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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는 4월 23일을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세계 책의 수도’를 선정한다. 그리고 2015년에는 세계에서 열다섯 번째, 아시아에서는 세 번째로 인천이 이름을 올렸다.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슬금슬금 책 읽고 싶은 열망이 싹트는 9월, 책의 수도 인천으로 책 여행을 떠났다. ‘세계 책의 수도’ 인천에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한국근대문학관이다. 중구 개항장 문화지구에 자리한 한국근대문학관은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모든 것을 느끼고 체험하는 국내 최초의 공공종합문학관이다. 문학관은 외관에서부터 옛 분위기가 풍긴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투박한 물류창고를 그대로 활용한 까닭이다. 안에는 서까래 등의 목재가 고스란히 남아 세월의 맛을 느끼게 한다. 건물 자체가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해온 산증인인 셈이다. 전시관에서는 1890년대 계몽기부터 1940년대 후반까지 근대문학 자료를 만날 수 있다. 전국 60여 곳의 문학관 중 특정 문인과 유파를 떠나 한국의 근대문학을 총망라한 문학관은 이곳이 유일하다. 소장 자료만도 무려 3만여 점. 무엇보다 김소월, 한용운, 최남선, 현진건, 염상섭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어 감동적이다. 특히 초기작, 육필원고 등 빛바랜 희귀본을 감상하는 재미가 좋다. 그중에서도 눈길 가는 전시물은 미당 서정주의 첫 번째 시집 <화사집> 초판, 한국 근대소설사에 리얼리즘 시대를 연 염상섭의 <만세전>, 육당 최남선이 펴낸 기행체 창가 <경부철도노래> 등이다. 아울러 한국근대문학관에서는 체험을 통해 문학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복각본을 손으로 직접 넘겨보며 문학의 향취를 느끼고,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슬라이드로 감상하며 그 시절로 잠시 여행을 떠난다. 또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노래도 들어볼 수 있는데, 한 곡 한 곡 가사 구절마다 아련한 정서가 묻어나 여운이 오래 남는다. 문학관을 나서기 전 작가의 모습이 담긴 스탬프도 놓치면 아쉽다. 캐리커처로 표현된 염상섭, 최남선, 현진건 등의 모습을 확인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한국 근대문학사에는 인천을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이 제법 많다. 이는 한국근대문학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중 작가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가 자꾸 눈에 밟혔다. <중국인 거리>는 6.25 피난 도중 인천으로 와 중국인 거리에 살게 된 한 소녀의 시선을 그린다. 여기서 ‘중국인 거리’는 지금의 차이나타운이다. 소설 속 중국인 거리는 ‘겨우내 북풍이 실어 나르는 탄가루로 그늘진’, ‘목조 이층집들이 늘어선 초라하고 지저분한 거리’ 등으로 암울하게 묘사된다. 울긋불긋 화려한 지금 모습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그 시절 중국인 거리를 떠올리며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잿빛 거리는 오간 데 없고 붉은 간판과 홍등을 내건 상점들이 시야를 꽉 채운다. 그중에는 소설 속 소녀가 봤던 ‘옷이나 신발에 다는 장식용 구슬, 폭죽놀이에 쓰이는 화약, 근으로 달아주는 중국차 따위를 파는’ 가게도 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으로 발길을 옮겼다.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은 말 그대로 청국과 일본의 주거지역이 경계를 이루던 지점이다. <중국인 거리>에서는 소녀가 자유공원에 가기 위해 힘들게 오르던 곳으로 그려졌다. 계단 앞에 서자 소녀의 말처럼 ‘하늘 끝까지라도 이어질 것 같은 층계’가 펼쳐진다. 이 계단의 좌우로 청국과 일본 조계가 갈린다. 그래서 계단 양쪽의 석등 모양이 다르고, 건물 생김새도 완전히 다르다. 계단 상부에는 중국 청도에서 기증한 공자상이 심판처럼 서 있는데, 이마저도 정중앙이 아니라 청국조계지 쪽에 배치돼 있다는 사실이 재밌다. 널찍널찍하게 이어진 삼십여 개의 계단을 모두 오르면 그 끝에서부터 ‘삼국지 벽화 거리’가 시작된다.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등 <삼국지>의 명장면이 담긴 160개 그림이 해설과 함께 양쪽 벽을 가득 메운다. 유비와 관우를 뒤로하고 다시 자유공원으로 길을 잡았다. 자유공원은 1883년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지대가 높은데다 터가 넓고 숲이 울창해 산책하기 좋다. 공원 한쪽에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인천항을 굽어보고 있다. 소녀가 세상을 내려다보기 위해 밟고 올라섰던, 바로 그 동상이다. ‘아직 겨울이고 깊은 밤이어서 나는 굳이 사람들의 눈을 피하지 않고도 쉽게 장군의 동상에 올라갈 수 있었다. 키를 넘는, 위가 잘린 정사면체의 받침돌에 손톱을 박고 기어올라 장군의 배 위에 모아진 망원경 부분에 발을 딛고 불빛이 듬성듬성 박힌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 소설 <중국인 거리> 중에서 하지만 실제 맥아더 동상의 망원경까지는 너무 높아 어른이라도 오르기 힘들어 보인다. 다만 소녀가 주변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고 홀로 공원에 찾아갔던 장면을 떠올리며, 그저 알 수 없는 절박함이 통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자유공원을 내려와 근처 동화마을로 향했다. 송월동 동화마을은 이름처럼 ‘동화’를 주제로 조성된 마을이다. 개항기에는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부촌이었는데, 차츰 개발의 물결에서 밀려나 침체됐다가 지난해 동화마을로 거듭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무지개 모양의 입구 조형물을 지나면 알록달록 동심의 세계가 펼쳐진다. ‘도로시 길’ ‘신비의 길’ 등 열 가지 테마로 꾸며진 골목이 발길을 붙든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백설공주> <신데렐라> <오즈의 마법사> 등 동화 속 주인공들이 담벼락을 가득 채우고 있다. 돌고래 피자, 오리 모양 솜사탕 등 재미난 간식거리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총천연색 마을 구경에 푹 빠져 40분을 보냈다. 동네 자체는 크지 않은데 골목마다 볼거리가 밀집해 있어 시간이 제법 걸린다. 서둘러 동화마을을 빠져나와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설 <남생이>의 주인공 ‘노마’ 가족을 만났다. 소설 <남생이>는 1930년대 후반 인천항 인근 빈민촌으로 이사 온 ‘노마’ 가족을 중심으로 당시 서민들의 다양한 인생사를 담은 소설이다. 작가 현덕은 소설 도입부에서 노마 가족이 살았던 당시 빈민촌을 이렇게 묘사했다. ‘호두형으로 조그만 항구 한쪽 끝을 향해 머리를 들고 앉은 언덕, 그 서남면 일대는 물매가 밋밋한 비탈을 감아 내리며, 거적문 토담집이 악착스럽게 닥지닥지 붙었다. 거의 방 하나에 부엌이 한 칸, 마당이랄 것이 곧 길이 되고 대문이자 방문이다. 개미집 같은 길이 이리 굽고 저리 굽은 군데군데 꺼먼 잿더미가 쌓이고, 무시로 매캐한 가루를 날린다.’ - 소설 <남생이> 중에서 세월이 흘러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풍경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대신 그 시절 서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 남았다. 박물관이 자리한 수도국산은 동인천역 뒤에 위치한 산으로 일제강점기 때 꼭대기에 수도국이 있어 수도국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수도국산 일대는 한국전쟁 때는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이, 1960~70년대에는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지방 사람들로 붐비던 인천의 대표 달동네였다. 2005년 문을 연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에는 1960~70년대 달동네가 그대로 재현돼 있다. 박물관 내부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송림복덕방이라는 간판이 걸린 매표소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표를 끊고 동네로 들어서면 어두컴컴한 길을 따라 구멍가게, 연탄가게, 솜틀집 등이 이어진다. 으스스한 전구가 달린 공동화장실을 지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닥지닥지 붙은 집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안방 텔레비전에서는 1960~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박치기왕 김일 선수의 레슬링 경기가 한창이다. 무릎조차 제대로 펴지 못할 만큼 좁은 방에는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응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전봇대와 담벼락엔 촌스러운 영화 포스터와 표어가 붙어 있다. ‘혼식으로 부강 찾고 분식으로 건강 찾자’ ‘썩은 자는 유흥가로 애국자는 일터로’ ‘간첩을 신고하면 20만원을 상금한다’ 등 곱씹을수록 재미난 문구가 웃음을 자아낸다. 길 중간중간에는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체험도 마련돼 있다. 옛날 교복 입어보기, 물지게 체험, 연탄불 갈기 등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몸으로 직접 느껴볼 수 있어 흥미롭다. 박물관에서 나와 마지막으로 배다리 헌책방 골목으로 향했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헌책방 특유의 분위기가 그립기도 했지만, 그보다 꼭 찾고 싶은 책이 하나 있었다. 배다리 헌책방 골목의 역사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책방인 ‘집현전’이 1953년 문을 열었다. 전쟁이 끝나고, 고된 삶 속에서도 학구열을 불태우던 학생과 지식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한때는 헌책방이 40여 곳까지 늘어나면서 서울 청계천, 부산 보수동과 함께 전국 3대 헌책방 골목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매출 하락을 견디지 못한 집들이 하나씩 문을 닫으면서, 지금은 다섯 곳만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하고 아벨서점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책의 냄새가 싫지 않았다. 천장까지 빼곡히 채워진 책장을 둘러보며 보물찾기를 시작했다. 신간을 살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보물,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손안에 들어왔다. 수년 전 잃어버렸는데 이후 절판이 되면서 구하기 힘들어져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책이었다. 애초 계획에 없었던 책도 한 권 집어 들었다. 예전에 읽으려다 못 읽은 시집이었다. 책장을 펼치자 곳곳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고, 그중에는 깊이 공감되는 글귀도 보였다. 불현듯 책의 전 주인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분홍색 밑줄이 마치 우리를 연결해주는 희미한 선처럼 느껴졌다. 집으로 가는 길, 곱씹어 읽은 책을 다시 들춰보듯 길 위에서 만난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때로는 밑줄을 긋고, 때로는 동그라미도 쳐가면서. 출처 : 청사초롱 9호 글, 사진 : 청사초롱 박은경 기자 ※ 위 정보는 2018년 12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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