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버지 다음 왕 자리는 내 차례인데, 갑자기 나라가 없어진다면 어떤 심정일까. 상실감이 이만저만 아닐 테다. 신라 마지막 왕 제56대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의 이야기다. 견훤의 후백제와 왕건의 고려가 압박해오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던 천년 왕조 신라 경순왕은 나라를 자진해서 고려에 귀속하고자 했다. 가장 반대한 사람은 아들 마의태자다. 자신이 다음 왕을 할 차례인데 이게 웬 청천의 날벼락인가. 마의태자는 천년 왕조 신라가 본디 제 운명이 있을 텐데 목숨을 다해 싸워보지도 않고 나라를 바친다는 것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반면 아버지 경순왕은 이종사촌이자 바로 앞 왕인 경애왕이 경주에서 견훤에게 죽임을 당했고,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는 도저히 두 나라를 상대할 수 없어 무고한 백성의 목숨이라도 보전하고자 내린 결단이었다. 마의태자는 통곡해야 했다. 아버지 경순왕과 신하들의 긴 행렬은 고려 수도 개경으로 향하는데, 마의태자는 눈물을 훔치며 금강산으로 향했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갈 때 거쳐 갔다는 곳이 여러 곳에 전설로 남아 있다. 경기도 양평 땅, 경주에서 개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마의태자가 동해안으로 곧바로 금강산을 향하지 않고 굳이 양평까지 온 이유는 알 수 없다. 혹시 개경 행렬로 함께 가다가 여기서 이탈해 금강산으로 향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금강산에서 초근목피로 버티며 항쟁했다는 전설도 남아 있다. 양평의 산 높고 계곡 깊은 곳의 용문사에 들러 천년 왕조를 잃은 설움을 한탄하며 다시 천년을 살 은행나무를 심고 떠났다고 전해온다. 그 은행나무는 지금 1100살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가 서기 935년에 고려에 복속되었으니 2023년은 그로부터 1088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럼 갓 싹이 튼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얘기다. 또 다른 전설도 있다.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아서 자란 나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의상대사는 서기 702년까지 살았던 스님이니 이 은행나무가 230살을 더 먹었다면 나이 계산으로는 맞을 수 있다.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은행나무로 알려졌다. 천 살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하게 매년 은행 열매를 절에 안겨준다.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매년 5석 안팎의 은행 열매를 생산한다. 마의태자의 한이 이 은행나무에도 남아 있는 걸까.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나무에서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목재로 쓰기 위해 톱을 대자 그 자리에서 피가 났다는 이야기와 1907년 정미의병 때 일본군이 용문사에 방화했지만 이 은행나무만 타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여러 차례 큰 일이 일어났을 때 나무가 위험신호를 내기도 했다 하니 참으로 마의태자의 울분을 느껴보는 듯하다. 세종 때는 수양대군이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를 위해 용문사를 대거 중창했고 은행나무에 당상관 벼슬도 내렸다.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는다. 고목은 그 나이만으로도 충분히 신령스러워 숭배의 대상이 되곤 한다. 경외감과 함께 그 나이만큼의 영험한 기운을 받고자 함이 깔려있다. 이 은행나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용문사를 찾는다. 덕분에 지역경제 창출 효과도 천문학적이다. 누구나가 기념비가 될 나무 한 그루씩 심는 것도 좋을 듯하다. 용문사 이름의 ‘용문(龍門)’은 용이 되는 관문을 뜻한다. 중국 황하 상류의 거센 폭포수에서 잉어 떼가 뛰어오르지만 불과 몇 마리만 올라갈 수 있다. 거기에 올라야 용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기에, 어려운 시험 등 관문을 통과하는 것을 ‘등용문’이라 한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서울 노원구 중계동 학원가 ‘은행사거리(은사)’라는 명칭도 낳았다. 용문사 은행나무 가지를 심은 후손목으로, 현재 600살쯤 되었다고 한다. 용문사 템플스테이는 주말-체험형과 휴식형이 있다. 주말-체험형은 첫날 오후 3시에 시작해 사찰 예절, 명상, 타종 체험, 예불, 스님과 차담에 이어 이튿날에는 도량석(새벽에 목탁을 두드리며 경내를 도는 의식), 새벽 예불, 스님과 요가, 단주 만들기 등이 있으며 점심 공양 후 하산한다. 휴식형 역시 첫날은 오후 3시에 시작하며 사찰 예절, 명상, 예불, 스님과 차담 캠프파이어(목, 금, 토)에 이어 이튿날에는 새벽 예불, 아침 공양 후 자유시간, 점심 공양 후 하산한다. <당일 여행 코스> 용문사 → 구둔역 → 세미원 → 두물머리 <1박 2일 여행 코스> (첫째 날) 용문사 → 양평양떼목장 → 구둔역 → 중미산천문대 (둘째 날) 양평 쉬자파크 → 세미원 → 두물머리 → 황순원문학관 소나기마을 구례 화엄사에는 영조대왕의 탄생 이야기가 신비롭게 전해온다. 숭유억불의 조선 시대지만 왕족들이 불교의 의존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런데 한양의 영조 임금이 저 멀리 전라도 구례 땅 사찰과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영조 임금의 아버지는 숙종 임금이다. 숙종은 유난히 자식 복이 없는 왕이었다. 첫 왕비 인경왕후는 딸 둘을 낳았으나 둘 다 일찍 죽었고 자신도 스무 살에 요절했으며, 둘째 인현왕후와 셋째 인원왕후는 자식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숙종은 후궁 출신 장희빈과의 사이에서 제20대 경종이 된 윤을 낳았고 이어 무수리 출신 최씨와의 사이에서 연잉군(훗날 영조)을 낳았다. 이 역사적 사실이 화엄사에선 전설로 각색되어 오기를, 화엄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상징 건물 장륙전을 중건하려 하는데 돈이 없었다. 중건을 담당했던 성능 스님이 기도를 하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내일 화주(시주 받는 일)하러 떠나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 하고는 사라졌다. 그런데 다음날 처음 만난 사람은 절에서 밥 얻어먹던 가난한 노인이었다. 실망감 속에 시주를 권했다. 노인은 “이 몸이 죽어 왕궁에서 태어나 큰 불사를 행하겠으니, 부디 문수대성은 큰 가피를 내리소서.” 하고는 늪에 몸을 던져 숨졌다. 몇 년 후 서울 창덕궁 앞에 나들이를 나온 공주가 성능 스님을 발견하자마자 반가워 매달렸다. 한쪽 손을 펴지 못했던 공주의 손을 스님이 만지자 펴졌다. 손바닥에는 ‘장륙전’이란 글이 쓰여 있었다. 공주의 손이 펴지자 숙종은 크게 기뻐하며 화엄사 중창 불사와 함께 ‘각황전(覺皇殿)’ 사액 현판을 내렸다. ‘임금을 깨우치게 한 전각’이란 뜻이다. 불구의 손을 고쳐준 화엄사 스님에게 숙종이 중창 불사라는 선물을 안긴 내용이다. 죽은 노인이 공주로 환생했고, 영조가 공주로 각색된 내용이 눈길을 끈다. 화엄사 각황전 상량문 기록에서 밝혀진 사실은, 1694년 태어난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와 함께 대 시주자였다. 숙빈 최씨는 어린 아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화엄사를 원당으로 삼았다. 과연 그 덕분인지 영조는 조선 27명의 왕 중 83세로 가장 장수하며 무려 52년을 재위한 행운을 누렸다. 대한제국 역사까지 포함한 518년 조선의 역사 중 혼자 10분의 1 이상의 기간을 통치한 왕이다. 당시 왕권에 도전한 당파세력이나 개인적 허약 체질에도 불구하고 장수했으니 철저한 자기관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어떤 기운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어머니 숙빈 최씨의 특별한 기도가 있었다. 숙빈 최씨가 기도에 매달려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 늘 장희빈에 시달리다 낳은 첫아들이 두 달 만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국 기도처에 다시 아들 출산을 빌었고 마침내 영조가 태어났다. 태어났으니 이번엔 죽지 않고 오래 살아야 했다. 그렇게 다시 무병장수를 기원했던 기도처 중 하나가 화엄사였고 그곳의 각황전 중건 때 아들과 자신의 이름으로 크게 시주한 것이다. 숙빈 최씨의 기도는 가장 성공한 기도로 꼽을 만하다. 화엄사는 임진왜란 때 대가람이 모두 불탔다. 화엄사 승려들은 의병들에게 군량미를 공급하고 스스로 의승병이 되어 왜군에 맞서 항전하다 모두 전사했다. 왜군은 승려들의 사찰인 화엄사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때 장륙전 내벽의 화엄석경이 모두 파손됐다. 파손된 석경은 화엄사 성보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역사와 전통의 사찰 화엄사에서의 템플스테이는 요가와 함께하는 템플스테이(2박 3일)와 체험형(1박 2일), 완전 휴식형(1박 2일)이 있다. 요가와 함께하는 템플스테이는 첫날 오후 2시 30분에 시작한다. 저녁 공양 후 사물연주 관람과 저녁 예불(자율), 이튿날엔 새벽 예불(자율), 요가 체험, 점심 공양 후엔 휴식, 저녁 공양 후 다시 사물연주 관람과 저녁 예불(자율), 사흘 째는 새벽 예불(자율), 산행 및 포행, 소감문 작성, 점심 공양 후 하산한다. 체험형은 첫날 오후 2시 30분에 시작하며 사찰 안내와 저녁 공양 후 사물연주 관람 및 저녁 예불, 이튿날엔 새벽 사물연주 관람 및 아침 예불, 아침 공양 후 숲길 포행, 소감문 작성, 점심 공양 후 하산한다. 완전 휴식형은 첫날 오후 2시 30분에 시작해 오리엔테이션과 사찰 안내, 저녁 공양 후 사물연주 관람 및 저녁 예불(자율), 이튿날엔 새벽 사물연주 관람 및 새벽 예불, 아침 공양 후 소감문 작성, 점심 공양 후 하산한다. <당일 여행 코스> 화엄사 → 운조루 → 섬진강 어류생태관 → 노고단 <1박 2일 여행 코스> (첫째 날) 지리산 피아골 → 섬진강 어류생태관 → 운조루 → 화엄사 (둘째 날) 섬진강 대나무숲길 → 오산 사성암 → 지리산 노고단 충청남도에서 가장 험하다는 차령산맥의 깊숙한 곳에 마곡사가 있다. 워낙 깊은 산속이라 옛날에는 숨어들면 아무도 찾지 못하는 정감록 십승지 마을로 암암리 알려져 왔다. 그러니 누군가는 험한 세파를 등지고 숨어들었고, 누구는 그를 찾아 따라왔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제7대 세조로 등극하자 많은 선비가 항거하거나 세상을 등졌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불린 매월당 김시습도 천연 요새 마곡사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가까운 온양온천에 휴양을 온 세조가 이 소식을 듣고 마곡사로 찾아온다. 김시습을 얻어 왕위 정통성의 약점을 만회하려는 의도였다. 세조가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시습은 한발 먼저 마곡사를 빠져나갔다. 마곡사에 와보니 풍수 지식에 능했던 세조의 눈에 과연 풍수 명당이었다. 세조는 “내가 비록 왕이지만 만세불망지지(萬世不亡之地)인 이곳과는 비교할 수가 없구나!”라고 극찬했다 한다. 그곳을 군왕대(君王垈)라고 한다. 마곡사 중에서도 지기가 가장 강한 곳이다. 그러나 김시습을 만나지 못해 허탈감에 빠진 세조는 신하 하나 얻지 못했는데 어찌 연(가마)을 타고 돌아가겠냐며 자신이 타고 온 연을 마곡사에 두고 돌아갔다. 지금도 마곡사에 보관되어 있다. 세조는 이곳의 ‘영산전(靈山殿)’ 현판 글씨도 남겼다고 전해온다. 마곡사에는 우리 근현대사의 큰 인물 백범 김구 선생의 사연도 쟁쟁하다. 백범 김구 선생이 청년 시절,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황해도에서 마주친 일본인 장교 츠치다를 살해했다. 그 후 투옥됐지만 탈출해 마곡사에서 은신했다. 그만큼 마음 편하게 숨을 수 있는 곳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김구 선생은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기로 결심하고 상투를 자르는데 눈물이 뚝 떨어졌다고 술회했다. 그때 머리를 잘랐던 바위 역시 냇가에 남아있다. 이곳에서 반년 남짓 원종이라는 법명을 가진 승려로 지내다 환속해 훗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김구 선생은 광복 후 다시 마곡사를 찾아 청년 시절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고 돌아갔다. 대광보전 옆엔 백범 선생이 생활했던 백범당이라는 건물이 있다. 마곡사는 백범 선생의 향기가 그윽하게 남아있는 사찰이다. 마곡사 당일형 템플스테이는 오전 10시에 시작해 사찰 안내 후 점심 공양으로 이어진다. 오후에는 스님과의 차담, 명상, 합장주 만들기, 소감문 쓰기가 있다. 체험-주말-요가형 템플스테이는 첫날 오후 3시에 시작하며, 저녁 공양 후 타종 체험 및 저녁 예불, 요가 체험을 한다. 이튿날에는 새벽 예불(108배), 아침 공양 후 백범명상길 걷기, 스님과의 차담, 점심 공양 후 하산한다. 자원봉사 템플스테이는 3박 4일 일정으로, 내용은 일반 템플스테이와 비슷하나 사흘 간 하루 2시간 30분씩 봉사활동이 필수다. 종일 기도를 하는 기도정진 템플스테이도 있다. 2박 3일간 새벽, 낮, 저녁에 집중적으로 예불하는 프로그램이다. 휴식형 템플스테이는 3박 4일로, 첫날 오후 3시에 시작해 마지막 날까지 새벽 예불 외엔 자율정진 및 자유시간이 많고 간혹 대중운력 및 스님과의 차담이 있다. 사찰에서 편히 쉬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당일 여행 코스> 마곡사 → 공산성 → 무령왕릉 → 국립공주박물관 <1박 2일 여행 코스> (첫째 날) 갑사 → 우금치 전적지 →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 → 공주 메타세콰이어길 (둘째 날) 공산성 → 무령왕릉 → 국립공주박물관 → 마곡사 '이야기가 있는 사찰' 시리즈가 궁금하다면? 여행기사 모아보기 ☞ Click .linkbox_t { font-weight: 800;} .linkbox_t > a{ color: #2d8251; } 글, 사진: 남민(인류문화사 여행작가) ※ 위 정보는 2023년 6월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mo{display:none;} @media screen and (max-width: 1023px){ .mo{display:block;} .pc{display: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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