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밉다고 했다. 여행작가를 업으로 살면서 정작 당신과 여행 한번 간 일 없는 자식이 섭섭하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타박인 듯, 핀잔인 듯, 꾸중인 듯 들리는 어머니의 혼잣말에 부끄러워진 내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등 돌리고 맛있는 것 몰래 먹다 걸린 것처럼 민망하고 송구했다. 내친김에, 백발이 성성해진 부모님을 모시고 강화도로 향했다. 암묵적인 동의 아래 석모도에서 나오는 막배를 놓치고 나를 못 믿어, 아이 몰라를 주고받던 청춘들이, 마흔이 다 돼가는 딸과 찾은 섬이다. 강화도가 목적지가 된 이유는 명료하다. 특별한 계획 없이 여유롭게 다녀도 멈춰 설 곳 많아서다. 갯벌, 바다, 산, 섬을 두루 볼 수 있으며 몸에 좋은 먹거리와 특산품이 풍성하다.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과 유적이 섬 곳곳에 있어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릴 정도다. 한반도의 요새이자 왕의 피난처였던 만큼 해안선을 따라 굳건하게 선 수많은 진(陣)과 보(堡)를 이어 달리는 재미도 쏠쏠하다. 봄이 더디게 와 4월 말까지도 봄꽃이 지천인데, 서울에서 고작 한 시간 반 거리다. 여기저기 부지런히 구경하는 것을 즐기시는 부모님과 패키지처럼 일정 짜는 부담을 벗어내고 싶은 나에게 이보다 더 알맞은 곳은 없을 것 같았다. 강화대교를 건너 제일 먼저 들른 곳이다. 강화인삼을 판매하는 농협과 붙어있는 데다가, 이름마저 솔깃하게 '풍물시장'이다. 재래시장과 특산물이라면 눈이 반짝 빛나는 장년의 부부가 이곳을 지나칠리 없다. 시장으로 들어섰다. 화영이네, 영일상회, 병일이네 등. 대충 지은 것 같지만 소중한 누군가의 이름을 박아 넣은 간판들이 빼곡하게 걸려있다. 게다가 사장님의 사진도 함께 넣고 간판의 불을 밝혔다. 얼굴 걸고, 소중한 이름 걸고 장사하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값을 깎거나 덤을 달라고 조르기가 쉽지 않다. 물건도 좋고 가격도 저렴해서 흥정할 의지도 생기지 않는다. 다양한 종류의 젓갈, 풍물시장의 3층 옥상에서 꾸덕꾸덕 말려 정성껏 진열한 생선들, 강화도의 자랑인 순무와 속이 노란 고구마, 싱그러운 봄나물, 맛깔스럽게 만든 밥반찬들을 둘러보고 있자니 허기가 밀려온다. 시장 2층에 식당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주저 없이 올라갔다. 독특하다. 사면이 뚫려있는 상가 밥집들은 하나같이 평상 위에 올라서 있다. 신을 벗고 평상에 앉아 식사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집 밥을 먹는 듯 편안하다. 상가에서 가장 붐비는 밥집은 만복정. 봄이 제철인 밴댕이를 파는 집이다. 구이, 회, 무침을 알차게 시켜 먹었다. 잡히면 바로 죽는 속 좁고 성질 급한 밴댕이지만, 불포화 지방산이 많아 고혈압 환자와 허약체질에 효험이 있고 피부미용에도 좋다니, 모두가 만족할 만한 밥상이다. 옛사람들에게 이곳은 성스럽고 고결한 땅이었을 게다. 풍성한 먹거리가 나는 축복 받은 자연,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유난히 동그란 얼굴로 내려앉는 태양을 보자. 매일매일 감사와 압도가 반복되는 땅, 신성화 되기에 충분한 이유다. 그래서일까. 강화도에는 유독 고인돌이 많다. 산자락, 평지, 구릉 등에서 발견된 고인돌이 무려 127기나 된다. 강화도 역사박물관이 위치한 하점면 부근리를 찾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화의 수많은 고인돌 중 가장 크고 잘생긴 강화지석묘가 있는 곳이다. 75톤이나 되는 덮개돌이, 2개의 굄돌 위에 올라앉아 위풍당당한 모양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지석묘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봄소풍 나온 꼬마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두 손 꼭 잡은 연인들이 셀카봉을 들고, 가족단위의 나들이객은 사진 찍어줄 사람을 찾으며 두리번거린다. 지석묘에 숨이 붙어 여기 서서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무생물인 돌덩이인데 살아있는 느낌이다. 유구한 세월의 힘이다. 부근리 고인돌군 주차장은 상춘객들로 가득했다. 모두 고려산에 오르는 길이다. 기약 없이 설렁이던 중, 고려산에 진달래가 가득 폈다는 말에 그들을 따라나섰다. 강화 본섬의 삼 분의 일을 차지하지만, 해발 436m라 오르기가 수월하다는 말도 한몫했다. 봄을 맞아 분주해진 마을 길을 돌고 산길 초입에 들어섰다. 으레 그렇듯 할머니들이 경사면을 따라 좌판을 열었다. 어여쁘게 포장한 오리알, 순무, 강화사자발약쑥 등 보는 것만으로도 건강해질 것 같은 특산물들이 상춘객의 발길을 붙든다. 한 시간 정도를 열심히 오르니 백련사가 보인다. 작은 석성 위에 아담하게 올라선 백련사는 고구려 시대에 축조된 절이다. 근처에는 4세기 이전,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단으로 사용한 우물인 오련지가 있다. 절의 설화는 이렇다. 고구려의 노승이 오련지에 핀 연꽃을 공중에 날렸는데 꽃잎이 떨어져 다섯 개의 절이 됐단다. 그중 하나가 백련사다. 절 앞마당에는 품이 넉넉한 은행나무가 있다. 350년이 넘은 고목이다. 나무 주변으로 둘러앉은 아주머니들은 너나없이 자식 자랑이다. 무리와 눈을 마주친 내 어머니는 아무리 잘났어도 지금 여기 함께 있는 내 새끼가 최고라며 우쭐한 표정이다. 절에서 가쁜 숨을 돌리고 삼십 분 정도 가파른 경사 길을 오르면 정상이다. 눈에 닿는 풍경은 그림처럼 아득하다. 산을 기준으로 오른 편에는 가지런한 평야가, 왼편으로는 바다 건너의 교동도와 석모도가, 그리고 정면으로 북녘땅이 보인다. 진달래는 오른편 능선을 따라 가득 피었다. 다홍치마를 입은 새색시가 산 정상에 살포시 앉은 듯 곱고 또 곱다. 정상에 오른 모든 사람의 얼굴과 표정도 다홍빛으로 만개했다. 산에서 내려와 강화도의 남북을 잇는 84번 도로를 따라 섬을 달렸다. 마음이 동하는 대로 멈춰 서고 길을 꺾었다. 선원면의 평화로운 마을 안 길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철종의 외가, 강화도에 있는 12개의 진보와 53개의 포대 중 가장 멋진 경관을 자랑하는 광성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운양호 사건을 거치며 외적의 침공을 막아낸 처절한 전투의 현장인 초지진, 둑길로 연결된 강화도 남쪽 끝의 작은 섬 동검도,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람성 안의 천년고찰 전등사까지 옹글게 돌았다. 강화도 동남쪽으로 몰려 있는지라, 한 곳 한 곳 꼼꼼히 둘러봐도 여유만만이다. 계획 없는 여정이었지만 꼭 보겠다고 다짐한 한 가지는 강화도의 낙조다. 갯벌 많은 강화도에서 유일한 해변인 동막해수욕장을 찾았다. 시원하게 뻥 뚫린 일몰의 전경을 보고 싶다면 동막 해변 곁의 분오리돈대로 가면 된다. 분오리돈대는 조선 숙종 5년에 방어의 목적으로 세워진 포대다. 과거 사방으로 펼쳐진 바닷길을 바라보며 가슴 졸이던 곳에서 지금은 수많은 사람이 마음을 푼다. 다양한 톤의 붉은 빛이 자연스레 이어진 하늘은 더없이 뭉클하고 감동적이다. 어머니는 황혼에 넋을 잃은 듯했다. 성성한 백발도 붉게 물들었다. 가만히 서서 오랜 시간 낙조를 바라본 부모님은 자신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불을 놓은 듯 타오르는 하늘을 배경으로 나란히 선 노부부가 있다. 그 위로 갈매기들이 창공을 가른다.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오랫동안 조용히 바라봤다. 수십 년 자식을 키워내고 산전수전 다 겪은 부모님의 인생 중 지금이 가장 빛나는 시절이길 기도한다. 그리고 오늘처럼, 더 자주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하기로 다짐한다. 출처 : 청사초롱 5호 글, 사진 : 문유선(여행작가) ※ 위 정보는 2017년 5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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