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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작고 조용한 마을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마치 그곳에 오래 살았던 사람처럼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해 먹고, 느긋하게 동네를 산책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바닷가를 걷고, 멍하니 앉아 어딘가를 바라보고, 해가 저물 즈음 집으로 돌아왔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그게 전부였다. 남해는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 여행은 관광 명소를 찾아다니느라 사흘이 빠듯했다. 이번에는 중심가를 벗어나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고 방을 예약했다. 이름은 보통의 집. 서울에서 내려온 젊은 부부가 아이 셋을 키우며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숙소가 있는 물건마을에는 오후 세 시가 막 지나서 도착했다. 때마침 근처 중학교에서 정겨운 종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곧 폐교를 앞둔 학교였다. 게스트하우스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주인집과 앞뒤로 붙어 있었다. 공동 거실 겸 주방이 있는 아담한 집이었다. 디자인을 업으로 삼는 주인의 안목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방은 모두 넷. 둘은 화장실이 딸려 있고 그중 하나는 단독 주방을 갖췄다.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섰다. 화장실이 있는 두 번째 방이었다. 하얀 벽에 채도가 낮은 패브릭 소품과 나무 가구를 들여 차분한 분위기가 풍겼다. 커튼이 쳐진 덧문을 살짝 열고 침대에 기대앉았다. 부드러운 크림 같은 바람이 나른하게 방을 감쌌다. 침대 옆에 짐을 부려 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네다섯 시쯤, 해가 지기 전의 늦은 오후였다. 바다로 향하는 골목을 기웃거리다가 동네 어귀에 있는 슈퍼에 갔다. 낚시용품을 곁들인 작은 가게였다. 커다란 물 두 병을 안고 돌아서는데 가게 뒷문 앞에 조그마한 들꽃이 떨어져 있었다. 조심스레 주워 집으로 가져가 거울 옆에 놓았다. 소박한 방이 금세 화사해졌다. 가방을 풀어 소소한 물건들을 꺼내 테이블에 나열하고, 다음날 입고 싶은 옷의 짝을 맞춰 한쪽에 걸었다. 낯선 방이 온전한 나만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남해에서의 일상은 매번 비슷하게 시작됐다.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눈은 떠졌고 오전 시간은 늘 동네에서 보냈다. 물건마을은 한눈에 들 정도로 얌전하게 들어앉아 길을 잃을 염려가 없었다. 멀리 보이는 숲길과 그 너머 바다에 가고 싶으면 그저 그쪽으로 얼굴을 향한 채 걸으면 됐다. 골목에서는 10분 이상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만큼 조용히 말을 걸어오는 것들을 한 번 더 바라볼 수 있었다. 나무 사이사이로 비추는 햇살, 바닥에 누워 몸을 말리는 콩들, 올망졸망 매달린 빨래를 만날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시간을 보냈다. 오며 가며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나누는 강아지와도 정이 들었다. “강아지야 안녕!” 지날 때마다 소리 내어 말을 걸었지만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번은 낮게 쌓아 올린 담 너머로 눈길을 돌렸는데 할머니가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할머니는 손수 가꾼 포도나무와 큼직하게 피어오른 수국을 내보이며 흐뭇해했다. 마당 한쪽에는 묻어둔 지 십 년이 넘은 김장독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개복숭아를 씻는 할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김치 담그는 비법에 대해 한참을 들었다. 올겨울 갓 버무린 할머니의 김치를 맛보는, 소박한 꿈을 꾸기도 했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하루에 한 번은 꼭 바다에 갔다. 특별히 할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멀리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거나, 해가 질 때까지 우두커니 지켜보거나, 아니면 쏟아지는 햇볕을 쬐며 책을 읽었다. 이틀은 다른 동네로 나가 바다 구경을 했다. 설리해수욕장은 평온했고, 상주은모래비치는 눈부셨다. 언제나처럼 걷거나 비스듬히 누워 음악을 듣고, 나무가 적당히 우거진 자리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게 전부였지만 전혀 따분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매시간 햇살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선물을 받는 기분이었다. 남해에 있는 동안 늘 날이 좋았던 건 아니었다. 하루는 비가 쏟아졌고, 하루는 폭염이 찾아왔다. 여행 중에 날씨가 나쁘면 손해 보는 느낌이 들곤 했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궂은 날씨 나름의 즐거움을 찾아 하루를 보냈다. 그러는 동안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에도 간단히 행복을 느꼈다. 무엇보다 소박한 마을 풍경처럼, 점점 원하는 게 적어진다는 사실이 홀가분했다. 아침부터 비가 오던 날에는 자고 일어난 차림 그대로 그 풍경을 즐겼다. 집 마당에 있는 의자에 기대 책을 읽기도 하고 음악을 듣다 다시 잠이 들기도 했다. 특별할 것 없는 시간이었지만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행복에 콧노래가 나왔다. 내일도 모레도 비가 오면 이러겠노라고 다짐했다. 빗방울이 잦아들고 나서는 슬렁슬렁 동네 빵집에 갔다. 산책하면서 눈여겨봐 둔 곳이었다. 창가에 앉아 남해 유자가 들어간 독일식 과일 케이크를 먹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맛이었다. 먹다 남은 케이크는 포장을 부탁하고 바다 앞 숲길로 향했다. 나무가 우거져 비가 쉽게 들이치지 않아 걷기 좋았다. 습한 기운을 내뿜는 숲이 얼마나 운치 있는지, 비 내리는 바다가 얼마나 아늑한지 새삼 느꼈다. 푹푹 찌는 열기에 잠을 설친 날에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더 뜨거워지기 전에 장을 봐다 놓고 빈둥거릴 생각이었다. 2일과 7일에 열리는 남해읍장은 상설시장과 겸하고 있어 꽤 분주했다. 재래시장이라면 흔히 볼 수 있는 채소와 과일들부터 해산물, 농기구, 생활 잡화까지 없는 게 없었다. 제철을 맞은 자두와 찐 옥수수를 한 봉지씩 사 들고 어물전을 돌며 구경했다. 살아 움직이는 생선과 꾸덕꾸덕하게 말린 생선이 반반쯤 섞여 있었다. 해가 중천으로 옮겨가는 시각. 바지락과 새우를 한 움큼 사가지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더위가 가실 때까지 옥수수와 자두를 물고 책을 보다가 이른 저녁으로 파스타를 해 먹었다. 남해에서 난 재료가 듬뿍 들어가서인지 마지막 한입까지 바다 향이 배어났다. 이날은 해가 더 기울기를 기다렸다가 맥주를 들고 바다에 나갔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만난 바다는 공기부터 달랐다. 자꾸 “참 좋다” 싱겁게 혼잣말이 나왔다. 그리고는 해 지는 풍경과 어울리는 음악을 다섯 곡 골라 반복해 들었다. 언젠가 무거운 하루를 버텨내고 있을 어느 날, 이 노래들이 남해의 햇살을 툭 던져줄 거라 믿었다. 금세 밤이 찾아왔고, 희미해지는 파도소리를 아쉬워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남해의 어느 마을에서 일주일쯤 살아보듯 머문다면, 단조롭지만 특별한 경험들로 그 시간들을 두고두고 기억할 것. 01. 지울 수 없어 더 특별한 필름 사진 남기기 수십 장씩 찍고 지우는 스마트폰 대신 필름카메라로 단 한 장의 특별한 사진을 남겨보자. 햇빛을 애타게 기다려야 하고, 마음에 드는 장면을 담기 위해 한 발 더 움직여야 하고, 심지어 며칠씩 기다리게 하면서 그나마도 생각대로 나오지 않아 늘 애가 타지만, 그만큼 더 오래, 더 또렷하게 그 시간들을 기억할 수 있다. 02. 동네 책방에 앉아 마음에 드는 책 읽기 모르는 동네의 작은 책방에 앉아 책을 고르다 보면 낯선 곳의, 더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온 기분이다. 책방 주인이 애써 고른 책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재미도 좋고, 취향과 딱 맞는 책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도 크다. 남해 지족마을의 오래된 골목에 문을 연 ‘아마도 책방’은 좋아하는 책을 끝까지 읽으며 오래 머물기 좋은 다정한 공간이다. 서가 안쪽으로 편안하게 앉았다 갈 수 있는 방이 마련돼 있다. 03. 남해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소 들여다보기 남해에 사는 사람들은 어디를 좋아할까. 마을 사람들과 얘기 나눌 기회가 생긴다면 꼭 한 번 물어보자. 이번 여행 중 만난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집 앞 물건중학교와 상주은모래비치를,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예술가는 내항도와 가인리 고사리밭을, 손바닥 보듯 남해를 꿰뚫고 있는 택시 아저씨는 노구마을을 첫손에 꼽았다. 남해에서 나고 자란 택시 아저씨는 아늑한 노구마을이 마음에 들어 꼭 한번 살아보고 싶은 동네라고 몇 번씩 얘기했다. 글, 사진 : 박은경(청사초롱 기자) ※ 위 정보는 2019년 9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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