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를 접고 조선을 열었다. 늙은 고려의 회복보다는 새 생명으로 호흡하는 새 나라가 필요했다. 그 나라는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체제이기를 바랐다. 굶어 죽는 백성들이 없는 나라, 옛 영토의 회복을 꿈꿀 수 있는 강한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그 중심에 삼봉 정도전이 있었다. 국운이 기운 고려의 회생보다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택했던 삼봉 정도전은 이성계를 만나 함께 조선을 세웠다.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국가의 기틀을 잡기 위해 《조선경국전》 등을 만들었으며 한양 천도와 한양도성 축성, 궁궐 건설까지 모든 것을 맡았던 정도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새 나라에서 정도전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 속에서 국가 운영 시스템을 구축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신하였고, 그의 위에는 만인지상, 권력의 절대점인 왕이 있었다. 강력한 왕권으로 나라를 통치하려 했던 이방원은 언젠가는 풀어야 할 매듭이었다. 정도전 등이 지지한 방석이 세자가 되자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이방원 등은 불만이 많았다. 당시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세운 정도전은 실질적인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반면, 이방원은 세자에도 오르지 못한 일개 왕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방원의 기개를 알고 있는 정도전은 그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계책의 하나로 정도전은 왕자들의 사병을 없애야 한다고 이성계에게 건의했다.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또 다른 계책도 필요했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병이 위독하다는 핑계로 왕자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일시에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의안군 이화가 정도전의 계획을 알고 이방원에게 알렸다. 이렇게 해서 이방원은 정도전의 계획을 알게 됐지만 정도전은 이방원이 자신의 계획을 눈치 챘다는 걸 몰랐다. 그러니 이방원이 어떻게 반격할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결국 정도전과 이방원, 둘 중 누가 먼저 공격 타이밍을 잡는가가 문제였다. 첫수는 수순대로 정도전이 던졌다. 정도전과 뜻을 함께했던 조순은 교지를 통해 “내가 병이 심하니 사람을 접견하고 싶지 않다. 다만 세자 외에는 들어와서 보지 못하게 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왕자들을 한곳에 불러모으려는 정도전의 계책이었다. 하지만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의 병을 핑계 삼아 자신을 비롯한 왕자들을 제거하려는 정도전의 속셈을 읽고 있었다. 이성계의 병세가 악화되자 이방원과 이방의, 이방간, 심종, 이백경, 이화, 이제 등이 근정문 밖 서쪽 행랑에 모였다. 같은 날 오후 3~5시경 이방원의 처남 민무질은 이방원의 사가에 도착해서 누나이자 이방원의 부인 민씨와 이 일에 관한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이방원의 부인은 종 소근을 불러 대궐에 가서 이방원을 모셔오게 했다. 부인은 자신의 배가 몹시 아프다는 핑계를 대게 했다. 이에 이방원이 사저로 돌아왔고, 잠시 후에 민무질이 다시 와 함께 모였다. 이방원의 부인은 남편의 옷을 잡으며 입궐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형제들이 사지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냥 두고 볼 이방원이 아니었다. 10여 일 전에 왕자들의 사병을 폐하고 모든 무기를 없앤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방원의 부인은 몰래 무기를 사가에 숨겨놓았다. 오늘 같은 날이 올 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무질과 이무, 박포 등이 정도전 쪽의 동정을 정탐했다. 이방원은 민무구를 시켜 이숙번에게 병갑을 준비해서 신극례의 집에 머물고 있으라고 명령했다. 그러고 나서 대궐로 들어가며 종 소근에게 궁궐 서쪽 행랑 뒤에서 말을 대기하고 있으라고 시켰다. 어둠이 내릴 무렵 왕의 처소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 임금의 병이 위급하니 왕자들만 안으로 들고 종들은 모두 머물라고 일렀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이방원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밤이 되면 궁궐의 문에 반드시 등불을 밝히는데 불이 없었던 것이다. 이방원은 배가 아프다며 서쪽 행랑 문밖으로 나와서 잠시 고민했다. 이때 익안군과 회안군 등이 와서 이방원과 이야기를 나눈 뒤 궁궐을 나와 이숙번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숙번이 장사 두 사람을 거느리고 갑옷 차림으로 나왔고, 익안군과 상당군, 회안군 등도 말을 타고 나왔다. 이거이, 조영무, 신극례, 서익, 문빈, 심귀령, 민무구, 민무질 등이 모였다. 이방원은 부인이 준비해둔 무기를 군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때가 밤 9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정도전은 몇몇 사람들과 남은의 첩이 사는 집에 모여 있었다. 이방원은 정도전이 그곳에 있는 것을 알고 집을 포위한 뒤 인근 집에 불을 질렀다. 불이 난 것을 알고 밖으로 나온 사람들 중 심효생, 이근, 장지화 등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 정도전은 이웃집으로 피했으나 결국 이방원에게 잡혔다. 이방원은 정도전의 목을 베게 하였다. 이 일로 정도전은 조선의 개국공신임에도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지 못했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 등의 죄를 물을 때에도 정도전을 흠모한 것을 들추었다고 하니 정도전은 수백 년 동안 사면 복권되지 못했던 것이다. 정도전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정조 때다. 정조는 정도전을 추모하면서 《삼봉집》을 간행했다. 또 고종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조선 개국과 한양도성 및 경복궁 건설의 공을 인정해 정도전에게 ‘문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전남 나주시 다시면 백룡산 자락 소재동은 삼봉 정도전이 3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나주시는 그의 유배지에 초가를 짓고 비석을 세워 여행자를 반기고 있다. 권문세족의 친원정책을 반대하던 정도전에게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영접사의 일을 맡겼는데 정도전이 거부하자 이를 빌미로 그를 나주 소재동으로 유배시켰다. 정도전의 나이 34세 때 일이다. 소재동은 나주의 속현인 회진현이 관할하던 촌락으로 농사를 짓는 양민들이 살고 있었다. 정도전은 소재동에 유배된 3년 동안 그의 정치철학에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민본정치의 싹을 틔우게 된다. 정도전 유배지 초입에 가면 도올 김용옥의 글을 새긴 비석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로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고향 영주와 삼각산, 부평, 김포 등지를 전전하면서 개혁사상을 키웠다. 고려 우왕 9년(1383), 이성계와 혁명을 모의하고 도탄에 빠진 농민을 위하여 전제개혁을 성공한 뒤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왕조 건설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도전과 이성계의 첫 대면을 이렇게 적고 있다. 임금(이성계-글쓴이가 삽입)을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군영 앞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도전이 소나무 위에 시를 남기겠다 하고서 껍질을 벗기고 썼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아득한 세월 한 그루 소나무 / 몇만 겹의 청산에서 생장하였네 /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는지 / 인간은 살다 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 정도전이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냐고 말한 것은 왜구의 토벌이 아니라 조선의 건국이었을 것이다.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은 《고려국사》, 《조선경국전》 등을 써서 새 왕조의 통치 이념을 정립하고 수도 한양의 성곽과 도시 설계를 주도했으며, 이를 찬양하는 <신도가>를 지었다. 그는 또 요동 정벌을 위해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정도전이 살던 집은 지금의 종로구청 자리다. 종로구청 건물 한쪽에 정도전의 집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에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이 살던 집터. 후일 사복시, 제용감이 이 자리에 들어섰고 일제 때에는 수송국민학교가 있었다”라고 적혀 있다. 이를 근거로 정도전이 살던 집터의 규모를 유추해볼 수 있다. 정도전의 집은 엄청난 규모였다. 구청 뒤 The-K 트윈타워 앞에 제용감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는 걸로 봐서 최소한 그곳까지 정도전의 집터였을 것이다. 그리고 종로구청 본관 건물이 옛날 수송초등학교였으니 이곳 또한 정도전의 집터임이 분명하다. 현재 종로구청 본관 건물 1층에는 ‘삼봉서랑’이라는 작은 도서관이 들어섰다. 정도전의 고향인 경북 영주에 가면 삼판서 고택이 있다. 이 집에서 3명의 판서가 나왔다고 해서 삼판서 고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맨 먼저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판서에 올랐다. 정운경은 사위 황유정에게 집을 물려주었는데 그 또한 공조판서를 지냈다. 황유정도 사위 김소량에게 집을 물려주었고, 김소량의 아들 김담이 이조판서에 올랐다. 이 집에서 배출된 사람 중에 사헌부 지평 황전, 집현전 학사 김증 등이 있다. 정도전은 이 집의 주인이 되지 못했지만 타향에서 돌아와 머물며 심신을 달랬다. 정도전이 삼판서 고택에 머물며 쓴 시가 있다. “한 그루 배꽃은 눈부시게 밝은데 / 지저귀는 산새는 봄볕을 희롱하네 / 은둔자 홀로 앉아 무심하니 / 뜰에 제 스스로 돋아난 풀만 한가로이 바라보네.” 삼판서 고택 주소 : 경북 영주시 선비로181번길 56-1 문의 : 054-631-0444 정도전 유배지 주소 : 전남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622 문의 : 061-339-8592 정도전 집터(표지석) 주소 : 서울 종로구 삼봉로 43(현 종로구청) 문의 : 다산콜센터 120 1.찾아가는길 * 자가운전 삼판서 고택 : 중앙고속도로 풍기IC → 영주 시내 방향 → 영주교 → 영일사거리에서 우회전 → 세무서사거리에서 우회전 → 영주공공도서관에 주차 → 둑방으로 올라서서 우회전 → 삼판서 고택 정도전 유배지 : 무안광주고속도로 나주IC → 노안삼도로에서 나주 방향 → 영산로 → 다시면 → 월암로 → 백동교 → 백동마을 → 정도전 유배지 정도전 집터 : 한남대교 → 남산1호터널 → 종로2가 사거리에서 좌회전 → 종로구청사거리에서 우회전 → 종로구청 * 대중교통 삼판서 고택 :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영주까지 하루 30회(06:15-21:45) 운행, 2시간 30분 소요.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하루 10회(07:10-20:40) 운행. 영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보 약 1.6km. 택시를 이용할 경우 영주공공도서관(세무서 옆)에서 내리면 된다. 정도전 유배지 :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나주까지 하루 5회(07:10-18:35) 운행, 4시간 소요. 광주까지 이동 후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방법도 있다. 기차는 용산역에서 1일 12회(07:05-23:10) 운행. 나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다시, 신경 방향 502번 시내버스(약 2시간 간격 운행)를 타고 신경 정류장에서 하차, 10분쯤 걸어가면 된다. 정도전 집터 :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에서 약 270m 2.주변 음식점 하얀집 : 곰탕 / 전남 나주시 금성관길 6-1 / 061-333-4292 http://cityfood.co.kr/h9/najugomtang4 중앙분식 : 쫄면 / 경북 영주시 중앙로 123-1 / 054-635-7367 장군보쌈 : 굴보쌈‧왕족발 / 서울 종로구 수표로20길 22 / 02-2274-9548 3.숙소 나주목사내아 : 전남 나주시 금성관길 13-10 / 061-332-6565 호텔위즈 : 경북 영주시 선비로119번길 3 / 054-633-0020, 054-633-0021 http://www.hotelwiz.co.kr/ 효선당 : 서울 종로구 율곡로5길 18-12 / 02-725-7979 http://www.hyosundang.com/ 글, 사진 : 장태동(여행작가) ※ 위 정보는 2019년 10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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