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는 중원문화가 꽃을 피운 고장이다. 남한강을 중심으로 선사시대 유적이 남아 있고, 삼국시대에는 중원을 서로 차지하려는 치열한 전장이었다. 삼국시대부터 5소경 가운데 중원경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지난 1월 충주 호암동 일대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청동 유물이 다량 발굴되었다. 초기 철기시대 무덤에서 세형동검을 포함해 유물 19점이 한꺼번에 출토된 것이다. 치열했던 역사의 흔적과 다양한 유적이 산재해 있는 남한강을 따라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충주의 역사를 만나보자. 옛날부터 물이 있는 곳은 어김없이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정착해 살아갔던 선사시대 사람들 역시 살아가기 위해 물이 있는 곳을 택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충주시 동량면에 자리한 조동리 선사유적은 남한강을 기반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대규모 마을 유적이다. 남한강이라는 큰 강과 강이 범람하면서 만들어진 너른 충적평야가 있어 사람이 살기 적 합했다. 선사유적은 대략 7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석기인들이 최초로 살기 시작한 이후 3000년 전 청동기인들이 농경생활을 이어갔다. 동량면 소재지 입구 남한강과 인접한 곳에 조동리선사유적박물관이 자리한다. 조동리 선사유적의 발굴 과정과 다양한 유물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1층에 조동리선사문화실, 2층에 조동리농경실과 농학자 허문회 선생 기념실로 구성되어 있다. 조동리 선사유적은 1990년 집중호우로 유적이 노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10여 년에 걸쳐 신석기시대 일부 유적은 물론 청동기시대의 집터와 불 땐 자리, 움터 등을 발굴했다. 유적을 통해 선사시대 사람들이 대규모로 마을을 이루고 활발한 농경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발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강화유리로 된 다리를 건너면 발굴된 집터, 움유구, 불 땐 자리 등의 유적과 토기, 곡물류 등을 토대로 당시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디오라마를 만난다. 발굴된 유물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곳이다. 조동리 지형을 토대로 대규모 마을을 이루고 살던 청동기인의 모습을 담은 거대한 디오라마다.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농사를 짓는 모습, 가축을 기르고 열매를 채취하는 모습, 움집을 집고 토기를 굽는 모습 등 청동기인의 생활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청동기인의 움집 생활상도 볼 수 있다. 조동리 선사유적지에서 발견된 7호 집터를 복원한 움집이다. 그물을 손질하는 남자, 갈돌과 갈판을 이용해 곡식을 가는 아이, 불을 피워 생선을 굽는 여자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박물관 2층 조동리농경실은 조동리에서 발굴된 농경 유물의 쓰임새와 당시의 곡물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긴 나무에 묶어 땅을 갈아엎는 데 쓰인 돌보습, 곡식을 벨 때 쓰인 반달돌칼과 돌낫, 열매의 껍질을 벗기거나 곡물을 갈 때 쓰인 갈판과 갈돌의 쓰임새 등을 그림과 함께 알 수 있다. 그중 돌보습은 땅을 갈아엎는 데 쓰였을 뿐 아니라 삽이나 호미 등의 역할도 한 다기능 도구였다. 요즘으로 따지면 맥가이버 칼 정도 되지 않았을까? 조동리 선사유적에서는 다양한 곡물의 흔적이 출토되었다. 밀이 723알로 가장 많고 보리와 쌀, 벼, 조 그리고 박씨와 복숭아씨도 발견되었다. 대부분 탄화된 것이지만 3000년 전의 곡식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이채롭다. 농경실 옆은 충주 출신의 농학자 허문회 박사를 기념하는 곳이다. 우리나라 농업사에 지대한 공을 세운 허 박사는 쌀 자급자족시대를 열게 한 통일벼를 개발했다. 우리나라에는 1970년대 이전까지 흔히 ‘보릿고개’라 불리는 춘궁기가 있었다. 쌀을 주로 생산하는 나라였지만, 대다수 국민이 따뜻한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통일벼는 일본과 대만의 벼 품종을 교배한 것에다 국제미작연구소에서 육성한 IR8을 3원 교배해 개발한 품종이다. 우리나라에서 재배한 벼는 바람과 병충해에 약해 한 해 수확량이 매우 적었다. 1972년부터 통일벼를 보급한 이후 생산량 증대와 함께 쌀 자급률이 100%를 넘게 되었다. 40여 년 전 끼니를 걱정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의 생활은 너무 과분한 것은 아닐까? 쌀 소비량이 예전만 못해 남아도는 요즘, 보릿고개 시절을 되새겨보는 것도 좋겠다. 그런 점에서 농학자 허문회 선생 기념실은 의미가 있는 곳이다. 충주 중앙탑면을 지나 여주로 흐르는 남한강 주변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흔적이 남아 있다. 탄금교를 건너면 중앙탑면의 첫 마을 창동리다. 창동리에는 소박하면서도 위엄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과 석불, 마애불 등이 남아 있다. 탄금교를 건너 1km 정도 가다 보면 우측으로 충주 창동리 마애불을 가장 먼저 만난다. 작은 언덕 너머 남한강과 맞닿은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입구를 지나 언덕에 오르면 강가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이 나온다. 무심코 계단을 딛고 내려가다 높이 4m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불의 등장에 흠칫 놀란다. 호방하고 근엄한 표정과 거친 표현이 전형적인 고려시대 마애불이다. 여주 방면으로 흐르는 남한강에서 바라다보이는 마애불로 뱃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안녕을 염원한 불상인 듯하다. 창동리 마애불에서 2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충주 창동리 오층석탑과 석조약사여래입상이 나란히 서 있다. 충북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청명주를 빚는 중원당을 찾으면 쉽다. 창동리 오층석탑과 석조약사여래입상도 고려시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커다란 돌에 약합을 들고 서 있는 약사여래를 새긴 것이다. 창동리 마애불이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다면, 약사여래입상은 후덕한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귀여운 모습이다. 오층석탑은 두툼한 2층 기단 위에 갸름한 탑신부를 세워 마치 다른 두 석물을 올려놓은 듯하다. 석탑은 인근 폐사지에서, 약사여래입상은 인근 폐광에서 발견된 것을 옮겨온 것이다. 좁은 공터에 나란히 서 있어 단출하면서도 호젓한 풍경을 선사한다. 충주고구려비전시관에서 충주고구려천문과학관 방면으로 난 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봉황리에 이른다.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한포천과 맞닿은 무쇠봉 오르는 길에 보물로 지정된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이 있다. 가파른 돌계단과 철제계단을 오르면 가장 먼저 8구의 마애불이 새겨진 암벽에 이른다. 반가상과 공양상, 보살상 등 다양한 불상이 새겨져 있다. 삼국시대에 조성되어 오랜 풍상을 견딘 탓에 8구의 불상을 모두 찾기란 어렵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하나하나 눈여겨봐야 찾을 수 있다. 마애불상군에서 조금 더 오르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는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불상의 광배에 가부좌를 튼 5구의 화불이 눈길을 끈다. 마애불상군 앞에서 시야를 돌리면 남한강으로 합수되는 한포천과 높지 않은 산세가 정겨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조동리선사유적박물관 주소 : 충북 충주시 동량면 조동1길 15 문의 : 043-850-3992 1.주변 여행지 마당가든 : 민물매운탕 / 충주시 동량면 지등로 441 / 043-851-4077 http://www.마당가든.kr/ 운정식당 : 올갱이해장국 / 충주시 중원대로 3432-1 / 043-847-2820 앙성참한우 : 한우 / 충주시 앙성면 가곡로 1512 / 043-855-5808 2.숙소 봉황자연휴양림 : 충주시 가금면 수룡봉황길 540 / 043-850-7315 필림37.2호텔 : 충주시 연수동 연원로 17 / 043-842-0515 풍경이아름다운집 : 충주시 동량면 지등로 268 / 043-851-4022 글, 사진 : 문일식(여행작가) ※ 위 정보는 2019년 10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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