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크고 화려해지는 세상, 쉴 새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 속에서 살다 보니 문득 아날로그 세상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디지털의 편리함은 없지만 삶의 속도를 한 박자 늦출 수 있는 따뜻한 감성이 살아 있는 곳.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묻어 있는 풍경. 거칠지만 자연스럽고, 투박하지만 세련된 공간에서 따뜻한 감성을 되살릴 수 있는 여행지가 진안 원촌마을이다.
특별하게 볼 것 없는 평범한 시골 마을이지만, 기계로 찍어낸 획일적인 간판을 예쁜 손글씨 간판으로 바꿔 달면서 꽤나 근사한 마을로 탈바꿈했다. 길에서 만나는 아날로그 풍경과 그 속에 보물처럼 숨어 있는 친근한 간판의 글씨체가 잊고 지낸 고향의 기억을 되살아나게 한다. 그래서 지금 나는 원촌마을을 걷고 있다. '간판이 유명해봐야 그게 그거지.' 사실 원촌마을에 가기 전까지는 크게 기대하는 바가 없었다. 그저 간판을 바꿔 달아 유명해진 마을로 생각했다. 발을 들여놓고서야 깨달았다. 크고 화려한 것만이 멋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숨어 있음을. 옛날식 벽돌 건물에 슬레이트 지붕이 줄지어 있는 마을 앞 삼거리 풍경.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시골 모습 속으로 한 걸음 더 내딛으니 지붕에 걸린 예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신발가게에는 신발이 그려져 있고, 흰구름 할인마트에는 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 있다. 맞은편 백운약방에도 흰 뭉게구름이 걸려 있다. 구름 속에는 정갈한 글씨로 '백운약방', '정류소', '고농농약사'라 쓰여 있다. 백운약방은 무주, 진안, 장수를 오가는 무진장여객 버스의 정류소이기도 하다. 첫인상이 나쁘지 않다. 간판에 손글씨로 가게 이름을 쓰고 그림을 그리거나 조형물을 부착한 풍경이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느낌이다. 도시의 획일적인 간판과는 전혀 다르다. 세련되지만 그렇다고 마을 풍경을 해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의 삶과 가까이 있는 것 같다. 옷이 날개라고 하더니, 간판 하나로 원촌마을은 소박함과 세련된 멋이 조화를 이루는 멋진 여행지가 되었다. 원촌마을이 간판마을로 변신한 것은 2007년 봄이다. 전주대학교 도시환경미술학과 이영욱 교수가 간판 재정비 사업을 제안하면서 이뤄졌다. 처음에는 주민들의 불만도 많았다. 예전 간판으로도 불편한 게 없었고, 손으로 쓴 간판 글씨가 아이들이 쓴 것 같아 불평도 했다.
대학생들이 정성스레 작업한 간판이 하나 둘 걸리면서 변화가 찾아왔다. 새로 단 간판이 30여 개. 요란스럽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은근한 매력에 이끌려 지나던 차들이 멈춰 서서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점차 입소문이 나면서 멀리서 일부러 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조용하던 마을에 외지인들이 방문하면서 몇몇 가게는 매출도 늘었다. 우리 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건 없어. 그저 간판 하나 바꿨을 뿐인데…라고 말하는 어르신은 간판을 보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마냥 신기하다. 여행자들이 와서 보는 건 간판만이 아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원촌마을 여행을 통해서 옛 풍경을 만나고, 간판마다 녹아든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잊고 지내온 아련한 기억을 떠올린다. 원촌마을은 걸어서 한 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흰구름 할인마트를 중심으로 마을을 가로지르는 큰길을 따라 농협 건물 방향으로 올라가면 원촌정육점과 합동중기 간판이 나란히 붙어 있다. 정육점에는 돼지가, 합동중기에는 굴삭기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사이좋게 나란히 붙어 있는 간판이 좋아 보여 물으니 어머니가 정육점을, 아들이 중기 회사를 운영한단다. 그 위로 간판이 제일 멋진 백운농기계수리센터가 나온다. 타이어와 드럼통, 고철이 수북하게 쌓인 사이로 하얀 상자를 4개 쌓아 올린 간판이 하나의 설치 조형물 같다. 상자 칸마다 '자동차 빵꾸', '오일교환', '밧데리'라고 멋진 글씨로 쓰여 있다. 수리센터 앞 담벼락에는 잎이 무성한 나무가 그려져 허전한 공간을 채운다. 행운떡방앗간 간판은 허름한 건물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다. 처음에는 길가 건물이나 전봇대에 달아두었던 것이 떨어지면서 방치된 것 같다. 그럼에도 보기에 나쁘지 않다. 시골스러움이 물씬 배어나는 탓이다. 방앗간을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정신없이 돌아가는 제분기 소리와 떡 찌는 고소한 냄새가 가득하다. 걸어왔던 길을 거슬러 반대로 내려가면 근대화상회가 보이고, 그 뒤 골목에 육번집, 대광철물, 덕태상회, 꿈의가게, 건강원이 나온다.
육번집은 백반을 파는 식당이다. 생선과 버섯, 게 등이 그려진 간판도 재미있지만, 육번집이라는 식당 이름도 신기하다. 30여 년 전 식당 문을 열었을 때 일명 '딸딸이 전화기'라 불리는 전화기를 사용했다. 당시는 직통으로 전화 연결이 되지 않고 교환수를 통해 연결이 됐다. 간판이 없던 그 시절 전화번호가 6번이어서 육번집이 되었다. 그 옆 대광철물점에는 삽, 망치, 나사 등 연장이 그려져 있다. 덕태상회는 대파와 마늘, 달걀, 간장 등을 아기자기하게 그려놓았다.
희망건강원 지붕에는 염소가 올라가 있다. 이곳에서 약을 해먹으면 염소가 단숨에 지붕 위로 뛰어 올라간 것처럼 힘이 솟는다는 걸 표현한 것일까. 글자를 보지 않아도 무엇을 파는지 그림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소박하면서도 위트가 넘치는 간판이다. 귀엽고 친근해서 어쩐지 믿음이 간다. 진안의 상징은 마이산이다. 말의 귀를 닮은 신비한 봉우리는 1억 년 전 퇴적층이 쌓인 호수 바닥이 지각 변동으로 솟아나면서 생겨났다. 마이산의 암마이봉(673m)과 수마이봉(667m)으로 오르는 길은 북쪽과 남쪽 두 곳. 이 중 남쪽 매표소를 통해 탑사, 은수사를 거쳐 오르는 코스가 볼거리도 풍부하고 걷기도 수월하다. 탑사는 이갑룡 처사가 천지음양의 이치와 팔진도법을 응용해 쌓았다는 탑으로 가득하다. 천지탑, 중앙탑 등 80여 기의 석탑을 자연석으로 '막돌 허튼식'이라는 조형 양식으로 막 쌓아올렸다. 돌무더기가 어지럽게 놓여 있는 것 같지만 태풍이 불어도 약간 흔들릴 뿐 끄떡도 않는다고 한다. 은수사는 탑사에서 10분 거리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꿈에서 마이산 신령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라는 금척을 받았다는 전설이 있다. 꿈 이야기를 그린 <몽금척도> 가 태극전에 걸려 있다. 겨울철이면 고드름이 하늘을 향해 치솟는 것으로 유명하다. 1.찾아가는길
* 자가운전
익산포항간고속도로 진안IC → 30번 국도(마령 방면) → 은천삼거리 좌회전 → 정송삼거리 좌회전 → 평가 → 운교삼거리 → 백운면사무소 → 원촌마을
* 대중교통
서울→진안 : 센트럴시티터미널(02-6282-0114)에서 1일 2회(10:10, 15:10) 운행, 3시간 소요 대전→진안 : 대전복합터미널(1577-2259)에서 1일 2회(15:10, 17:30) 운행, 1시간 20분 소요 부산→진안 : 서부시외버스터미널(1577-8301)에서 1일 2회(09:21, 15:42) 운행, 4시간 30분 소요 진안→원촌마을 : 진안공용터미널 앞에서 백운행 버스 이용. 1일 3회(06:00, 08:10, 14:30) 운행
2.맛집
일품가든 : 진안읍 군상리 / 흑돼지삼겹살 / 063-433-0825 진안관 : 진안읍 군상리 / 애저찜 / 063-433-2629 구내식당 : 진안읍 군하리 / 백반 / 063-433-3153 국태가든 : 진안읍 단양리 / 더덕구이 / 063-433-5588
3.숙소
호텔홍삼빌 : 진안읍 단양리 / 1588-7597 / www.redginsengspa.kr 운장산자연휴양림 : 정천면 갈용리 / 063-432-1193 / www.huyang.go.kr 마이산모텔 : 진안읍 단양리 / 063-432-4201 크리스탈모텔 : 진안읍 군하리 / 063-433-9950 그랜드장 : 진안읍 군하리 / 063-433-4373
- 글, 사진 : 오주환(여행작가)
※ 위 정보는 2012년 10월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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