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p 고산 윤선도가 살던 조선 중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란이 일어나고 서인, 남인간의 당쟁이 격렬하던 시기였다. 당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20여년의 유배생활을 해야 했던 그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자리잡은 보길도는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어부사시가', '오우가’ 등 조선 가사문학의 대표작을 탄생시킨 윤선도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시대 문인 윤선도의 낙원 보길도. 강직한 성품으로 오랜 유배생활을 겪은 윤선도는 속세를 떠나려 제주도로 향하던 중 풍랑을 피해 잠시 머물던 보길도에 반해 버린다. 인생 끝자락에 그만의 유토피아를 찾게 된 것이다. 세상에 곧은 마음을 전하고자 했으나 돌아온 것은 외로운 유배생활뿐이었던 윤선도. 그에게 보길도는 고독함까지도 감싸 안아주는 그만의 유토피아가 아니었을까. 한 때는 정치인으로서 난정을 바로잡고자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유배되고, 왕명으로 복직되었어도 중상모략으로 또 다시 유배생활을 했던 그. 결국 속세를 벗어나 은둔생활을 하려 제주도로 가던 중 풍랑을 피해 잠시 머물게 된 보길도의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 그 곳에 눌러앉게 된다. 특히 은둔 중에 지은 <어부사시사>,<오우가> 등 주옥편의 작품을 남겨 국문학에 큰 획을 그은 윤선도는 세연정, 동천석실, 낙서재 등 그가 사랑한 그만의 유토피아, 보길도에서 생을 마감한다. 400여년이 지난 지금, 옛시인 고산 윤선도를 만나러 보길도를 찾았다. 보길도라는 아름다운 섬에서 시나 읊고, 무희들과 노닐며 신선 놀음을 한 사람 아닌가? 고산(孤山) 윤선도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간혹 이렇게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험한 세월을 보낸 것으로 치면 윤선도의 인생도 그리 녹록지는 않았다. 물론 그의 인생이 잘 뻗어나갈 때도 있었다. 고산 윤선도는 1587년 지금의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종3품을 지낸 윤유심의 차남으로 태어나 광해군 4년 진사시에 급제, 정계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또한 왕자의 스승으로서 경학, 천문, 지리, 문학 등 여러 분야를 통달한 그였었다. 그러나 이내 집권당의 난정을 주도한 정치인들을 고발,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려 유배를 가게 된 것. 그것을 시작으로 20여 년에 가깝게 세 차례나 유배지를 떠돌아야만 했다. 삭탈관직도 그에겐 낯선 일이 아니었다. 가장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은 어린 나이에 급제한 영특한 둘째 아들의 죽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귀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막내 아들의 죽음 소식을 접하게 된다. 두 명의 아들을 잃은 슬픔은 그에겐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난정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리며 곧은 성품을 정계에 쏟아 부었지만 그에게 돌아 온 것은 오랜 유배 생활과 두 아들을 잃은 절망감이었다. 어쩌면 윤선도는 오래 전부터 그의 이상을 채워 줄 그만의 유토피아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노론도 소론도 없는 외딴 섬에서 변심하지 않을 자연을 벗 삼아 그간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싶었는지도. 동천석실은 주자학에서 신선이 산다는 선계세상을 뜻하는 것으로 부용동을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보길도 최고의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다.“거그 올라갈라믄 쉽지 않을 것인디잉~”보길도 청별항 근처에서 전복을 파는 아주머니의 말대로, 동천석실에 오르는 길은 쉽지 않았다. 도로에서부터 동천석실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어른 걸음으로 20여분 정도. 하지만 동천석실에 다다르자, 커다란 바위가 지키고 있다. 그 바위 위에 올려진 동천석실. 그야말로 은둔지로서는 최고지가 아닐까 싶다. 윤선도는 동천석실이 보길도 최고의 절경이라 격찬하기도 했다. 바위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렸는지 매듭지어진 밧줄이 드리워져 있다. 매듭을 잡고 천천히 바위를 하나하나 밟고 올라서자 드디어 동천석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그마한 정자. 기대했던 것보다는 작고 수수했지만 동천석실에서 내려다 본 부용동의 모습은 막혔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듯 넓게 펼쳐져 있다. 왜 윤선도가 동천석실을 최고의 절경이라 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동천석실은 오르는 길 못지 않게 내려가는 길도 좋다. 오를 때보다 더 천천히 내려가다 보면 풀벌레 소리, 바람이 나뭇잎들을 흔들어 대는 소리, 햇살이 나뭇잎 사이사이를 통과해 들어오는 모습 등 자연이 온전히 내 것이 된다. 누가 먼저 돌을 쌓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소원을 비는 돌탑도 눈에 띈다. 윤선도와 보길도를 이야기하자면, 세연정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세연정은 자연 속에 만들어진 비밀정원 같은 곳이다. 세연(洗然)이란 주변의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과연 세연정에 들어서니 동대와 서대를 지나 연못 사이에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는 세연정의 모습이 마음을 잔잔하게 이끈다. 윤선도는 세연정을 사이에 두고 양 옆에 자리한 연못, 세연지에 배를 띄워 놓고 시를 읊기도 하고, 무희들의 노니는 모습을 감상하기도 했다고 한다. 세연정에는 윤선도가 사랑한 칠암(七岩)이 있다. 돌 하나하나에도 이름을 붙여주는 그의 감수성이 엿보인다. 그 중 흑약암은 세연지 계담에 있는 칠암 중의 하나로 이 바위는 '뛸 듯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 세연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놀라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자연 속에 어우러진 정원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인 원리가 적용되었기 때문. 세연정에는 쌀쌀한 날씨에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불을 땠다고 한다. 세연정의 가장자리 부분은 일반 정자와 다름없이 나무이지만 가운데 부분은 불을 때도 타지 않게끔 되어있다. 이 밖에도 판석보는 흐르는 시냇물에 제방을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를 이용하여 세연지에 물을 가두기 위한 시설로 일명 굴뚝다리라고도 부른다. 무희들이 노닐었다는 동대와 서대는 세연정 가까이에 있는데 특히 서대는 나선형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무희들이 춤을 추다 보면 어느새 나선형의 길을 따라 꼭대기에 닿았다고 한다. 낙서재는 윤선도에게 있어서는 보길도 생활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보길도에 정착하면서 가장 먼저 지은 살림집이 바로 낙서재이다. 낙서재는 책을 읽기 좋은 곳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원래 낙서재는 그 터만 덩그러니 남아있었지만 최근에 복원사업을 진행하였다. 낙서재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동천석실이 자리한 산이 펼쳐지고 마을의 논밭도 아기자기하게 보인다. 낙서재에서 책 읽기를 좋아했다는 윤선도는 1671년 이 곳에서 숨을 거둔다. 그가 사랑한 보길도에서 생을 마감한 그는 행복했을까. 검고 납작한 돌들이 예송리 해변에 펼쳐져 있다. 멀리 작은 고깃배가 수평선 위를 장식하고 햇살이 바다 표면에 반사돼 눈이 부시다. 딱히 윤선도 유적지라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 보길도에 머물렀던 윤선도가 예송리 해변에 와서 사색에 잠기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윤선도, 왜 하필이면 보길도에 눌러 앉았을까. 원래 은둔의 목적지로 삼아두었던 제주도로 향해도 됐을 텐데. 그는 폭풍우를 피하기 위해 잠시 들른 이 곳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보길도는 화려한 절경을 지닌 섬은 아니지만 수수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여인네처럼 마음이 끌리는 섬이다. 보길도에 머물다 보면, 윤선도가 왜 보길도와 사랑에 빠졌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보길도 - 주소 :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 문의 : 보길면 관광안내소 061-553-5177 / 보길면사무소 061-550-6623 ※ 위 정보는 2016년 9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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