있는 거석문화의 중심지다. 그 중 많은 수의 고인돌이 서해안을 따라 분포하는데 그 중 많은 수가 전남지역에 모여 있다. 농경생활을 시작한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물이 풍족한 지역을 따라 넓은 땅에 마을을 이루고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한 땅을 찾아 마을을 이루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농사짓기 좋은 땅은 평야지대가 드넓게 펼쳐져 있는 전라도. 전라도에서도 특히 고창, 화순, 순천 지역의 고인돌은 매우 유명하며 화순 효산리와 대신리 일대의 고인돌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 둘러싸여 있어 비교적 보전상태가 좋고 그 숫자도 많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적이다. 얼마 전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유산으로도 선정되었다. 효산리 고인돌군을 살펴보기 전에 고인돌 선사문화체험장에 먼저 들렀다. 청동기시대 마을과 비슷하게 꾸며놓은 곳이다. 마을 주변을 목책으로 빙 둘러 방어기능을 높였고 마을 입구에는 솟대도 세워져 있다. 선사문화체험장에서는 볼 수 없지만 과거 청동기시대에는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환호라는 마을 방어를 위해 파놓은 구덩이를 지나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화순 고인돌공원에서는 무엇보다 청동기시대 움집 두 개가 복원되어있어서 흥미를 끌고 있다. 하나는 마치 집회장처럼 생긴 길고 넓은 형태의 움집이며 나머지 하나는 3~4명의 핵가족이 살기에 알맞은 소규모 움집이다. 청동기시대에도 신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움집에서 살았지만 내부 구조와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일단 신석기시대처럼 안으로 깊이 푹 파인 움집이 아니라 반지하이긴 했어도 지상으로 보다 올라온 형태를 띄고 있으며 화덕자리도 가운데에서 점점 가장자리로 옮아간다. 신석기시대 움집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사냥도구들 보다는 농경사회의 상징인 농기구들이 집안에 더 많았던 것도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살림도구들도 점점 세련되어지고 정교해졌다. 화순 고인돌마을에서 만난 움집들은 청동기시대의 생활모습을 조금이나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효산리 고인돌공원에 입장하면 백제고분을 지나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괴바위 고인돌이다. 이 괴바위 고인돌과 강화도 부근리에서 만날 수 있는 부근리 고인돌을 비교해보자. 강화도에 있는 부근리 고인돌은 흔히 북방식 고인돌이라고 부르는데 커다란 기둥돌 두 개를 세우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어 시신을 땅 위에 모셔두는 것이 특징이라면 괴바위 고인돌은 바닥을 파고 지하공간을 만든 다음 굄돌을 받치고 커다란 덮개돌을 얹어 만든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 같은 고인돌이라 할지라도 지역에 따라 이렇게 모양이 달라진 다는 것이 무척 신기하다. 더군다나 괴바위 고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크기가 엄청나게 커서 어떻게 이렇게 큰 돌을 옮겨왔는지 그저 신기하기만 할 뿐이다. 이 괴바위 고인돌은 무덤으로 사용했다기보다는 제사를 지내던 제단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다른 고인돌과는 다르게 규모가 매우 클 뿐만 아니라 아주 정갈하게 잘 정리되어있는 고인돌이기 때문이다. 보통 제단으로 사용되었던 고인돌은 발굴조사를 해도 유골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고인돌이 무덤뿐만 아니라 제단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화순 고인돌 유적지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도곡벌판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관청바위 채석장 아래로 관청바위 고인돌군이 흩어져있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전라남도 보성원님이 나주 목사를 방문하기 위해 보검재를 넘어 이곳 고인돌 근처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마침 원님이 행차하신 것을 알고 마을 주민들이 찾아와 억울한 일에 대한 상소를 올리자 원님이 쉬고 있는 그 자리에서 바로 즉결처분을 내려주셨다고 한다. 원님이 관청 일을 처리했던 바위라고 해서 그 뒤로는 이곳을 관청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이 관청 바위 고인돌군 주변에서는 과거 사찰이 있었던 흔적도 남아있으며 농경지가 만들어지면서 많은 고인돌들이 사라졌지만 현재 대형 고인돌들이 밀집되어있어 당시 풍경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화순고인돌 유적지에 있는 많은 고인돌들이 다 놀라웠지만 이렇게 커다란 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풍경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은 청동기와 석기로 나눌 수 있다. 청동기는 다루기가 어려운 금속이었기 때문에 주로 지배계층에서 사용하였으며 일반 사람들은 여전히 석기를 사용했다. 청동기시대는 벼농사가 시작되고 농업이 크게 발전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농경문화와 관련된 유물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유물은 반달돌칼이다. 신석기시대 때 사용하던 뭉툭한 돌날이 무겁지 않게 날렵하고 세련된 세모모양의 반달돌칼로 변하게 된다. 반달돌칼은 양쪽에 구멍을 뚫어 끈을 꿴 다음 끈에 손목을 걸어 살짝 쥐고 이삭을 싹둑 자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청동기인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이 밖에도 본격적인 농경에 사용되던 돌보습이라든가 괭이 등도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청동기시대의 지배계층에서 사용하던 대표적인 물건으로는 청동방울과 청동거울, 청동검 등이 있다. 지배계층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사장의 역할까지 겸했기 때문에 목에는 번쩍이는 청동거울을 걸고 허리에는 청동방울을 달고 청동검을 옆에 차고 그 위엄을 과시했다. 큰 규모의 고인돌 밑에서는 지배계층이 사용하던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 세계유산 화순고인돌 유적 -주소 :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춘양면 대신리 일원 -문의 : 대산리발굴지 종합안내소 061-379-3933 ※ 위 정보는 2020년 9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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