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2년, 정약용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균관 유생일 때, 과거급제 후 벼슬살이를 할 때에도 수시로 마재마을에 내려올 정도로, 고향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그렇게 그리운 고향을 떠나 긴 유배생활을 지냈고 마침내 찾아온 고향에서 삶을 정리할 수 있었던 정약용. 그가 태어난 지 250년이 지난 지금, 다산 유적지로 꾸며진 마재마을을 찾아갔다.
때마침 '다산 문화제'가 진행돼 다산 유적지가 들뜬 분위기다. 수도권 외곽이라는 강점 덕분에 경기도에는 축제가 많다. 다산 문화제는 경기도의 대표적인 축제로, 정약용의 가르침을 알리고 다양한 전시, 공연, 작품, 대회 등으로 다산 유적지 일대를 축제의 장으로 꾸며 시민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 올해로 28회째를 맞았다. 다산 유적지로 처음 방문했다면 실학박물관을 거쳐 다산 문화관·다산 전시관(이하 문화관, 전시관) 순으로 가는 동선을 추천한다. 실학박물관은 조선 후기 실학에 관한 이야기와 정약용의 일대기가 알기 쉽게 전시돼, 시대와 정약용을 서로 매치시켜가며 자연스럽게 당시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조선 후기는 학파의 분열·대립으로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사회 질서가 붕괴되는 상황 속에서 백성은 더욱 힘들었다. 하지만 조정은 탁상공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백성의 고충과 상관없이 권력 유지에만 힘쓰고 있었다. 이에 새로운 학풍이 일어났으니, 실학이다. 이후 실학이 발전하면서 농업과 상업의 발달 그리고 대외개방 지향 등 여러 개혁이 이뤄지고 시도됐다. 이 같은 실학을 집대성한 사람이 정약용이다. 문화관과 전시관에서는 정약용의 실학에 초점을 맞췄다. 이익의 학통을 이어받은 정약용은 정치기구 개혁,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을 위한 공평한 대가와 분배, 노비제 폐기 등을 주장했으며 정치, 경제, 문학, 의학, 군사학 등 학분 전반에 걸친 책을 저술했다. 이와 관련한 전시를 엿볼 수 있다. 게다가 정약용은 조선시대 과학 발전을 이끈 기여도 크다. 문화관에서 정조가 수원의 사도세자의 묘소로 참배하러 가는 모습의 능행도를 볼 수 있는데, 한강을 건너는 그림 속 배다리를 설계한 사람이 정약용이다. 이외에도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거중기를 고안해 건축에 많은 도움을 줬다. 다산 유적지에서 정약용의 이야기를 접하는 동시에 축제가 더해지니 즐겁기까지 하다. 본격적으로 '다산 문화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으로 가보자. 정약용 생가 '여유당'으로 이어진 입구, 포졸과 수문장이 서 있다. 외삼문를 지나면 다양한 행사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접수처가 있다. 문예대회는 나이별로 구분돼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참여할 수 있어 글솜씨를 뽐내도 좋겠다. 이렇게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이미 근방의 잔디밭이 만원이다. 체험, 참여, 학습 등으로 축제의 한 구성원이 되는 다산 문화제,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다. 얼마 안 되는 그늘과 담장 근처는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다. 어쩔 수 없이 양지에 자리를 마련한 가족들, 그림 그리는 아이에게 우산으로 그늘을 만들어주는 어머니 모습이 흔하다. 고사리 손이지만 붓놀림과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뭔가 작품이 나올 듯한 기세다. 친구,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한편에 자리를 잡고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 외삼문을 등지고 오른편으로 1986년에 복원된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이 있다. 외부로 트인 사랑채에서는 다듬이질 공연, 목민심서 해설 등 흔히 볼 수 없는 공연이 이뤄졌다. 생가 내부에서는 다례 체험이 진행되고 있으며, 좋은 풍경이 보이는 구석구석에는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있다. 여유당 사랑채 앞으로 설치된 다리 모양 조형물엔 큰 의미가 담겨 있다. 능행도에서 본 배다리의 모형이다. 정조는 배다리로 한강을 건너 수원의 사도세자 왕릉까지 행차할 수 있었고, 배다리를 설계한 정약용은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다산 유적지에 왔다면 꼭 들려봐야 할 곳이 여유당 뒷산에 있는 정약용 묘소이다. 약 5분이면 다 오르는 높이지만, 올라가는 동안 정약용 선생의 일대기를 상기해본다.
문턱이 높기로 유명했던 성균관에 정약용은 23세의 나이로 입성한다. 이후 28세에 문과 급제하면서 벼슬살이를 시작. 이후 배다리, 거중기 등을 설계하면서 나랏일에 큰 도움을 줬다. 이후 10여 년 동안 조정에 몸을 담았으나 모함과 역모가 많았기에 10일짜리 유배를 가기도 했다. 또한 암행어사로 경기도를 돌며 군수의 폭정을 처벌, 백성의 고통을 목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정조의 서거 이후부터 큰 시련이 시작된다. 조정 내 당쟁, 천주교 탄압 등이 빈번해지면서 정약용은 유배형을 받게 되고 끝내 전남 강진에서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게 된다. 억울했을 것이고 정조의 서거로 슬픔이 가라앉지도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유배기간이 끝난 후에도 실학을 통한 나라발전을 위해 학문 닦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약용의 실학을 '다산학'이라고도 하는데, 이 학문에 관한 500여 권의 저서가 대부분 유배지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유배가 끝난 57세의 정약용은 고향으로 내려와 7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목민심서를 완성. 그 외에도 흠흠신서, 아언각비 등의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 묘소 앞, '유배생활 동안 얼마나 이곳이 그리우셨겠습니까' 지금은 평안하신지 한번 여쭤본다. 뒤를 돌아 멀리 두물머리,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져 한강으로 흐르는 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본다. 묘소에서 내려와 행사장 주변을 돌아보는데 볼거리가 끊이질 않고 발견된다. 수원성의 모형으로 보이는 작은 성 주위로 아이들이 스티로폼 벽돌을 쌓고 있다. 거중기를 설계해 수원성 건축에 큰 도움을 준 정약용과 관련 있는 체험인 것을 아이들은 알까. 당시 거중기의 효과는 4만냥(1냥을 7만원으로 환산 시, 약 28억원에 해당)을 절약하고 많은 백성이 부역에 동원되지 않아도 되는 효과를 가져다줬다. 물론 다산 유적지에서 거중기를 볼 수 있으며 축제기간에는 거중기 체험시설도 마련돼 있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도르래와 그 효과를 직접 알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 과학적 체험거리다. 이렇게 쌓인 추억은 훗날 아이들이 역사를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된다. 마재마을을 두르며 한강과 이어지는 다산길도 걷기 좋다. 약 3.4km의 코스로 수련이 오밀조밀 자라는 개천, 한강변 공원 등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풍기는 산책로다. 특히 작은 개천은 예로부터 소내, 소천, 초천이라고도 전해지며 이 이름은 정약용의 별호로도 사용됐다. 개천을 따라 한강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가자. 근방에 한강 가까이 조성된 공원, '실학생태공원'이다. 한편에 마련된 축제무대에서는 줄타기, 전통음악공연, 연극 등이 시간대별로 공연하면서 사람들을 모은다. 특히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남사당놀이 공연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다. 다음 축제가 열리기 전까지, 호젓한 분위기가 다시 마재마을에 내려앉았다. 두물머리와 정약용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다산 유적지, 언제 찾아가도 정약용 선생은 따뜻한 환영으로 반길 것이다. 1.주변 음식점 토방촌 : 민물매운탕 / 031-555-5575 수사골송어 : 송어회, 송어매운탕 / 031-575-6888 초대 : 장어정식, 게장정식 / 031-557-7318 돌고래 : 쏘가리매운탕, 장어구이 / 031-576-0166 2.숙소 아도니스모텔 : 경기 양평군 강하면 운심리 / 031-775-3101 마루힐모텔 : 경기 양평군 양서면 복포리 / 031-775-9811 E모텔 : 경기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 / 031-771-8676 글, 사진 : 한국관광공사 국내스마트관광팀 안정수 취재기자( ahn856@gmail.com ) ※ 위 정보는 2014년 9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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