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67주년을 맞아, 여행·관광을 넘어 '한번은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소개한다. 감옥에서 애국지사의 눈물과 피가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며 자란 '석순'을 마음에 품으러 가보자. 서대문형무소를 다루기 앞서, 간단히 일제강점기의 시작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해안 탐측을 목적으로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 침투, 포격이 오고 간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손해배상을 요구, 군사력을 앞세워 강화도조약(1876년)을 강제 체결한다. 이후 을사늑약(1905)으로 외교권이 강탈되고 통감부가 설치됐다. 5년 후 경술국치로 결국 국권이 침탈되기에 이른다. 이 같은 불법·불평등·강제 조약체결은 1919년 탑골공원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불러왔다. 일제는 저항하는 사람들을 가둘 감옥이 필요했고 그 결과 '경성감옥'이 대규모로 세워지고 증축이 이어진다. 이 감옥이 바로 '서대문형무소'이다.
일제 만행의 상징이 지금은 볼 수 없는 '조선총독부 청사'라고 한다면, 약 40년 동안 일제의 억압을 견디고 저항한 민족의 상징은 '서대문형무소'이다. 1908년 지어져 1988년 감옥 기능을 마감하기까지 이곳의 지난 세월을 알아보자. 금화 터널 또는 무악재 고갯길을 이용하면서 독립문과 그 주위로 조성된 '서대문독립공원'을 자주 봤을 것이다. 그냥 지나칠 법한 이 공원에 서대문형무소가 있다.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에서 나오니 독립문이 단연 돋보인다. 한양에서 의주로 이어지는 길의 출발점이었던 영은문을 일제가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협회의 주도로 자금을 모아 세운 문이다. 특히 독립문의 현판은 이완용이 쓴 것으로 전해져 한때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공원 안쪽으로 5분 정도 들어가면 붉은 벽돌의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공기가 바뀌는 듯한 느낌이다. 형무소 모습이 그대로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 담장 일부만 남아 있고 나머진 헐어, 베일에 싸였던 서대문 형무소가 공원의 한 모습을 담당한다. 서대문형무소가 공원과 맞물린 하나의 여행코스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92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개관한 것은 1998년으로 얼마 되지 않았다. 형무소의 기능과 의미가 남다른 만큼 공원과 연계해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준엄한 역사성을 보유한 곳으로 가벼운 구경거리로 치부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담장 건너 망루가 있는 곳이 역사관 출입구이다. 입구를 지나 역사관에 들어가기 전 주위를 살펴봤다. 한눈에 보아도 일부 건물이 헐려 공간이 허하다. 안내소책자의 이동 동선 '전시관 → 중앙사 → 12옥사 → 11옥사 → 공작사 → 한센병사 → 순국선열추모비 → 사형장' 순으로 가보자. 입구를 지나 정면으로 보이는 전시관은 옛 보안과 청사로 1923년에 지어져 사무공간, 회의실, 소장실, 취조실로 사용됐다. 일부 외벽이 회색을 띠는 것은 원래 있던 붉은 벽돌 위로 덧붙인 타일을 떼어 낸 흔적이다. 내부 전시 구성은 옥고를 치른 선열들의 재판기록, 수의 등 유품을 비롯해. 일제의 만행을 담은 사진, 만주·상해·미주에서의 독립운동 사료, 고문용 기구 등 각종 유물과 문헌이다. 1층 '서대문형무소 역사실'에서는 이곳의 시작부터 끝을 알 수 있다. 1908년 일본인의 설계로 인왕산 남쪽 현저동 101번지에 한국 최초 근대식 감옥이 준공했다. 당시 '경성감옥'이란 이름을 가졌던 서대문형무소의 시작이다. 이 장소는 영은문을 통해 의주와 한양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일제는 복종을 강요하는 위협적 상징으로 감옥을 이용한 것이다. 105인 사건을 시작으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수용된다. 시간이 갈수록 독립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졌고, 수감자가 증가해 감옥 증축이 계속된다. 광복 직전인 1944년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사람이 약 2,890명에 달했다고 한다. 광복 후에도 감옥으로 쓰였다. 1960년대에는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등과 같은 정치적 변동에 따라 많은 사람이 투옥됐다. 사형 선고와 집행 반세기 후 무죄 판결을 받은 죽산 조봉암 선생도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갔다. 1975년에는 인혁당 사건으로 재판 후 다음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8명의 고인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또한 민주화운동을 하던 리영희 등 민주인사들이 이곳에서 수형생활을 했다. 이후 건물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이유로 철거되기 시작했지만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2층으로 가보자. '민족저항'을 주제로 의병, 독립운동 등을 다뤘다. 국권이 위태로웠던 조선 말기에는 특히 의병활동이 활발했고 결과는 실패였지만 독립군으로 발전하게 되는 저항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어서 독립운동가 수형 기록표로 구성된 민족저항실2를 만나게 된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애국지사는 수형기록표를 통해 알려지기로 약 5천 명에 이른다. 여기서 그들의 얼굴을 일일이 대면하며 희생을 기려보자. 보안과 청사 지하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육성이 울린다. 지하 1층은 일제가 애국지사를 고문했던 임시구금실과 고문실을 재현한 공간이다. 몸을 거꾸로 매달고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붓는 고문, 손톱 아래로 뽀죡한 나무를 찌르는 고문 등, 현장을 마네킹과 고문기구 그리고 설명글로 이해할수록 일제의 잔혹함에 치가 떨린다. 당시에 일본 간수들 사이에서 조선사람과 명태는 두들겨 패야 한다는 말이 나돌았다고 한다. 중앙사로 가보자. 건물 구성이 특이하다. 3방향으로 부챗살을 펼친 모양을 띠며 모이는 부분이 간수 감시대가 있던 자리다. 한 자리에서 옥사 전체를 감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독방 체험과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일본 간수에게 알리는 패통 등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일제강점기 당시 수감자들은 고문을 받은 후에도 쉴 수 없었다. 매일 10시간 넘게 노역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노역에 관한 전시는 공작사에서 볼 수 있다. 공작사는 수감자를 동원해 형무소, 군부대, 관공서 등지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던 일종의 공장이다. 붉은 벽돌에는 京(서울 경)자가 찍혀 있다. 수감된 김구 선생이 만든 벽돌도 여기에 있을지 모를 일이다. 다른 건물에서 조금 동떨어진 곳에 사형장이 있다. 일제가 1923년에 지은 목조건물로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해 전국에 투옥된 애국지사들이 사형당한 장소이다. 사적 제324호로 지정됐으며 '통곡의 미루나무'도 볼 수 있다. 열리고 닫히는 나무판 위에 교수형에 사용됐던 줄이 내려져 있다. 그 건너에는 사형집행 배석자가 앉았던 의자들이 있다. 사형장을 지나면 고문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몰래 시체를 버리던 통로 '시구문'이 있다. 약 200m 길이에 이르며 1992년에 발견됐다. 매표소 방향으로 수감자 전용 운동장으로 쓰인 격벽장이 있다. 중앙사와 옥사처럼 부채꼴을 띠며 중앙에 간수가 감시하고 수감자는 좁은 공간에서 뛰어야 했다. 어느새 서대문형무소를 한 바퀴 돌고 출입구 앞이다. 담장을 따라 되돌아가는 길, 마음 한구석이 먹먹하지만, 서울 풍경이 전보다 소중하게 눈에 담긴다. 1.찾아가는길 * 자가운전 한남 IC → 한남대교 → 남산1호터널 → 을지로2가 (시청방면 좌회전) → 시청 (숭례문, 신촌로터리방면 좌회전) → 경찰청 (서대문역 방면으로 우회전) → 독립문역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현저동 101) 2.주변 음식점 인삼갈비 : 인삼갈비, 02-335-0937 환희샤브샤브 : 샤브샤브, 02-337-7997 한방장수삼계탕 : 삼계탕, 02-363-5314 함평면옥: 냉면, 02-392-3516 3.숙소 호텔굳타임 : 서대문구 대현동, 02-364-0535 호텔림 : 서대문구 창천동, 02-363-6443 청자모텔 : 서대문구 홍제동, 02-0738-3110 그랜드힐튼호텔 : 서대문구 홍은동, 02-0356-5656 글, 사진 : 한국관광공사 국내스마트관광팀 안정수 취재기자( ahn856@gmail.com ) ※ 위 정보는 2015년 6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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