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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처 준비할 틈도 없이 시작된 새해. 문득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산사(山寺)로 향했다. 모든 소리가 숨을 죽이는 그 곳에서 공백의 시간을 보냈다. 새해 첫 주말 아침, 통도사로 향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어수선한 분위기에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요즘 들어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 버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대로 새해, 또 그다음 새해를 맞이하는 게 새삼 두려워졌다. 통도사는 경남 양산에 있는 사찰로 영축산 줄기에 자리했다. 매표소를 지나 몇 걸음 걸어 들어가자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열렸다.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라는 이름처럼 바람이 춤추고 소나무의 맑은 기상이 가득한 길이었다. 숲길 옆에는 살얼음 낀 계곡이 자작대며 흐르고, 경구(警句)가 새겨진 바위가 서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글귀 하나가 죽비처럼 뇌리를 내려쳤다. 숲길을 지나 일주문을 건너 사천왕문 사이로 들어섰다. 통도사 전각과 영축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절 안은 조용했고 평화로웠다. 바깥 세상과는 확연히 다른 질감의 공기였다. 마당에 있는 약수를 한 모금 마시고는 경내를 천천히 둘러봤다. 소박한 탑과 석등을 기웃거리고, 색 바랜 외벽 벽화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대웅전이 보이는 전각 댓돌에 앉아 고즈넉한 산사 풍경을 즐겼다. 핸드폰도, 이어폰도 내려둔 공백의 시간이었다. 때로는 햇살이, 가끔은 바람이 기척 없이 다가와 곁에 앉았다. 평소보다 시간이 몇 배나 느리게 흐르는 느낌이었다. 사실 이번 여행만큼은 별다른 일정 없이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통도사는 쓱 둘러보고 지나치기엔 어쩐지 아쉬웠다. 어떤 사물의 역사를 엿본다는 것은 둘 사이에 연이 닿았다는 뜻이기도 한데, 이렇게 돌아서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 하루 더 머물면서 꼼꼼히 둘러보기로 했다. 애초에 마음을 따르기로 했으니 문제 될 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일주문 옆 문화해설사의 집으로 향했다. 꾸밈없이 말간 얼굴의 해설사가 인사를 건넸다. “시간이 얼마나 있으세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얼마든지요.” 통도사는 큰 사찰이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상노전과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한 중노전, 그리고 영산전을 중심으로 한 하노전으로 크게 구분된다. 하노전에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시선이 닿았다. 극락전 외벽에 그려진 벽화 때문이었다. 세월에 풍화된 모습 그대로 그곳을 지키는 그림들이 아름다웠다. 쉬이 변하는 세상을 잠시 비껴난 기분이었다. 후벽 중앙에 그려진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 앞에 섰다. 승려와 백성이 배를 타고 극락세계로 떠나는 모습이 담겼다. 자세히 보니 한 명만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속세에 미련이 남아서라는 설명이 왠지 슬프게 들렸다. 영산전은 극락전 오른편에 자리했다. 안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눠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걸려 있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치고 있는 자그마한 아기 부처의 모습이 보였다. 입관된 부처가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밀어 보이는 이야기도 담겼다. 조선 후기 통도사 화승들이 직접 그렸다는데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몇 개의 계단을 오르고 불이문(不二門)을 지나 사찰의 가운데 공간인 중노전으로 들어섰다. 불이문을 나서기 직전 해설사가 검지로 천장을 가리켰다. 마룻보를 떠받치고 있는 코끼리와 호랑이가 눈에 들어왔다. “불이문을 들어설 때는 호랑이가 보이고, 나갈 때는 코끼리가 보일 겁니다. 각각 깨달음과 실천을 상징하지요. 절에서 배운 지혜를 바깥세상에 나가 실천하라는 의미입니다.” 중노전의 중심 전각인 대광명전은 다른 전각들 뒤로 한 발 물러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목조건물이라는데, 내부 들보에 화재를 예방하는 묵서가 쓰여 있어서 그랬다는 말이 전한다. 이후 통도사에서는 화마(火魔)를 방지하는 글귀가 적힌 종이로 소금단지를 밀봉해 처마에 올려둔다고 했다. 실제로 대광명전 앞 용화전을 살펴보니 처마 아래에 작은 단지가 놓여 있었다. 대광명전에서 나와 상노전으로 향했다. 상노전에는 별도의 문이 없어 대웅전이 바로 나타났다. 대웅전은 건물 사면에 각기 다른 현판이 걸려 있었다. 남쪽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 동쪽엔 대웅전(大雄殿), 서쪽엔 대방광전(大方廣殿), 북쪽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대웅전 현판 아래 있는 꽃살문과 처마 끝 지붕에 달린 연꽃 봉오리를 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다른 사찰과 달리 불상이 없었다. 대신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금강계단(金剛戒壇)이 보이도록 한쪽 벽면을 유리로 만들어뒀다. 금강계단은 지정된 날짜와 시간에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침 개방하는 날이라 시간에 맞춰 금강계단으로 향했다. 흔히들 계단이라 하여 ‘오르내리는’ 용도를 생각하기 쉽지만 통도사 금강계단의 ‘계단’은 승려가 ‘계(戒)를 받는 제단’을 의미한다. 사각형 이중 기단으로 구성된 금강계단은 돌난간에 둘러싸여 있었다. 해설사는 가운데 종 모양 부도 안에 진신사리가 있다고 귀띔했다.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거닐며 한 바퀴를 돌았다. 세속의 발길이 드나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경건함이 전해졌다. 대웅전 앞에서 해설사와 헤어지고는 어제 그 댓돌에 다시 앉았다. 해설사가 주고 간 책자를 뒤적이는데 암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자장율사가 통도사 창건에 앞서 수도했다는 자장암이었다. 걷기에는 너무 멀어 잠시 고민을 하다가 전화를 걸어 택시를 불렀다. 택시는 가파르지 않은 산길을 10분쯤 달리다가 돌계단 앞에 섰다. 모든 번뇌를 내려놓으라는 108계단을 무심히 오르자 영축산 능선이 한눈에 담겼다. 암벽 아래 자리 잡은 관음전은 아담하고 소박했다. 문지방을 그대로 관통해 방바닥 위로 솟아오른 바윗돌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을 그대로 살려 법당을 지은 탓이었다. 옆에는 크기가 4m에 달하는 마애불상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아래 서서 가만히 바라보자니 하회탈마냥 너털웃음을 머금은 표정이었다. 자장암은 불심이 깊은 사람들에게만 모습을 보인다는 금와(金蛙)보살로도 유명하다. 법당 뒤편 암벽 구멍에 사는 개구리가 바로 금와보살이다. 자장율사가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금개구리를 살게 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햇살을 등지고 컴컴한 구멍 앞에 바짝 붙어 이리저리 살피다가 이내 그만뒀다. ‘어디선가 잘 살아가고 있겠지’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택시를 타고 다시 통도사로 향했다. 버스터미널로 바로 갈까 하다가 그냥 일주문 앞에서 내렸다. 어느새 어둑어둑 땅거미가 번졌고, 고요하던 경내는 더 고요해졌다. 사람이 모두 빠져나간 마당을 둘러보고 나가려는데 어디선가 맑고 청아한 목탁 소리가 적막을 깨웠다. 저녁 예불 시간이었다. 힘차게 울리는 법고 소리와 범종 타종 소리가 계곡 사이로 울려 퍼졌다. 육중하면서도 경건했다. 소리가 깊어질수록 마음은 명징해졌다. 이제야 지나온 시간을 동여매고 새해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통도사 경남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로 108 / 055-382-7182 / www.tongdosa.or.kr 2018년 6월 30일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산사는 통도사 외에도 6곳이다. 법주사 속리산의 빼어난 풍광 안에 자리한 법주사는 부처님의 법(法)이 머무는(住) 절이라는 뜻이다.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인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승려 의신이 창건했다. 경내와 암자에는 팔상전, 쌍사자석등, 석련지 등 국보 3점을 비롯해 보물, 문화재, 천연기념물 등 많은 문화유산이 보존돼 있다. 특히 국내 유일의 전통 목탑인 ‘팔상전’이 유명하다. 팔상전은 부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그림 ‘팔상도’가 있는 건물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405 / 043-543-3615 / beopjusa.org 마곡사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라 보철화상 때 설법을 듣기 위해 계곡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형태가 삼밭의 삼대, 즉 마(麻)와 같다 해서 마곡사(麻谷寺)라 불렀다. 마곡사는 화소사찰(畵所寺刹)로도 유명하다. 당대 최고로 평가받는 수많은 화승을 대대로 배출해 ‘남방화소(南方畵所)’라 불릴 정도였다. 대광보전, 대웅보전 등에 그려진 영산회상도, 삼장보살도, 칠성불화, 수월백의관음보살도, 나한도, 신중화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마곡사에서 한때 은거했던 백범 김구 선생의 자취를 돌아보는 재미도 있다. 중심 법당인 대광보전 왼쪽의 작은 집이 당시 백범이 생활하던 백범당이다. 충남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로 966 / 041-841-6221 / www.magoksa.or.kr 부석사 부석사는 국보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으로 잘 알려졌다.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승려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세웠으며 고려 공민왕 21년(1372년)에 크게 증축됐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물로 배흘림기둥이 안정감 있게 전각의 몸을 받치고 있다.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다. 네 글자를 세로 두 줄로 쓴 모양이 독특하다. 석등은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높이가 2.97m나 된다. 무량수전 오른편 숲길을 따라 오르면 의상대사의 초상이 모셔진 조사당(국보 제19호)이 나온다.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 054-633-3464 / www.pusoksa.org 봉정사 경북 안동시 천등산 기슭에 위치한 봉정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극락전을 보유한 고찰이다. 12세기에 지어진 극락전은 주심포 양식, 맞배지붕 등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극락전 외에도 대웅전, 화엄강당 등 눈여겨볼 만한 건축물이 많다. 고려 태조와 공민왕이 다녀갔으며,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찾아와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지난해 여름에는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들르며 또 한 번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신라 문무왕 12년(672년) 능인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졌다. 경북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길 222 / 054-853-4181 / www.bongjeongsa.org 대흥사 대흥사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해남 두륜산에 있는 절이다. 창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학자들은 대체로 신라 말로 추정한다. 가장 큰 특징은 독특한 가람 배치다. 절을 가로지르는 개천을 기준으로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으로 나뉜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었던 서산대사의 사당이 자리한 표충사와 천 개의 옥불이 모셔진 천불전 등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또한 추사 김정희와 원교 이광사 등의 편액이 남아 있으며, 한국 다도의 초석을 놓은 초의선사와 관련된 시설과 흔적도 보존돼 있다. 전남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 / 061-534-5502 / www.daeheungsa.co.kr 선암사 선암사는 태고종의 대표 사찰이다. 사찰 전체가 무너져 내릴 만큼 큰 화재 사고를 여러 차례 겪으면서 한때 해천사(海川寺)로 불리기도 했다. 전각 곳곳에 ‘수(水)’ ‘해(海)’와 같은 글자가 새겨진 것도 같은 이유다. 국보는 없으나 삼층석탑(보물 제395호), 승선교(보물 제400호), 대웅전(보물 제1311호) 등 다수의 주요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계곡을 오르다 만나는 승선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로 손꼽힌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토종 매화인 선암매, 지은 지 300년이 넘는 해우소도 다른 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명물이다. 전남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450 / 061-754-5247 / www.seonamsa.net 출처 : 청사초롱 글 : 박은경(청사초롱 기자) 사진 : 박은경, 국가유산청, 해남군청 제공 ※ 위 정보는 2019년 11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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