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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없는 이웃의 소문이 떠돌고 소박한 나눔도 너나없다.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 나오는 동구네 동네다. 오래도록 잊고 지낸 우리네 기억 속 마을이다. 실제 배경은 인천 부평구 십정동. 마을 장면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집집마다 화분 하나씩은 간직한 정겨운 산동네다. “공화국에서는 혁명전사, 이곳에서는 간첩. 난 최정예 스파이인데 내 남파 임무는 달동네 바보 백수 역할.”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주인공 원류환(김수현 분)이 동네 꼬맹이들에게 짱돌을 맞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배경이 된 곳은 인천 부평구 십정동. 예전에 우물이 10개가 있었다 해서 십정동이라 불린다. 산맥이 열십자로 교차해 붙었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어느 쪽이든 대도시 인천의 풍모와는 거리가 있다. 지방의 어느 한적한 마을이어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도시의 이면이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산동네에 바보 백수로 위장한 원류환, 가수 지망생 리해량(박기웅 분), 고등학생 리해진(이현우 분)이 어울려 살아간다. 북한의 남파특수공작부대 출신 간첩인 이들이 마을에 머물며 좌충우돌하는 이야기가 영화의 줄거리다. 수도권 전철 1호선 백운역에 내려 열우물사거리로 향한다. 곧 경원대로 왼쪽에 세무고등학교가 나온다. 고개의 반대편 기슭이 영화를 촬영한 마을이다. 진입로는 조금 더 내려간 대로변에서 150m쯤 안쪽에 있다. 마을의 전경을 품으며 걸어 들어간다. 정면에 문구점을 겸하는 슈퍼가 있다. 한 상점에서 하나 이상의 품목을 겸하는 것이 동네 장사의 기본이던가. 동구가 먹고 자며 일하던 석이슈퍼처럼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 서넛이 오간다. 슈퍼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자 슬슬 동네 안쪽으로 접어든다. 길은 도로에서 왼쪽 경사지로 가지를 뻗듯 연이어 열린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계단이 이어지고, 얼굴을 맞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금세라도 동구가 쌀부대를 들고 뛰쳐나올 것만 같다. 콘크리트 계단에 고운 그림이 그려져 있다. 몇 년 사이에 산동네는 약속이나 한 듯 벽화로 단장했다. 한때는 생경한 풍경이었으나 이제는 눈에 익은 모습이다. 십정동은 2005년부터 몇 해에 걸쳐 열우물길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마을을 조금씩 단장해왔다. 여느 산동네가 그렇듯 현재는 재개발 예정 지역이다. 그런 까닭에 낡은 집이 많고 빈집도 적잖다. 예술 프로젝트는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역사를 기록하려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길가의 좁은 계단을 지나 조금 더 걷는다. 높다란 고층 아파트가 나란하다. 대로변에서 끼쳐오는 개발의 속도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산동네와 대비를 이룬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다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른다. 벽을 장식한 낙서 같은 그림에 ‘낙서금지’가 제목처럼 적혀 있다. 화려한 화폭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과 소박한 꿈을 담은 그림이다. 개발 논리에 밀린 시간을 몇몇 그림이 꼭 말아 쥐고 있다. 몇 걸음 못 디뎌 이번에는 옆으로 난 작은 골목에 눈길이 간다. 나팔꽃이 곱다. 지지대를 타고 옥상까지 기어오른다. 한두 송이씩 줄줄이 핀 꽃은 건물 정상에 다다라 가장 만발했다. “꽃이 참 예쁘지? 그런데 저기 위쪽에만 활짝 폈어. 넝쿨 중간쯤을 잘라줘야 아래쪽에 꽃들이 필 텐데….” 집 앞에 내놓은 화분을 손질하던 동네 아주머니의 푸념 섞인 자랑이다. 먼 데 꽃을 가까이 두고 보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나팔꽃 넝쿨 아래에는 동그란 화분에 봉숭아를 심었다. 잎은 무성한데 꽃은 아직 소식이 없다. 그 그늘에는 노란 장미가 살포시 꽃망울을 틔웠다. 자그마한 화분 틈새에 누군가 심은 꽃이다. 하지만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없단다. 범인 찾기는 싱겁게 끝이 난다. 옆집에서 나온 아주머니가 노란 장미의 안부를 묻는다. “잘 자라? 그거 내가 심었지.” 두 아주머니의 도란도란한 꽃 대화다. 곁에 앉아 잠깐 귀동냥한다. 이웃집 화분에만 심었을까. 동네의 틈새마다 꽃 한 송이씩 심었단다. “꽃 싫은 사람 있냐?” 아주머니가 되묻는다. 당신 집 앞에는 조금 더 특별한 풍경이 펼쳐진다. 골목 위로 머루터널이 났다. 도심의 골목을 걷다가 머리 위로 알알이 맺힌 머루를 맞이할 줄 누가 알았으랴. 그 숨결마다 사람의 손길이 정성스럽다. 마을 곳곳에는 벽화 못지않게 길가의 꽃들도 정겹다. 텃밭을 대신한 알뜰한 푸성귀도 귀하지만 그 사이로 어김없이 꽃들이 반긴다. 가쁜 삶에 숨통이 트이는 여유다. 골목이 지닌 비밀스런 일상이다. 눈길 닿는 대로 발길이 좇아간다. 영화의 풍경도 자연스레 만난다. 영화에서 십정동은 단순한 배경 그 이상이며, 밑바탕을 이루는 정서다. 돌아갈 곳을 잃은 세 간첩이 정 붙이고 살아갈 만한 동네다. 실제 마을의 모습을 녹여 영화에 색을 입혔다. 그럼에도 수월하게 낯익은 풍경을 찾고 싶다면 열우물로 102번길을 찾아가 보자. 열우물로 102번길은 마을의 광장 같은 오르막이다.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를 가로듯 올라간다. 그 주변으로 층층의 집들이 모여 앉았다. 영화에서는 석이슈퍼 앞 도로로 나온다.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곳이요, 바보 동구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감나게 넘어지는, 바보 잠행의 행동강령을 실천에 옮기며 아침을 열던 곳이다. 또 매일 아침 비질을 하며 사람들과 인사하고 행동을 파악하던 ‘요충지’다. “동구 씨는 참 부지런하세요”라던 동구의 짝사랑 유란이 지나가고, 곧 “우리 누나에게 껄떡대면 죽는다” 위협하며 유란의 동생 유준이 지나간다. 때로는 동구가 치웅이와 세웅이의 돌팔매질을 피해 도망 다니고 주문받은 물품을 들고 배달을 나서기도 한다. 사통팔달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의 중심을 이루던 석이슈퍼는 사라지고 없다. 세트로 지은 건물로 촬영이 끝난 후에 허물었다. 그 자리에는 어느새 초록 잎이 무성한 작은 텃밭이 들어섰다. 대신 석이슈퍼 곁의 스마일 그림이 반긴다. 이를 활짝 드러낸 채 웃는 모습이 동구를 닮았다. 길 건너편 판자 건물도 운명이 다르지 않다. 순임이 꼭꼭 눌러 담은 쓰레기봉투를 동구가 발로 찢어버렸던 곳이다. 이제 세트에 가려졌던 마을 풍경이 드러난다. 빨래를 널어놓은 벽화를 담은 집이다. 벽화 앞은 그림과 비슷한 상황이다. 빨래건조대에서 젖은 옷가지가 햇볕을 쬐고 있다. 잠깐 멈춰 서서 풍경을 지켜보노라니 현실과 한 걸음 떨어져 살았던 동구가 된 듯하다. 영화의 흔적은 오히려 열우물로 102번길 언덕배기에 짙게 남았다. 낯익은 뒷모습, 동구를 연상시키는 벽화다. 더벅머리에 초록색 추리닝과 남색 슬리퍼가 누구 봐도 동구다. 영화 후반부에 누군가 동네 담벼락에 동구의 모습을 그렸다. 그를 그리워하던 사람들의 마음이었을까. 벽 뒤에서 몰래 지켜보는 뒷모습 그림이 마음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없었던 동구의 심정을 대변한다. 괜스레 동구의 대사 한 자락이 귓가에 울린다. “두려웠다. 어렸을 때는 배식이 끊길까 두려웠고, 훈련받을 때는 생존하지 못할까, 당에서 버려질까 두려웠다. 지금은 내가 변할까봐 두렵다.” 동구 벽화 곁에 서자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고 삶이다. 동구는 그 지붕들을 뛰어다니며 세웅의 형 치웅을 찾아 나서고, 유란과 두석을 그들 모르게 위기에서 구하고, 술 취한 란을 위로하며 마을의 일원이 돼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변할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정들까 두려웠을 것이다. 언덕배기 사거리 한쪽 벽면에는 마을과 벽화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가 붙었다. 어느 동네든 골목은 미로 같다. 참고해서 돌아보면 좋겠다. 지나온 길의 가을풍경 벽화는 예전에 석이슈퍼가 있던 자리 옆이다. 동구의 뒷모습 벽화를 끼고 걷는 길은 선형 벽화와 바람개비 계단으로 이어진다. 사이사이 전봇대나 벽에도 크고 작은 벽화가 그려졌다. 그 오르막길 가장 높은 자리에 바람개비 계단이 있다. 영화에서 석이슈퍼만큼이나 중요한 장소였다. 리해량과 란(이채영 분)이 세 들어 살던 고 영감(장광 분)네 집이다. 순임이 닭백숙을 만들어 마을 잔치가 열렸던 집이다. 굳건하던 동구의 마음에 그때부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람개비가 그려진 계단을 오르니 빈터에 자그마한 텃밭이 먼저 반긴다. 담장 너머 고목이 바깥으로 그늘을 드리운다. 뒤를 돌아보니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계단 위에 바람만 그림 주변을 팔랑인다. 동구는 술 취한 란을 업고 그 계단을 올랐고, 리해량과는 연어가 될 자신들의 미래를 예감하는 대화를 나눴다. 초입에서 제일 높은 곳까지, 동네 어디에도 동구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하지만 동구가 마음을 심은 자리는 한 곳이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바보 동구는 늘 똑같이 초록색 추리닝만 걸치고 여기도, 여기에도 그렇게도 있었으니까.” 영화의 마지막에 순임은 동구의 자취를 찾아 골목을 헤맨다. 그녀에게 동구는 이미 둘째 아들이다. 그리고 동구에게도 그녀는 어머니나 다름없다. 석이슈퍼 맞은편 삼성기계로 향하는 골목 어디에선가 그 고백이 숨은 그림처럼 남아 순임을 반겼다. 동구가 벽에 써두고 간 짧은 문구다. 영화가 끝나고 세트는 사라졌어도 동구가 남긴 마지막 인사는 지워지지 않았다. “엄마 아프지 마요.” 십정동 열우물길은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동네는 아니다. 어느 날 우연히 생각나 걸음을 내면 영화와 겹치는 마음 따스한 풍광을 찾을 수 있다. 사람 사는 동네에 대한 예의만 지킨다면 간간이 말을 건네는 주민들도 정감을 더한다. 그것은 은밀하게 숨어들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위대한 삶의 정서다. <위대하게 은밀하게> 제작팀이 4개월 동안 전국 60여 곳에 달하는 후보지를 헤매다 찾아낸 곳, 바보 동구이자 남파 간첩 원류환의 마음의 고향이다. 1.찾아가는길 * 자가운전 경인고속도로 가좌IC → 가좌사거리 백범로 방면 → 십정사거리에서 좌회전 → 부평금호어울림아파트를 끼고 우회전 → 십정동 골목 * 대중교통 지하철 1호선 백운역 2번 출구로 나와 부평도서관 앞에서 시내버스 10번, 23번, 35번 이용. 세무고등학교 앞에서 내려 부평금호어울림아파트 옆길로 150m쯤 들어간다. 2.주변 음식점 온누리진흙구이 : 오리진흙구이 / 부평구 경인로 749 / 032-525-8199 www.onnurifs.com 소금빛풍천장어 : 장어구이 / 부평구 길주로547번길 5 / 032-513-9995 www.wkddj.com 스시애 : 회전초밥 / 부평구 부흥로 261 / 032-506-5550 3.숙소 호텔버스 : 부평구 경원대로1367번길 18-12 / 032-519-8808 박스도로시(부평2센터) : 부평구 부평문화로116번길 17 / 032-523-2668, 032-523-2669 - 글, 사진 : 박상준(여행작가) ※ 위 정보는 2019년 3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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