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이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렸다. 그것이 초인종 역할이라도 하는 듯 주인장이 나와 인사를 건넸다. 간단히 체크인을 마친 뒤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가 짐만 내려놓고 설레는 마음으로 마루에 앉았다. 말로만 듣던 고택이었다. 거리감이 느껴질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친근함이 앞섰다. 첫 번째 고택 체험으로 전주의 ‘문화공간 양사재’를 택한 것은 아주 잘한 일 같다. 양사재(養士齋)는 전주향교의 부속 건물로 선비를 기른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학사들이 공부하고 글을 읽던 곳이다. 서당 공부를 마친 재능 있는 청소년들이 모여 생원 및 진사 공부를 하였으며, 진사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양사재에서 합격 사실을 알리는 부표(附表)를 해야만 비로소 합격이 인정될 만큼 선비들에게 아주 영향력 있는 교육공간이었다고 한다. 다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고택치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건재한 모습이었는데, 사연인즉 이렇다. 양사재가 지어진 연대는 향교의 역사와 같이하리라고 추정하지만 명문화되어 있지 않고 다만 1875년(고종 12) 오목대 사우 터에 판관 김계진이 노후한 양사재를 다시 지어 문사들의 도장이 되게 하였다고 <전주부사>에 기록되어 있단다. 또한 향교의 나이 많은 유생들 집회소로도 활용한 이곳 양사재는 1896년 조선 소학교령이 공포된 이듬해 전북특별자치도공립소학교(현 전주초등학교) 인가를 받아 그해 7월 10일 전북특별자치도 신교육의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하니 벌써 120여 년 전 일이다. 이때 6칸 ‘ㄱ’ 자 집으로 지어진 양사재 건물은 너무 낡아 1980년 집터를 돋우고 옛 모습을 그대로 살려 고쳐 지었고 당시 재목으로 ‘一’ 자형 뒤채를 지었다. 이번에 우리가 머물게 된 곳은 아쉽게도 본채가 아닌 뒤채였다. 2002년까지 이성로 씨의 남겨진 배우자가 살고 있었고, 이후 ‘문화공간 양사재’ 운영팀이 100여 년 전 원형을 복구하여 한옥 민박 경영, 야생차 보급, 문화관광 개척 등 다목적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평일이라 손님은 우리밖에 없어서 고즈넉한 분위기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양사재에는 4인실인 분합방 2개, 2인실인 구들방과 뒤채가 3개씩 총 8개 객실이 있다. 분합방의 분합은 주로 대청과 방 사이 또는 대청 앞쪽에 다는 네 쪽 문을 말하는데, 둘씩 접어서 들어 올리면 기둥만 남고 모두 트인 공간이 된다. 이번에 내가 머문 곳은 구들방. 온돌로 난방장치를 한 방을 뜻했다. 생각보다 날이 추워 온도를 좀 더 높여달라고 부탁드렸다. 어릴 적 할머니께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했던 옛집의 작은 단칸방은 생각보다 더 작았다. 놓여 있는 건 소반 하나가 전부였으니 거슬릴 게 없어 둘이 머물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다행히 화장실은 현대식으로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본채 건물과 이불을 널어놓은 마당이 예쁘다고는 말할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 오히려 소박하고 친근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방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 흔한 TV와 냉장고도 없었다. 생수 대신 직접 끓여 담아 주신 보리차를 마시며 그저 고요히 사색을 즐겼다.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난다면 바로 이런 느낌일까. 밤이 되니 분위기가 한껏 살아났다. 일찌감치 불을 끄고 누웠다. 촛불이나 달빛에만 의지하여 살았을 그 시절의 밤을 떠올리며 두꺼운 솜이불 속을 더 파고들었다. 휴대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하고픈 말을 전하는 시대에 살건만 아직도 이렇게 할 말이 많이 남아 있었던가. 이 작은 단칸방에는 소중한 사람과의 사이를 좀 더 좁혀주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양사재에서의 밤은 아주 천천히, 은은한 달빛처럼 스며들었다. “손님~ 좋은 아침입니다. 나와서 식사하세요!” 아침 8시30분. 조식시간이 가까워지자 아주머니께서 직접 깨우러 오셨다. 주섬주섬 옷만 갈아입고 관리실의 주방으로 건너가니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따끈한 밥과 국, 몇 가지 반찬으로 차려진 밥상은 집밥처럼 푸근했다. 무엇보다 양사재를 선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든든히 채운 에너지만큼 오늘은 더 많은 경험을 누려야겠다고 다짐하며 힘차게 대문을 나섰다. Info.
1. 업 소 명 : 양사재 2. 주 소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오목대길 40 3. 전화번호 : 063-282-4959 4. 홈페이지 : www.yangsajae.kr/ 5. 주차가능 여부 : 공영주차장 이용 가능 6. 숙박요금 : 더블룸(2인실) 6만 원, 패밀리룸(4인실) 10만 원 7. 조식시간 : 오전 8시30분 8. 100% 환불가능 날짜 : 투숙예정일 7일 전까지 9. 체 크 인 : 오후 3시 10. 체크아웃 : 오전 11시 오목대 오목대는 양사재에서 가장 먼저 추천한 관광지였다. 전주한옥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기 때문인 듯했다. 양사재 바로 옆에 오목대로 올라가는 길이 이어져 있는데, 나지막한 언덕에 숲길이 조성되어 있어 쉬엄쉬엄 산책을 즐기기에도 제격이다. 오목대는 1380년(우왕 6년) 삼도순찰사였던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승전을 축하하며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뒤 이곳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오목대(梧木臺)라 하였다. 주소 :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 1-11 문의 : 063-281-2114 전주향교 양사재가 전주향교의 부속 건물이었던 만큼 전주향교를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주향교는 고려 말, 현유(賢儒)의 위패를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가장 중심이 되는 위치에 공자를 모신 사당, 대성전이 자리한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향교마다 공자를 모신 사당을 두고 유학을 장려했다. 전주향교에는 5성위인 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의 아버지 위패를 모신 사당, 계성사를 두고 있는데 전국 향교 중 제주향교와 이곳에만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전주향교는 특히 가을이 되면 진가를 발휘하는데, 대성전 앞 400년 넘은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모습이 아름다원 매년 사진작가들이 찾는 유명한 포토존이다. 예로부터 서원과 향교에는 은행나무를 심는데, 이유인즉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고사 때문이라고 한다. 주소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향교길 139 문의 : 063-288-4544 글/사진 : 여행Q레이터 홍수지 ※위 정보는 2019년 12월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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