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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019년은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독립만세를 부르짖다 옥사한 유관순 열사, 민족대표 33인의 수장으로 3.1운동을 주도한 의암 손병희, 아름다운 시로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노래한 이육사까지. 순국선열의 용기가 대한민국의 새로운 100년을 만들어 냈습니다. 지금부터 그들의 발자취를 되짚는 여행을 하려 합니다. 그 고결한 희생을 기억하는 것이 ‘자유’라는 큰 선물을 받은 우리들의 작은 보답이니까요. “우리에겐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놈들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병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에게 온갖 학대와 모욕을 일삼고 있습니다. 10년 동안 나라 없는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나라 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 1919년 4월 1일 오후 1시. 병천 장터에 모인 3,000명의 군중이 유관순의 열변에 귀를 기울였다. 이들의 마음은 순식간에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두려움과 설렘에 떨리던 눈빛이 점차 의연해졌다. 저마다의 손에 들린 태극기는 사나운 파도처럼 요동쳤다. 유관순과 더불어 만세운동을 주도한 조인원이 품에서 3.1독립선언서(이하 독립선언서)를 꺼내 한자 한자 힘주어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도 따라 불렀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만세 함성을 듣고 놀란 병천 헌병주재소 경찰이 현장에 출동해 해산을 요구했다. 그러나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진 시위대의 기세는 쉬이 꺾이지 않았다. 일본 경찰은 곧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지 마시오!” 큰 소리로 항의하던 유관순의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무참히 살해당했다. 그 장면을 보고 달려든 어머니마저 같은 운명을 맞았다. 유관순은 친척과 함께 아버지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까지 행진을 계속했다. 다른 유족들도 행렬에 동참했다. 시신과 부상자를 내보이고 항의를 하거나 치료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일본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은 계속됐다. 죄 없는 목숨들이 일제의 총검 앞에 너무나 쉽게 짓밟혔다. 유관순 열사가 눈앞에서 부모를 잃고도 군중들을 이끌며 만세운동을 벌인 고향땅은 충남 천안시 병천면이다. 일본인들이 ‘병천(竝川)’이라는 한자식 지명을 사용하기 전에는 ‘두 개의 하천이 하나로 모여 흐른다’는 뜻에서 ‘아우내’라고 불렸다. 현재 행정구역 기준으로 보면 천안 시내와 거리가 꽤 멀다. 평소에는 한적하지만 3.1절이나 광복절, 호국보훈의 달 6월이면 유관순 생가와 독립기념관을 다녀가려는 인파로 북적인다. 병천에 아우내장이 들어선 시기는 1700년대 후반이다. 과거에는 한양과 경상도를 이어주던 핵심 길목이라 자연스럽게 상권이 형성됐다. 이후 오일장으로 굳어져 매월 1, 6, 11, 16, 21, 26일에 장이 선다. 1919년 비극의 그날과,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활발하다. 육류, 생선류, 채소류 등 농·축산물은 물론 농기구, 의류, 골동품, 추억의 간식들이 매대에 빼곡하다. 천안의 비옥한 땅에서 자란 신고배와 거봉포도, 멜론, 오이 등은 맛이 달고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점심으로 병천순대를 먹는 것은 아우내장 구경의 핵심이다. 1840년 무렵부터 아우내를 대표한 음식으로, 돼지 소장에 갖은 채소와 선지를 채워 만든다. 순대에 내장, 머릿고기 등을 넣어 끓여낸 순대국밥은 푸짐하고 영양가 높고 맛이 좋고 가격도 저렴해 장꾼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1960년대 병천면에 육가공공장이 들어서고 신선한 재료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된 이후로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양배추가 들어가 식감이 좋고 누린내 없이 담백한 맛을 내기 때문에 마니아층도 두텁다. 오랜 역사를 지닌 향토음식인 만큼 유관순 열사도 아우내 장터 순대국밥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재학 중 서울의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고향인 천안에 내려왔다. 그런 후에 아버지 유중권의 소개로 마을 인사들을 만나 서울의 상황을 전하고 품속에 몰래 숨겨 온 독립선언서를 공개했다. “삼천리강산이 들끓는데 우리 동네만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재촉도 잊지 않았다. 상의 끝에 아우내 장날인 4월 1일 거사를 치르기로 합의하고, 이전까지는 각자 임무를 수행하며 지냈다. 유관순에게 주어진 임무는 아우내 주변 지역과 연락망을 공유하고 봉화 신호에 맞추어 약속된 지역이 총궐기하도록 만드는 것. 3월 31일 유관순이 매봉산에 봉화를 올리자 천안 인근 24개 봉우리에서 봉화가 타올랐다. 그것은 내일의 만세시위를 다짐하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매년 2월 28일 아우내 장터에서 열리는 ‘아우내 봉화제’는 마지막까지 동지들과 결의를 다진 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다. 독립선언서 낭독과 시민들의 만세삼창, 횃불 점화, 불꽃놀이 등 다양한 재현행사와 체험행사를 진행한다. 장터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유관순 열사의 생가가 있다. 4월 1일 만세운동 당시 불타 없어진 가옥과 헛간을 1991년 복원한 것이다. 생가는 ‘ㄱ’자 형태의 작은 초가집이다. 특별할 것 없어 썰렁하게 느껴지지만 일곱 식구가 모여 살던 그 때는 복닥복닥한 모양새였을 것이다. 방 안에는 밀랍인형이 전시돼 있다. 유관순 열사와 친척들이 만세시위를 앞두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태극기를 만드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생가 왼편에는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유관순과 함께 아우내 만세시위를 주도한 조인원, 유중무가 이 교회 지도자였다. 아우내장터와 유관순 생가를 둘러보려면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아우내장에서 출발하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배차간격이 길고 하차정류장도 멀리 있어 다소 불편하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유관순 열사가 4.1 만세시위를 거행하기 한 달 전. 의암 손병희는 3.1운동의 불씨를 만들기 위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번에야말로 민중의 독립 염원을 한데 모아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표출시키겠노라고. 손병희는 동학(천도교) 3대 교주다. 청년시절에는 동학에 심취해 전봉준과 함께 동학혁명운동의 기수로 활약한 바 있다. 일본 유학 시절이던 1905년 동학의 친일 분파인 일진회, 진보회와의 단절을 위해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본격적으로 교육을 통한 구국의 길을 모색했다. 귀국과 동시에 보성학교(현 고려대학교), 동덕여학교(현 동덕여자대학교) 등 수십 개 학교를 인수하거나 신설 운영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1919년 1월, 한반도의 독립운동 분위기가 급속도로 고조됐다. 조선인 도쿄 유학생들이 현지에서 2.8독립선언을 계획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얼마 후 고종 황제가 갑자기 승하한 것. 와중에 일제가 고종 황제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아 ‘이번에야말로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이를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손병희는 즉각 반응했다. 최린, 권동진 등 측근들에게 독립운동 세부 추진계획을 맡기고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던 각 종교계와 의견을 통합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천도교 대표 자격으로 기독교계 이승훈, 불교계 한용운 등 인사들과 교섭했고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3인의 서명을 받았다. 독립선언서 인쇄는 천도교 소유의 보성사에서 이루어졌다. 보성사는 보성학교 설립 당시 교재 출판을 위해 만든 부설 인쇄소다. 주로 천도교 관련 서적이나 기관지, 교과서를 인쇄했다. 천도교의 한 간부가 한때 적자운영을 면치 못하던 보성사의 폐업을 건의하기도 했지만 손병희가 “언젠가는 중요하게 쓰일 날이 있을 것”이라며 유지했는데, 드디어 엄청난 쓸모가 생긴 것이다. 당시 보성사는 손병희와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던 천도구국단장 이종일이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그 역시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기 때문에 중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족보를 인쇄하는 것으로 위장막을 쳤다. 그러나 밤늦도록 기계 소리가 멈추지 않음을 수상히 여겨 종로경찰서 소속 신승희 형사가 들이닥쳤다. 신 형사는 단숨에 상황을 파악했고, 이종일은 “같은 조선 사람끼리 한 번만 눈감아 달라”고 간청했다. 이 때 손병희가 신 형사에게 거금(500원, 5,000원 설이 있다)을 건네 상황을 무마시켰다. 덕분에 1919년 2월 20일부터 27일까지 독립선언서 수 만 부를 무사히 인쇄할 수 있었다. 보성사는 3.1운동 직후 일제가 불태워 없애버렸다. 그 흔적은 서울 종로에 위치한 수송공원에서 찾을 수 있다. 규모가 작은데다 높은 빌딩숲에 가려져 있어 초행자는 찾기 어려울 수 있다. 수송공원에는 보성사 이외에도 일제강점기 서간도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던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이자 현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대학, 숙명여학교, 보성학교 등 근대교육기관과 대한제국 말기 대표적인 항일민족지였던 대한매일신보사 사옥 옛터가 남아있다. 공원 자체가 하나의 근대문화유산인 셈이다. 3월 1일 운명의 날. 29명의 민족대표가 종로 태화관으로 향했다. 태화관은 요릿집이던 명월관의 별관이다. 원래 약속 장소는 탑골공원이었으나 소식을 듣고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할까봐 조용한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손병희는 이 자리에서 민족대표의 대표자로서 회의를 주도한 후 일본 경찰에 독립선언 사실을 통보했다. 민족대표 29인의 독립선언식은 조촐하지만 위대했다.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글에 이름 석 자를 내거는 행위는 보통 결심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경찰이 민족대표 29인을 연행할 즈음 탑골공원 쪽도 시끄러워졌다. 민족대표를 기다리던 군중들이 사전에 배포된 독립선언서를 입수해 별도의 선언식을 행하고 만세를 외친 것이다. 3.1운동의 불씨가 활활 타오르는 순간이었다. 민족대표가 회동한 태화관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있다. 태화관의 본래 이름은 순화궁이다. 1500년대 중종이 딸 순화공주를 위해 지은 궁이라서다. 300년 후에는 헌종이 리모델링해 후궁 경빈 김씨의 사저로 쓰게 했다. 순화궁의 다음 주인은 친일파 이완용이다. 1907년 화재로 집을 잃은 그에게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던 일제가 순화궁 소유권을 넘긴 것이다. 한동안 이완용의 자택으로 사용되던 순화궁은 1918년 요릿집 명월관 주인에게 팔려 태화관이 됐다. 크고 작은 방이 많아 조선총독부 관리와 친일파들이 즐겨 찾던 장소라고 전해진다. 이런 장소에서 독립선언식이 이루어진 것은 아이러니하면서도 통쾌한 일이다. 안타깝게도 태화관의 흔적 역시 태화빌딩 앞 표지석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시선을 끌만한 박물관이나 기념관, 쉬면서 머물만한 공원도 조성되어 있지 않아 탐방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자세히 볼 일이 없다. 서울시는 올해 3.1운동의 진원지인 이곳에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을 기리는 3.1독립선언광장을 조성할 예정이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절정> 이육사(본명 이원록)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마땅히 가져야 할 저항의식과 희망을 글로써 독려한 독립운동가 겸 시인이다. 경북 안동의 원촌마을에서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원촌마을은 안동 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마을이다. 남쪽으로 터를 잡고 뒤로는 병풍 같은 산이, 앞으로는 너른 들판이, 그 너머로는 낙동강이 굽이 흘러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이육사의 대표적인 서정시 <청포도>는 원촌마을의 아름다운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 <청포도> 이육사의 생가는 육우당(六友堂)이라고 불린다. 여섯 형제의 우애가 경북지역에 소문이 날만큼 깊었다고 해서 육사 형제들 사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육우당은 안동댐이 건설 될 때 원촌마을이 예상 수몰지역에 포함되어 1976년 시내인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집터는 여전히 원촌마을에 남아있다. 청포도 시비공원 안, 정확히는 청포도 모양을 형상화 한 시비가 놓인 곳이다. 이육사 문학관 안에는 고증을 거쳐 복원해 놓은 육우당이 있어 옛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이육사는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며 선비 정신을 체득했다. 그렇기에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정신이 투철했다.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에 다니는 등 훗날의 행적은 투사적인 면모가 돋보이는데, 의병장인 외조부 범산 허형과 외종조부 왕산 허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구로 이사한 이육사는 신학문을 배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중외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면서도 의열 투쟁에 참여하며 구국 활동에 나섰다.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생애 첫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석방 후에는 중국 난징에서 개교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군사간부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무장 항일운동에 사명감을 가진 까닭에 사건마다 연루되어 17번의 옥고를 치렀다. 이육사의 시는 친동생이자 문학평론가인 이원조가 1946년 <육사시집>을 발간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대체적으로 민족의 비운을 배경으로 독립운동가의 강한 의지나 고통스러운 현실 속 인간의 고뇌를 담으면서도 “천고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광야)”을 기다리거나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다(청포도)”며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광야> 그중에서도 <절정>은 ‘매운 계절’에 ‘북방으로 휩쓸려’와 ‘서릿발 칼날진’ 위급한 상황 속에서 눈 감고 무지개를 그려볼 수밖에 없는 암담한 시대상을 잘 표현했다. 이육사라는 필명만 보더라도 그의 저항정신을 엿볼 수 있다. 1927년 대구형무소에서 첫 번째 옥고를 치를 당시 수인번호 이육사(二六四)를 그대로 썼으며 이후에는 같은 필명에 조금씩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암울한 지금의 역사를 찢어발기겠다’는 뜻을 담아 죽일 육(戮), 역사 사(史)를 쓰다가 일제의 탄압을 우려한 집안 어른의 제안으로 죽일 육을 뭍 륙(陸)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사이에 고기 육(肉)에 설사할 사(瀉)를 쓰는 등 여러 번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이육사는 1943년 4월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무기를 반입할 계획이었다. 그러던 중 같은 해 7월, 어머니와 형님의 소상을 치르기 위해 일시 귀국했다가 일본 헌병에 피체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됐다. 1944년 1월 16일 북경의 차디찬 지하 감옥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조국으로 돌아왔다. 유골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 이육사 문학관 뒷산으로 이장됐다. 원촌마을에 위치한 이육사 문학관은 강철 같고 무지개 같았던 이육사의 짧은 생애를 전시하고 있다. 연도별 활동내역과 독립운동에 뛰어든 배경, 열일곱 번의 수감생활, 옥고를 치르다 사망한 후 서훈되기까지 전 과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육사 시를 감상하다 보면 조국 광복까지 1년만 더 버텼더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여사가 일정에 따라 유동적으로 진행하는 강의 ‘나의 아버지 육사’가 별도 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있으니 미리 확인하고 방문하는 것이 좋다. 이육사 문학관에는 8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생활관이 있어 숙박도 가능하다. 이육사 문학관을 거점으로 안동과 경북을 여행할 수 있다. 이육사 문학관에서 2.8km 남짓 산길을 오르면 이육사 묘소가 있다. 묘역에는 이육사와 그의 부인 안일양 여사의 묘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중국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지만 고향땅에 돌아와 아내와 함께 꿈에도 그리던 고향 원촌의 앞내를 바라보게 되었으니 조금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수인번호 371번(유관순), 413번(김구), 1724번(안창호), 11306번(한용운). 모두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거나 목숨을 잃은 독립운동가다. 일제강점기 4,800여명의 애국지사들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들은 옥사에 갇혀 고문과 굶주림이 반복되는 지옥 같은 일상을 버텨야 했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좁은 벽관에 갇히거나 손톱 밑을 찔릴 때면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렸다. 노동량에 따라 깊이가 다른 밥그릇을 받았고, 소금을 얹은 좁쌀밥만 받아먹다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형무소 내부 환경도 최악이었다. 전국적인 독립운동의 여파로 수용인원은 한계를 초과한지 오래였다. 1평당 수용인원이 3.12명에 달했다. 김구는 <백범일지>를 통해 “누울 자리가 없어 힘 센 이들이 먼저 누운 자의 가슴을 밀어 자리를 만들어 모두가 누운 후에야 밀던 자까지 눕는다. 힘써 밀 때는 사람 뼈가 상하는 소리인지 우두둑 소리에 소름이 돋는다” 고 회상했다. 여름이면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다. 소설가 심훈은 어머니께 보내는 ‘옥중서한’에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쪼이고 주황빛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는다” 고 썼다. 최신식 시설에 큰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던 서대문형무소가 이 모양이었으니 다른 곳은 어땠을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된다. 서대문형무소의 원래 이름은 경성감옥이다. 1908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할 목적으로 개소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서대문독립공원 내부에 있다. 입구와 가장 가까운 옛 보안과 청사에는 일제의 만행을 담은 사진이나 문헌, 고문기구와 순국선열들의 재판기록,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중앙실은 세 갈래 방향으로 뻗어나간 옥사 3채와 연결돼 있다. 독특한 구조는 옥사 전체를 감시하던 컨트롤타워였음을 짐작케 한다. 이곳에서 독방 관람, 수형도구 체험을 통해 수감자들의 고통스러운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유관순 열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다. 3.1운동이 1주년을 맞던 1920년 3월 1일에는 수감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일본 경찰은 요주의 인물인 유관순 열사를 지하 옥사에 가두어 집중 고문했고, 유관순 열사는 그 해 9월 28일 열여덟 나이로 순국했다. 장독(杖毒)으로 사망했는지, 국가기록원 순국상황란에 기록된대로 옥중에서 타살(打殺) 당했는지, 아니면 일본 경찰이 다른 방법으로 목숨을 끊어버린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사형수들은 옥중 생활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모진 고문에 시달리던 사형수들은 날짜가 되면 옥사 왼편의 작은 목조 건물로 향했다. 그 안에 집행관과 사형수의 좌석이 있다. 마주본 두 좌석이 안쓰럽다. 똑같은 의자인데 하나는 죽이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죽임을 당하는 쪽이다. 시체는 사형장 뒷문에 위치한 시구문을 통해 몰래 반출했다. 사형장과 시구문 내부는 비공개라 외부에서만 육안으로 관람이 가능하지만 사형장 안쪽에 식재된 통곡의 미루나무는 얼마든지 만져볼 수 있다. 애국지사들이 사형 직전에 이 나무를 붙잡고 조국 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야 하는 원통함을 토로했다고 전해진다. 서대문형무소 맞은편 주택가에는 수감자 가족들의 옥바라지 흔적이 남아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독립운동가가 대거 투옥되자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여들면서 여관촌이 형성됐다. 이곳 주민들 증언에 따르면 먼 곳에서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찾아온 가족들이 여관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하면 동네 사람들이 자기들 집 빈방을 내주기도 했다. 김구의 어머니도 이 골목에서 여관청소를 도우며 옥바라지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서민들의 역사가 담긴 이곳 건물은 2016년 재개발 결정에 따라 대부분 헐렸다. 시민단체의 반대 의견에 따라 몇 차례 철거가 중단되었으나 아파트 단지 안에 옥바라지 기념관을 짓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새 입주민을 받는 중이다. 옥바라지길이 결국 사라진 것처럼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 대한 관심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지속적으로 무료 교양강좌와 특별전을 개최하며 역사의식 함양에 앞장서고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준비한 특별전 <문화재에 깃든 100년 전 그날>은 2월 26일부터 4월 21일까지 개최된다. 2019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13인을 주제로 진행하는 무료 교양강좌는 매월 셋째 주 화요일에 열린다. 올해의 독립운동가 13인은 유관순, 김마리아, 손병희, 안창호, 김규식·김순애, 한용운, 이동휘, 김구, 지청천, 안중근, 박은식, 윤봉길이다. 아우내장 korean.visitkorea.or.kr/detail/ms_detail.html?cotid=bdadd3cc-3e99-4581-8af8-e1ae569629a3 위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충절로 1718 문의: 041-521-2038 (천안시 관광안내소) 유관순 열사 유적 korean.visitkorea.or.kr/detail/ms_detail.html?cotid=b477c87b-58b4-46e6-abfa-72f3f3daa8f2 주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길 38 문의: 041-564-1223 유관순 생가 주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생가길 18-1 문의: 041-521-2038 (천안시 관광안내소) 보성사 터(수송공원)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태화관 터(태화빌딩)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5길 29 이육사문학관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백운로 525 문의: 054-852-7337 서대문형무소역사관 korean.visitkorea.or.kr/detail/ms_detail.html?cotid=2160d763-5d20-4c8c-b234-1dae5a5776fa 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문의: 02-360-8586 휴일: 매주 월요일, 매년 1월 1일, 설/추석 당일 제공 : 한국관광공사 사진 : 독립기념관, 천안시청, 한국콘텐츠진흥원, 이육사문학관 ※ 위 정보는 2019년 12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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